업(業), 그 질량불변의 법칙

특집/만복의 씨앗, 보시

2009-04-27     관리자

━━━━━━━━━━
그 때 나의 힘든 생활은 나에게 여러 가지 지혜를 안겨주고 불교의 근본
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삶 자체를 고(苦)로 인식하는 부처님의 사
유를 나도 흉내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잡지를 만든다는 것도 어
떤 의미에서는 이타행이고, 법보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였다.


   선인 낙과(善因樂果)라는 단어가 있다. 선한 업을 지으면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말일 것이다. 요즘 나는 선인낙과라는 의미를 나름대로 간절하게 느끼며 살고 있다.
   그런대로 건강하고, 평수가 작은 아파트에서 좀 덜 먹고, 좀 덜 입고 살지만 만족하며 살고 있는 오늘의 삶이 어제의 선인(善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며 감사히 여기고 있는 것이다.
   선한 업을 짓는다는 것은 나보다는 남을 위해서 양보하고 희생하는 이타행, 즉 보시(布施)의 삶을 뜻하는게 아닐까 싶다. 인간을 사회적인 동물이라 하지 않는가. 이웃(남)을 떼어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에서 나는 지나간 시간중에서도 특히 불교 관계의 일로 가정을 소홀히 하고, 건강을 잠시 잃었던 것에 대해서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때 고생했던 사실에 대해서 두고두고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나는 세검정에 있는 S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다가 어느 날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는 「불교사상」이란 월간지를 발행하는데 그 창간 멤버가 되었다. 구도(求道)를 위해서 자살한 전남 화순의 쌍봉사 현도 스님에게 진 빚(내게 초발심을 심어준 불은)도 갚고, 불교의 향기를 좀더 맡고 싶어서였다. 더구나 나는 불교와의 인연이 조금은 이어지고 있는 편이었다. 대학시절, 불교학생회에서 얼치기로나마 그 둘레에서 빈둥거렸던 적도 있고, 방학이 되면 산사로 들어가 소설을 쓴답시고 절밥을 축내며 떠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불교사상」은 나의 시간과 건강을 송두리째 빼어갔다. 300페이지가 넘는 잡지를 편집국장 빼고 세 명의 기자가 만들려고 하니 물리적으로 버겁지 않을 수 없었다. 날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퇴근을 하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취재의 대상이 산사이거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수시로 출장을 다녀야 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수마노탑과 적멸보궁이 있는 강원도 정암사로 가기 위해 청량리행 전철을 탔는데 갑자기 코피가 쏟아졌다. 손수건을 꺼내 콧구멍을 틀어막았지만 생수가 터진 듯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출근길의 승객들이 구경거리를 찾은 듯 모두다 시선을 던지는데 어찌나 창피하던지… 그래도 나는 기를 쓰고 적멸보궁을 찾아갔었다. 지금도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졌다는 수마노탑을 생각하면 꼭 코피가 먼저 떠오른다.
   뿐만 아니다. 가정 불화까지 겹쳤다. 한달에 며칠씩은 밤 두세 시에 편집일을 마치고 퇴근하는데 아내가 방문을 따주면서 내게 열쇠를 내밀었다.
   "열쇠 받으세요. 내일부터는 당신이 열고 들어오세요."
   늦은 밤 도둑놈처럼 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선언이었다. 물론 그런 선언이 나올 만도 했다. 이왕 자는 잠, 한 사람이라도 좀 편하게 자야하지 않겠느냐는 항의였다. 그런데 나는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어디서 놀고 들어온건 아니잖아요! 내가 도둑인가?"
   결국 나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간질환을 앓게 되었다. 얼굴이 늘죽은 빛깔의 검은 색을 띠었고, 몸은 늘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아무 데서나 비실거리고 자꾸 눈꺼풀이 내리감기곤 했다. 이제는 수면을 충분하게 취해도 소용이 없었다. 무력증이 생겨나 정신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잡지를 만드는 순간만은 힘이 조금씩 솟아났다가는 빠져나가곤 했다. 쥐꼬리보다 작은 월급에서 매달 얼마씩 약값을 떼내어 장기 복용을 했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집은 엉망이 되었다. 그나마 서울 변두리에서 전세로 살다가 치솟는 인플레와 나의 무능력 탓으로 경기도 광명시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 때 우리는 이사를 하면서 광명시의 광명(光明)이란 말이 우스워 서로 웃었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표어가 생각나서였다. 그런데 우리집은 광명이 두 번이나 들어 있었다. 광명시 광명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나의 힘든 생활은 나에게 여러 가지 지혜를 안겨주고 불교의 근본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삶 자체를 고(苦)로 인식하는 부처님의 사유를 나도 흉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잡지를 만든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타행이고, 법보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였다. 그러니 내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큰스님들의 법문을 가끔 듣곤 했는데, 그것도 「불교사상」지에 얽힌 일들로 말미암아 그런 기회가 자주 찾아왔다. 특히 전관응(全觀應) 직지사 조실 스님의 '인연(因緣)'이란 법문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인'이란 것은 주된 조건을 말하고 '연'이라는 것은 보조 조건을 말하는데, 농사를 예로 들자면 씨앗은 주된 조건이고, 어떤 농부가 어떤 때에 어떤 땅에 어떤 방법으로 심었다는 것이 보조조건이야.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열매가 맺는데 그 중간에서도 크게 하고 익게 하는 모든 것이 다 보조 조건이야. 사과를 비탈밭에 심어 놓으면 사과가 몇천만 개 열려도 모두가 삐딱하게 생긴 채로 열리지. 그러니까 우리도 모든 것을 바르게 해야 해요. 바르게 앉고, 바르게 집을 짓고 바르게 생각하고."
   최근에 나는 불교잡지나 신문에 빈번히 글을 발표한 셈이다. 속되게 표현하지면 「불교사상」이란 복전(福田)에다 씨앗을 뿌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언중유골(言中有骨)로 나의 글이 불교잡지를 도배하고 있다며 지금의 나를 되돌ㄹ아보게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청탁이 오는 한 쓰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쓸 힘이 있을 때 나는 스스로를 장작개비처럼 활활 불태우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작업이 날림공사가 되지나 않을까 하여 두렵기도 하다. 관응 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씨앗은 뿌렸지만 비탈밭에 심은 사과처럼 나의 글들이 삐딱하게 보여지지나 않을까 진실로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인낙과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들먹이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이타행의 보시를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선인낙과한다는 자연의 섭리를 확신해서이다.
   이러한 섭리를 업(業)의 질량불변의 법칙이라고 새롭게 명명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작년부터 아내가 나의 이 한마디에는 꼼짝을 못해오고 있다.
   "이만큼 살게 된 거 다 불교사상 만들 때 고생한 덕분이야."
   "하긴 그런 것 같아요."
   "좋은 일 하면 언젠가는 꼭 복받게 된다고."
   "누가 뭐래요? 벌써 몇번짼지 아세요? 불교사상 좀 그만 파세요."
   아내가 어떤 계기로 「불교사상」시절의 고생을 인정해 주고 있는지, 그 이유를 나는 잘 모른다. 어쨋든 아내는 나보다 더 신심있는 불자(佛子)가 될는지도 모른다. 거실에 계시는 돌부처님께 하루도 빠짐없이 예불을 해오고 있어서이다. 佛光


정찬주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으며, 83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소설 「새들은 허공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유산」등이 있으며 현재는 법보신문에 「니르바나의 길」을 연재하며 샘터사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