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른 법 의지해 살아간다면...

특집/믿음, 깨달의 나무(覺樹)를 가꾸는 밑거름

2009-04-25     관리자

  '믿음'이란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경전의 말씀은 평소에 가끔 되노이고 하던 대승경전의 최고봉「화엄경 현수보살품(賢首菩薩品)」에 "믿음은 도의 으뜸, 공덕의 어머니로 갖가지의 착한 법 더욱 자라게 하여 갖가지의 의혹을 없애어 다시없는 깨달음을 열어 보이네" 라고 하는 유명한 게송의 일절이다.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종교의 핵심은 믿음이다. 그래서인지 흔히 종교를 신앙이라고 하거니와 신앙이란 다름아닌 믿음의 동의어인 것이다.

  나는 어떤 글을 쓸 때 그 글의 개념 정의를 위해서 사전을 가장 먼저 들추어 보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믿음이란 말을 찾아 보았더니 '꼭 그렇게 여기며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와 있었다.

  사전(辭典) 해석에서 보이듯이 믿음이란 꼭 그렇다고 여기는 긍정의 정신과 의심하지 않는 즉 부정적 생각이나 견해를 내지 않음을 일러 믿음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땅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종교들은 '우선 믿으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상례이다.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될 것이라는 메세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래도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간다느니, 천벌을 받는다느니, 불속에 던져진다느니 하는 전도(傳道)연설을 듣고 있노라면 숫째 이것은 전도 연설이 아니라 공갈이나 협박처럼 들리는 경우가 있어 오히려 평소에 가졌던 믿음마저도 움츠러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그들의 말대로라면 지극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결론밖에 나지 않았겠지만.

  부처님은 언젠가 제자들을 향하여 "눈 있는 자는 와서 보고, 귀 있는 자는 와서 듣고, 그것이 합당하거든 고개를 끄덕이고 그 뒤에 믿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말씀에 따른 불교의 믿음은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증명할 수 없는 것을 그냥 막연히 믿으라는 말은 아니었다.

  따라서 불교의 가르침은 믿음에 있어서 믿는다는 행위 그 자체에 중요성을 전혀 두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기실(其實)은 무엇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한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믿음이란 말은 그냥 맹목적으로 믿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믿음을 맹신(盲信)이라 하여 경계한다.

  바른 믿음(正信)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 바른 선정(正定) 등의 참됨을 더 많이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신(信)이란 글자는 그냥 믿음이라고 쓰기 보다는 신행(信行) 신해(信解) 신심(信心)등으로 복합된 의미로 나타내는 경우가 더욱 많은 점 또한 특이하다.

  이러한 불교의 종교적 특성은 일반적으로 다른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이기도 한데 대부분의 종교들이 인간밖에 존재하는 신이나 초월자 절대자 등을 선정하며 그러한 대상을 신앙하는 데 비하여, 불교의 궁극적인 믿음은 깨달음 즉, 각자(各者))의 마음을 그 근본으로 삼는데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 있어서 가장 근간(根幹)이 되는 믿음은 천지만물에 불성(佛性)이 내재(內在)해 있다는 것을 믿는 동시에 모든 중생들의 내부에도 불성으로 충만해 있음을 믿는 일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믿음이란 근원적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이 모두 궁극적으로 부처라고 믿는 일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관점은 다른 종교에서 이 유일자(唯一者)나 유일신(有一神)을 신앙의 근간으로 삼는 것과는 상반(相反)되는 견해로, 부처라는 개념이 한정된 특수한 소수(小數)의 존재가 아니라 깨달은 사람이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열려진 시각에서 출발하고 있음이 불교 교리의 특징이요, 불교적 믿음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믿음 아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곧 중생(衆生) 즉(卽) 불(佛)이라든가,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든가, 준동함영(蠢動咸靈)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는 선언과 사상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유교경(遺敎經)」에서 '자명등 법명등(自明燈 法明燈)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때 자명등에서 자(自)는 단순한 자기가 아니다. 번뇌와 망상에 찌들린 자신, 죄악과 욕락에 휩싸인 자신이 아니라 근원적 자기, 부처인 자신을 가르키는 말인 것이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절대신(絶對信) 결정신(結定信)을 가지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우리들은 누구나 처음부터 부처이며 결국 살아도 죽어도 부처 말고는 될 것이 없으니까 미래에는 꼭 부처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말이다.

  지금은 자신이 일으킨 온갖 번뇌 망상으로 부처의 성품을 가리우고 있지만, 수행을 통하여 번뇌 망상이 없어지면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라는 믿음이다.

  비유를 들자면 거울에 때가 잔뜩 앉으면 본래 거울로서의 기능은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거울이 아닌 것은 아니듯이 닦으면 언젠가는 본래의 성품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마치 하늘에 구름이 잔뜩 낀 날은 얼핏보면 푸른 하늘이 없어져버린 것같지만 구름이 걷치면 푸른 하늘이 나타남과 같이 우리들의 성품 가운데서 번뇌와 망상만 없어지면 바로 우리가 부처라는 생각이 결정신이요 절대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도는 누가 어디에서 막연히 누군가가 구원해줄 것이라고 기다리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구원한다는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구원은 타의적(他意的)이 아니고 자의적(自意的)이다. 중생이 되는 것도 부처가 되는 것도 다른 신이나 절대자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 자체를 잘 쓰지 않는다. 그 말 자체가 타의적이기 때문이다. 그 말 대신에 해탈한다 각(覺)한다는 등의 말이 자주 쓰이는 것을 보더라도 불교 자체의 성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적 지반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든가 자작자수(自作自受)라든가 인과응보(因果應報)라든가 하는 인과의 법칙과 연결되어 도양적 도덕의 한 줄기로서 면밀히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이제까지 앞에서 잠깐 언급한 '자명등 법명등'이라는 말 가운데에서 이제까지 이야기한 것은 주로 자명등적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라면, 이제부터 법명등적 측면에서 믿음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법(法)이란 진리를 지칭하는 불교적인 용어 다르마(Darmha)에서 나온 말이다. 법이란 부처님의 깨달으신 내용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리의 속성, 법의 속성은 그냥 법의 속성 자체로 머무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법은 법륜상전(法輪常轉)이라는 말이 상징 하듯이 법은 구르고 움직이는 것이 그 근본적인 속성인 것이다. 마치 법이란 글자가 가르키듯이 물이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 물의 속성이듯이 말이다.

  따라서 진리에의 믿음은 믿음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의 실행, 실천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백번 천번 '나는 진리를 믿습니다'하고 외치는 것 보다 한가지라도 법에 맞추어 실천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법명등이 될 것이다.

  불교인의 수행절차인 신(信) 해(解) 행 (行) 증(證)에서 보여 주듯이 믿음은 언제나 참다운 이해와 함께 할 때 맹목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올바른 믿음이 되듯이 부처님 말씀 즉, 진리는 항상 행해지는 것을 그 근본으로 삼는다. 따라서 내가 부처님의 법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말은 내가 부처님의 법을 실천하겠습니다 라는 말이다.

  가끔 나는 엉뚱하게도 이런 의심에 빠질 때가 있었다. 과연 부처님은 깨달으신 후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지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분의 초기 경전인 「잠아함경」에 이렇게 그 심경을 토로하고 계신 것이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움비라마을 니련선하 곁에 있는 보리 나무 밑에 계셨는 데 부처되신지 얼마 안되었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는 혼자 고요히 생각하시다가 이렇게 생각하셨다. "공경하지 않은 사람은 큰 고통이다. 차례가 없고 남의 뜻을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큰 의리에서 타락하게 된다. 공경할 것이 있어 차례가 있고 그것에 순종하면 그는 안락하게 지낼 수 있다. 공경할 것이 있어서 차례가 있고 남에게 순종하면 큰 의리가 만족해진다. 혹 어떤 하늘이나. 악마. 범(梵). 사문. 바라문. 하늘신이나 세상 사람 중에서 내가 두루 갖춘 계율보다 낫고, 해탈보다 나으며, 해탈지견보다 나아서 나로 하여금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게 할 것이 있으면 나는 그를 의지해 살리라"고

  다시 생각하였다."어떤 하늘이나. 악마. 범. 사문. 바라문. 하늘신이나 세상 사람에게는 내가 두루 갖춘 계율보다 낫고 삼매나 지혜나 해탈지견보다 나아서, 나로 하여금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게 하여 그것을 의지해 살만한 것이 없다. 오직 바른 법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아 삼먁삼보리를 이룩하게 하였다. 나는 그것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 가리라. 왜냐하면 과거의 여래(다 옳게 깨달은 이)도 바른 법을 공양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았고, 미래의 여래(다 옳게 깨달은이)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 것이기 때문이다"하고.

   우리는 과연 이 「아함경」 경구(經句)를 읽으면서 무엇을 믿고 의지할 것인지 그 의미가 확연해졌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여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았듯이 우리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른 법 의지하고 살아 간다면 깨달음의 문은 저절로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명 : 스님, 양산 통도사 극락암에서 출가하여 해인사, 통도사 교무국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해인」지 편집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