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의 향기] 충남 예산 금오산 향천사

천년 법향(法香) 샘솟아나는 포교수행도량 금오산 향천사

2009-04-24     사기순

금오산 향천사는 '명산(名山)이 명찰을 낳는다'는 말이 사뭇 무색한 도량이다. 바로 거기에 향천사가 있기에 금오산이 빛나 보이고 위대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절이 개산되면서 비로소 이 산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름은 혼(魂)이 아닌던가. 백제 말 의자왕 16년 (서기 676), 당대의 고승인 의각 스님에 의해 향천사가 창건된 뒤부터 천삼백년 동안 끊임없이 신심깊은 선남선녀들의 살뜰한 귀의를 부처님과 함께 이 산도 받아왔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어디 그뿐이라, 이 가람에 주석하면서 피나는 정진 끝에 혹은 생불이 되고 혹은 선신이 되었를 수많은 스님네의 향기가  곳곳에 배어 있는 영광 또한  이 산은 누리지 않았던가. 적어도 향천사 어귀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자에겐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부처님의 대자비가 응집되어 있는 서기(瑞氣)라고 해야 옳을까? 아무튼 말할수 없이 성스러운 어떤 힘이 금오산 산자락의 단풍을 눈부시게 만드는 것 같았다. '불성(佛性 )이로다. 불성(佛性)이로다' 노오란 은행나무,
도량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푸른 소나무, 가지끝마다 세월의 무상함을 달고 있는 듯한 늙은 느티나무, 그리고 바위와 산새들과 마른 풀들까지도 스님들을 흉내 내고 있었다. 

돌계단을 오르면 훤하게 트인 경내가 드러난다. 바로 맞은편에 극락전이 있다.우리들의 이상향, 절대적 행복의 세계인 극락정토를 일구어가는 신행의 장소이기에 극락전은 고뇌하는 중생들에게 살갑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이 나라에 대웅전 다음으로 많은 것이 극락전이라는 사실도 이를 증명해준다.

행복을 추구하는 자, 반드시 극락전의 삼존불께 지성 다해 참배 할 일이다. 마음 속에 담고 있는 고인(古人)이 있거든 무량수불께 간청한번 해볼 일이다.극락전의 현판.주련(柱聯),포교 사무실이 들어 있는 동선당(東禪堂)의 현판 글씨가 멋있다. 어쩐지, 탄허 스님이 쓰셨단다. 글씨에 눈밝은 이라면 눈길 한번 더 줌 직하다. 단아한 경내에는 극락전 , 나한전, 동선당, 종각, 단월당, 서선당,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구층석탑이 짜임새 있게 놓였다. 한편 이절을 찾는 이들은 유념할일이다. 반드시 서편 작은 계류(溪流)위의 영산교(靈山橋)를 지나야 한다는 것을.

영산교를 지나면 곧바로 천불선원이 나오고 그 안에 천불전이 있다. 안내판의 글을 잠시 더듬어 본다.  "선(禪)은 순수한 집중을 통해서 인간의 존재를 실상으로 자각하는 길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 길입니다‥‥선원앞을 지나는 인연으로 모든 진취적인 지성인들이 다함께 진리의 문호를 두드릴 수 있고, 그리하여 그 영혼을 구제할 수 있는 기연이 되기를 바랍니다".
 

천불선원은 스님네들이 부처님을 본받아 피나는 정진을 쌓아가는 곳, 스스로의 마음을 갈고 닦으면서 중생구제의 비원(悲願)을 세우는 곳이다. 현재 일곱 분의 스님께서 용맹정진 중이라고 했다 안타까운 것은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어 천불전의 부처님들을 만나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옛날 개산조 의각 스님께서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겨레의 평화와 안녕과 번영을 위하는 일념에서 옥돌로 한분 한분 조성하셨다는 천불전의 부처님을 뵙는 순간 찡한 전율에 몸을 떨었다. 둥근 부처님, 네모난 부처님, 눈이 처진 부처님 코가 뭉툭한 부처님 등 각양각색의 부처님들이 천태만상의 인간군을 연상시켰다. 

그리곤 법열(法悅)이 가슴으로부터 용솟음쳤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일성(一聖)을 터트린 부천님의 대자비가 거기에 있었다. 모두가 평등하게 부처될 성품 지닌 소중한 우리들 아닌가. 아니 본래로 우리는 청정한 존재 아닌가. 천불전에서 서쪽으로 70여미터 발걸음을 옮기면 부도 2기(基)를 볼수 있다. 이 절의 개산조 의각(義覺)스님과 중창조 멸운(滅雲)스님의 부도엔 저승꽃이 곱게 피어있었다. 합장만 하고 돌아선다면 후인의 행동이 너무 건방질 터, 수행 잘하고 포교 잘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는 향천사 스님을 모셔와 의각 스님과 멸운 스님의 혼을 바로 오늘 이 자리에 되살려 볼 일이다.

현각(玄覺:향천사 주지)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의각 스님은 키가 7척이나 되고 불법에 밝았다고 합니다. 스님은 평소에 반야십경을 일심으로 독송하시어 눈고 입에서 광명이 나는 등 이적(異蹟)을 많이 나투셨다고「삼국사기」에 전하고 있습니다." 의각 스님은 당대의 뛰어난 고승이었다 깊은 학덕과 반야의 빛나는 위력을 몸소 실증해보인 큰 스님 이었다. 반야의 불가사의한 경지에 든 의각 스님의 말씀을 들어 본다. 내가 밤에 눈을 감고 반야심경을 백번 외우고 나서 사방 벽이 훤출하여 뜰밖까지 내다 보이기에 일어나서 벽을 만져보니 벽과 창은 그대로 있었고 다시 앉아서 경을 외우니 역시 사방이 툭 터져 보이더라.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의각 스님 부도 앞에서 반야심경 한편 독송한다면 큰 공덕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의각스님의 행적을 살펴보면, 스님은 백제가 난국에 처했을 고 백제 당시 오산현 북포 해안
(현재 예산 신암 창소리)에 도착했다. 절터을 마련하고자 배 위에서 1개월 동안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했다. 그때 경읽는 소리와 종소리가 강촌에 가득찼다하여 그 마을을 종경리라 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날  금 까마귀 한쌍이 날아와 배 주위를 돌고 사라지기에 이를 기이하게 여긴 스님이 까마귀를 따라가보니 향기나는 물이 샘솟고 있어 절터로 안성마춤인 곳이었다. 이 절이 개산되면서 이 산을 금오산(金嗚山)이라 했고 절이름을 향천사(香泉寺)라 하였단다.

창건 당시 신이한 일은 또 있다. 부처님을 옮겨 모실 때 홀연히 흰소(白牛)가 큰 수레를 끌고 와서 다 날라주고는 절 동구밖에 나가서 고함을 지르면서 해탈을 때(의자왕 12년) 문화사절로 일본에 건너가 백제사에서 잠시 머무르다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 곳 오자산에서 조국을 위해 부처님 조성하는 큰불사를 시작하고 옥돌로 과거 현재 미래의 3천불의 연원인 53불과 16나한상을 조성하였다. 3년만에 다 완성한 부처님을 돌배(石舟)에 모시게 했다고 한다. 그소는 지금 고함바위로 남아있다.

"이조 때는 멸운 스님께서 주석하면서 승풍을 드날렸는데, 임진란을 만난 멸운스님께서는 이 절 스님 50여분으로 승군(僧軍)을 조직, 영규대사와 조헌 선생이 이끄는 금산 전투에 참가하셨답니다. 그렇게 절을 비운 사이 왜군이 해안으로 들어와서 향천사를 전소시켰답니다. 다행히도 이 마을의 조처사라는 분의 꿈에 부처님이 현몽하여 극락전 삼존불의 소실은 막을수 있었습니다. 전소된 향천사를 멸운스님께서 중건하셨고 그 가람의 윤곽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조국 평화의 염원을 갖고 의각 스님에 의해 반야도량으로 개산된 향천사. 임진란 때는 멸운스님과 대중스님들이 분연히 일어나 호국에의 의지를 불태웠고 또 근래에는 보산 스님이 주석하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가람의 면모를 ㄹ일신했다. 조상 스님네들의 청정불심을 면면히 이어온 향천사는 오늘날 포교와 수행의 도량으로 타사찰의 귀감이 되고 있다.

신도회 .거사림.합창단.청년회.고등부.중등부.어린이법회 등 각종 법회의 뜨거운 열기는 금방이라도 예산 시내를 부처님 세계로 만들것만 같다. 향천사 십여분스님들의 출가본분을 잊지 않고 용맹정진하는 수행력과 지칠줄 모르는 포교에 대한 의지의 발로 아니겠는가. 천년 법향(法香)이 샘솟아나는 향천사를 나서자니 돌연 주지 스님의 말씀이 입가에 맴돌았다. 
"입를 잘 지키고 뜻을 잘 거두고 몸으로는 짓지말고 이와같이 행하는 자가 능히 도(道)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