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신심시심

2009-04-24     관리자

 사람에게는 세가지의 삶이 있다 그 첫째는 남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삶이요, 둘째는 남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살아가는 삶이며, 세째는 자기외에 남을 위하고 도와주며 살아가는 삶이다. 이 중에서 남을 위하고 도와주며 살아가는 삶이 가장 값진 삶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오직 자기의 삶에만 몰두하여 남의 삶까지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먹고 남아도 자기 것을 위하여 더 쌓아둘지언정 남에게 줄 생각을 않는것이 범상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요즘의 세상을 보아도 그렇다.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민주자본주의 사회인만큼, 잘 살고 못사는 이들이 있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너무 잘사는 사람이 많은 반면, 너무 못사는 사람 또한 많다고 하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분배과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사회적제도에만 책임을 돌릴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사람 개인개인이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 하고 남을 위하고, 남에게 줄 줄을 모르는 데서 오는 현상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나보다도 남을 생각하고, 내가 갖는 것보다 남에게 줄 줄 아는마음, 이 마음이 곧 보살의 마음이다. 보살은 자리(自利)보다 이타(利他)를 위한 삶을 산다. 이 괴로움의 사바세계에서 살고 있는 모든 무명(無明)의 중생들을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저 깨달음의 이상향에 보내기 전에는 절대로 피안(彼岸)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 보살의 서원이다. 그리하여 중생들을 위하고 그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하여는 타는 불, 끓는 물 속에라도 들어간다는 것이 보살의 마음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요, 다른 사람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기에 ,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모두 행복하기 전에는 자기도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보살의 삶이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스님은 이와같이 보살심과 보살행을 한편의 시로서 나타내고 있다. 

나는 나룻배 /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며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낣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여기서 나룻배인 나는 보살이요 곧 만해다. 또 행인인 당신읜 중생이요 곧 님이다. 무명과 번뇌가 들 끓는 이 쪽의 언덕과, 깨달음이 충만한 저 쪽 언덕의 사이에는 소용돌이 치는 생사의 고해(苦海)가 도도히 흐른다. 여기서 나룻배인 보살은 오욕(五慾)과 삼독(三毒)에 사로잡힌 중생들을 저 열락의 피안으로 가게 해주는 존재이다. 실로 나룻배인 보살은 사바세계 최후의 한 사람까지 구제하기 위하여 세세생생 온갖 모욕과 고통을 참으며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비록 중생이 '흙발로 짓밟을'지라도 밟히면 밟히는대로, 또 아무리 물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 이라도 어떤 고통이나 난관이라도 극복하면서 중생을 위한 자기희생의 정진에 물러섬이 없는 것이 보살의 마음이요 삶인 것이다.

 주고 또 주고, 위하고 또 위해도 이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 중생이다. 그러나 보살은 이를 포기함이 없이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보살행을 멈추지 않으며 '날마다 날마다 낡아'간다. 남을 위해 사는 보살의 삶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선(禪)은 그것이 관념만으로 끝날 때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일상 속에 살아옴직여야 하고, 또 실천으로서 행하여지며 내가 아닌 남과 이웃을  위하여주고 베푸는 보살행으로 연결될 때, 그 참된 의미가 발휘되는 것이다. 남을 위한 삶의 참뜻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