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심 갖춘 지혜로 나와 이웃의 해탈 구하리”

세계의 선지식들 3 - 달라이 라마

2007-03-28     관리자

- 16세부터 간경·명상 통해 보살행의 원력 닦아


달라이 라마의 법문을 엮은 책이 출간되거나, 해외뉴스에서 그 분의 동정 기사를 볼 때면 필자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곤 했다. 이처럼 바쁘게 살며 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수많은 회의와 법문을 하는데 과연 그 밑천이 어떻게 바닥나지 않는 것일까.
16세의 청년 시절에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에 대해 무한 책임을 져야만 했고,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해 오던 상황에서 어떻게 법력(法力)을 쌓을 수 있었을까. 과연 경전 공부와 함께 실제적인 수행의 시간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던 것이다.

바다 같은 큰 지혜를 가진 스승
이런 쓸데없는 망상은 그 분을 티베트의 통치자나, 대강백(大講伯: 대강사)으로만 여기는 일부 사람들이 가질 만한 분별심이리라. 필자가 그 분을 친견한 때로부터 벌써 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국내 불자들은 여전히 서양인을 대상으로 한 쉬운 법문과 평화 활동 등으로만 그 분을 평가하는 것 같다. 하지만 국내 불교계 일부의 곱지 않은 시선은 그 분의 깊은 고뇌와 수행을 제대로 알게 될 때 긍정적으로 변화되리라 확신한다.
세계의 석학들, 특히 과학자들과의 허심탄회한 대화와 당신의 몸조차도 학자들의 실험에 내놓는 그 분의 용기, 그리고 중국의 침략과 탄압까지 용서하고 오히려 감사(티베트 불교의 세계화)하는 대자비심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는 그 분의 바다와 같은 성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바다 같은 큰 지혜를 가진 스승’을 뜻하는 달라이 라마(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서,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 환생을 택한다고 한다)라는 예로부터의 칭호가 그 분의 심성과 어울리는 것 같다. 73세의 고령에도 경전 공부와 명상을 쉬지 않고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겸허하게 사는 그 분의 모습은 무주(無住), 무념(無念)의 실천이 일상 속에서 완전히 용해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백 번 듣는 게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듯이, 필자는 2000년 6월, ‘달라이 라마 방한준비위원회’ 일행과 함께 티베트의 망명정부가 소재한 인도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면서 그 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얻었다. 달라이 라마 궁에서 가진 기자회견은 주로 그의 방한과 세계 평화, 남북통일, 티베트의 문화와 독립 등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자들의 수행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으니, 당시의 문답은 이러했다.

문: 일상생활에서 무지와 집착을 없앨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가르침을 주십시오.
답: 세상의 인연에 의존해서 존재를 보지 말고, 궁극적인 본질에 대해 관(觀)하는 ‘지혜의 수행’을 하면 무지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족(自足)하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세 가지 독(三毒)’이 점차 줄어들어 온갖 욕심과 집착이 저절로 소멸됩니다.

문: 수행에 도움이 된 깨달음이나 경험이 계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 깨달음에 관해 말하자면 공(空)에 대한 경험과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리심(菩提心: 깨달음을 향한 구도심)과 이타심에 대한 경험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나를 새로운 인간, 티베트의 지도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노력이 어떤 어려운 상황도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게끔 도와주는 내면의 힘과 용기를 줍니다.

문: 평생 수행하는 동안 깨달음의 경지를 체험한 독특한 순간이 있었습니까.
답: 1965년 또는 1966년경, 공(空)의 원리와 보리심에 대해 특별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체험은 개인적인 일입니다. 진정한 종교수행자라면 이를 개인적으로 간직해야 합니다.

수행자로서의 면모
달라이 라마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성하께서는 깨달음을 얻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 때마다 그는 “나는 부처가 아니라 아직도 공부 중인 평범한 승려일 뿐입니다.”라며 겸손하게 말한다. 여기에서 진정, 자기를 낮추고 언제나 배우는 자세로 정진하는 수행자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문답을 통해 필자는, 그 분의 수행과 깨달음, 그리고 보현행(普賢行)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전 세계를 무대로 정력적인 전법활동에 매진하면서도 이처럼 고요하고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개인적인 수행을 한 시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하루 일과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오후 8시 30분에 끝나며,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한다. 방문객을 접견하는 것 외에는 명상과 독서로 시간을 보낸다. 특히 달라이 라마는 연중 2회는 꼭 안거(安居)에 들어간다. 그 땐 어떤 알현이나 공식적인 정교(政敎)의 일을 하지 않고 명상에만 전념한다. 주로 여름 우기 때와 티베트 설날 전에 그런 일정을 잡는다. 짧게는 보름에서 20일, 한 달을 명상 속에 있다. 이 바쁜 세월에 또 그런 지위와 세수에도 시간을 내어 정진하는 끝없는 발심이 지구촌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승으로 자리매김한 원동력일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개인 수행은 의식과 몸의 조화로운 각성을 강조해 온 평소의 소신에 기인한다. 그는 인류가 두 가지를 규명해야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 두 가지는 인간 의식의 규명과 몸의 내적인 성숙으로서 쿤달리니[丹단]의 각성이다. 의식의 규명은 명상을 통한 깨달음이고, 쿤달리니의 각성은 명상을 통한 에너지의 전환이다.

보리심은 깨달음의 씨앗

물론 명상을 통한 공성(空性:연기법의 근본)의 깨달음은 철저하게 보리심을 기반으로 한다. 당신은 법문 중 가끔 울먹이며 목이 메어 진행을 못 할 때가 있는데, 이 때는 대개 ‘보리심’에 대해 설법할 때라고 한다. 부처님의 6년 고행담을 이야기할 때나, 티베트 불교의 최고 논서로 알려진 『람림(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강의할 땐 여러 차례 법문이 멈춰진다. 또 그는 스승의 은혜를 말하다가는 말문이 막히거나, 심지어는 울음보마저 터진다. 세계의 스승이 설법 도중에 울먹이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천진(天眞)한 면모가 보리심을 먹고 사는 수행자로서의 본래면목인 것이다.
보리심은 깨달음의 씨앗이다. 철저히 보리심에 근거해 수행하며, 보리심으로 나와 이웃을 해탈케 하는 티베트 불교는 진정한 ‘대승불교의 꽃’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은 것 같다. 보리심을 수반한 지혜만이 전지(全知)와 해탈을 막는 장애를 제거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한다. 때문에 달라이 라마는 수행자들이 꼭 깊은 산속이나 암굴에서 민중을 멀리한 채 자기만의 수행을 고집하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때 그런 경험을 갖는 것은 좋지만 수행자라면서 민중과 함께하지 않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열린 세상에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탁월한 자비심과 보현행은 한국불교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 분은 여전히 방한을 희망하고 있고 한국이 중국의 눈치를 보는 한 비자 발급을 허용하기 어렵겠지만, 이미 그 분은 국내 불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불교도 뛰어난 점이 많지만 티베트인들의 불법을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증득[信解行證]하는 과정이 생활 속에서 녹아들어가 있는 모습은 본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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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인도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 라마는 제14대 계승자로, 본명은 텐진 갸초다. 1935년 7월 6일 티베트의 동북부지역인 타크처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제13대 달라이 라마인 툽텐 갸초의 환생자로 인정받아 ‘왕위계승’ 교육을 받다, 1940년 정식으로 제14대 달라이 라마로 즉위했다. 새로운 달라이 라마가 된 어린 아이는 9년간의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합병하자,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정치적인 전권을 인수하였다. 티베트가 공산화된 이후 달라이 라마는 국토와 고유문화 및 종교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1959년 발생한 티베트 국민의 민중봉기에 대해 중국이 무자비하게 탄압하자 인도로 정치적 망명길에 올랐다.
1960년 달라이 라마는 고국 티베트와 가장 가까운 히말라야 산맥 아래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워 밀려드는 난민을 보호하는 한편, 일부 티베트인들의 ‘무장 강경투쟁’ 주장을 다독거리며 평화와 비폭력에 의한 티베트의 자주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다람살라에서 그는 13만 명의 티베트 난민과 30여 개 국에 흩어져 있는 티베트 난민들을 위한 망명 수도이자 최후의 피난처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달라이 라마는 1987~1988년 아시아 전체의 안정을 가져올 평화조약 5개 조항을 제안하는 등 중국과의 대화를 열기 위해 노력했지만, 중국의 강경자세로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세계를 주유하면서 범종교적인 상호이해, 자비심, 환경 보호, 세계평화를 위한 감명 깊은 설법을 하며 세계인의 마음에 불법의 씨앗을 심고 있다.
그는 비폭력 평화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핵실험 금지와 세계 평화 및 인권을 위해 헌신한 공을 인정받아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막사이사이상과 스웨덴의 월렌베르히 인권상을 받기도 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으로부터 조국을 빼앗긴 대신, 전 인류의 가슴에 부처님의 자비를 전하는 평화의 사도이자 영적 스승으로서 우리 시대의 불교 중흥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