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성사(元曉聖師) 총간오도(塚間悟道)-유학

연재소설

2009-04-24     관리자

 둘이는 나란히 걸었다. 비탈길에선는 대개의 경우 원효가 앞서 걷고 의상이 그 뒤를 따르지만 길이 넓은 데서는 언제나 나란히 걸었다.

  원효는 명랑한 성격인 의상이 퍽 마음에 들었다. 자기 자신도 명랑한 편에 드는 터이지만, 귀족의 집안에서, 부모님 슬하에서, 아무런 근심없이 곧게 자란 의상은 늘 환한 웃음이 열사흘 달처럼 피어 있었다.

  원효도 보통 이상으로 활달하고 명랑한 성격이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외롭게 자라온 터라 어느 한구석에 늘 우수가 서려 있었다.

 "형님"

  "응?"

  "저는 통쾌한 기분이 가끔 있어요."

  "뭐가 통쾌해?"

  "놓칠 뻔했던 형님을 빼앗기지 않고 이렇게 제가 차지해서 머언 길을 떠나는 거 말이요."

  "아니 누가 나를 빼앗아 간댔는가? 공연스레 망상 피우지 말아."

  "형님 화나셨수?"

  "아냐, 아우가 부질없는 망상에 사로잡히니 말이지."

  "서라벌이 온통 떠들썩하게 소문이 자자했는데 공연한 헛소문이우? 우리 큰스님께서도 직접 말씀은 아니 하셨지만 속으로 여간 염려하시지 않으셨나 봅디다."

  "말씀 않으시는 큰스님 속마음을 아우는 어떻게 알아냈나?"
  "접때 형님께서 유학갈 뜻을 아뢰었을 적에 큰스님께서 그날밤 뭐라하셨는지 알으시우?"

  "아니 모르는데."

  "원안 사형님이랑 저랑 부르시더니 '원효는 과연 큰 그릇이다'하시고는 '암 그렇구 말구. 일체중생의 어버이가 될 대장부가 일개 아녀자에 마음을 빼앗길 리가 있느냐?' 하시며 흐뭇해 하신 표정을 지으셨어요."

  "그게 정말이야?"

  "그럼요."

  "본시 나쁜 소문은 더 잘 퍼지지."

  원효는 스승님이신 원광 법사께서 자기에 대한 항간의 소문을 들으시고 계시다니 순간 얼굴이 붉어진다.

  견성성불(見性成佛) 하여 삼계의 대도사가 되었단 소문이나 나서 은사의 귀에 들어가는 건 모르되, 기껏한 여자의 사모의 표적이 된 소문이 스승에게 알려진 것은 분명 불명예요, 유쾌할 수가 없는 소식인 것이다.

  비록 한 나라를 다스리는 여왕일지라도 여성은 분명 여성이요, 여성이 남성을 사랑하고 남성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히 번뇌이며 윤회의 씨앗인 것이다.

  '지금까지 백천만생(百千萬生)을 내려오며 사랑에 얼키고 설켜서 갖가지 중생신(衆生身)을 받아, 갖은 희노애락(喜怒愛樂)을 받아왔거늘 뭐가 부족해서 또 윤회(輪廻)의 굴레를 쓰랴?' 함이 원효가 평소에 갖는 맘가짐이요, 또한 그의 수도 이념(修道理念)이었다.

  그렇길래 여왕의 간절한 뜻을 알아차리고는 우정 궁중법회(宮中法會)를 사양하여 자장 법사(慈藏法師)로 하여금 궁중 출입을 많이 할 기회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자장 법사는 승만 여왕과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일찍이 중국에 가서 문수기도(文殊祈禱)를 성취하여 부처님 사리(舍利)와 정골(頂骨) 그리고 부처님의 금란가사(金欄架娑)를 받아 모시고 온 큰스님이다.

  자장 법사는 원광 법사보다 스무살 가량 연하이지만 전왕인 진덕여왕(眞德女王)때부터 나랏님의 존경을 받아 나라 안의 전체 승려를 다스리는 승통(僧統)이 되어 그 권위는 국왕 못지 않게 대단하였다. 또 화엄학(華嚴學)을 연구하여 일가견을 이루었으며 율사(律師)로서도 다른 스님의 추종을 허하지 않는 청정비구인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 첫손에 꼽는 고승으로는 아무래도 가장 원로격인 원광법사였고 그 다음으로는 지명 법사(智明法師)이며 그 다음이 자장 법사였다.

  지명 법사도 화엄학자요, 대율사로서 원광 법사를 전후하여 중국에 유학을 다녀온 고승이다.

  뒷날 원효가 「화엄경소 」를 쓸 적에 주로 지명 법사를 찾아가 어려운 대목을 문의한 것으로 보아 그의 법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넉넉히 짐작할 것이다.

  위의 삼대고승(三大高僧) 외에도 이들 고승에 못지 않은 숨은 도인들이 수없이 많다.

  그 많은 고승들은 모두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제각기 묻혀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원효와 같은 명석한 사람도 미처 몰라보고 친견하지 못한 숨은 도인이 허다하였던 것이다.

  원효가 승만여왕의 눈에 큰스님으로 보인 것인 그의 출중한 인품과 학식이 겸전한 모습이 여왕의 눈에 비추어졌기 때문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화랑으로 있을 적에 그의 친구인 거진랑(擧眞郞)의 시체를 적진에 달려가서 안고 온 무용담도 적잖이 작용했다.

  거진랑은 여왕 다음으로 큰 세력을 쥐고 있는 김춘추공(金春秋公)의 사위로서 야유다라는 미녀의 남편이었다.

  춘추공은 승만여왕과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만일 여왕이 승하하게 된다면 왕위를 계승할 유일한 후보로 보아도 거의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춘추공인지라 그의 과부된 딸 아유다는 승만여왕에게 있어 제일 가까운 여성이었다.

  승만여왕은 일찍 과부가 된 아유다를 거의 매일 궁중으로 불러들여 늘 곁에 두시고 말벗을 삼으셨다.

  "아유다"

  "예-"

  "원효스님이 네 지아비의 시체를 안아온 분이라지?"

  "예, 그러하다 하옵니다."

  "거진랑의 아버지도 안아오고?"

  "예-."

  "오, 정말 대장부로고 -."

  "몸종 합절의 시체도 안아 오셨다 하옵니다."

  "허어! 정말 대장부야."

  이런 말을 제삼자가 들으면 그저 있을 수 있는 말이려니 하고 여기겠지만 심중에 사모의 정을 지닌 여인들의 대화이매 사실 심상치 않은 것이다.

  아유다가 원효를 알게 된 것은 아버지 춘추 공이 원효의 얘기를 몇 차례 한 데서 비롯한다. 

  원효가 분황사에 정학하여 사오 년을 지내는 동안 그의 이름이 서서히 드러나더니 한번은 춘추 공이 유신 장군과 함께 분황사에 참배 갔다가 유신 장군이 원효를 알아본 것을 계기로 원효의 이름은 곧 궁중에 알려지게 되었다.

  원효가 화랑으로 있을 당시 거진랑과 무산(茂山)싸움에 출전하였을 때 신라군의 총대장은 바로 유신 장군(庾臣將軍)이었다.

  거진랑의 아버지 비녕자(丕寧子)가 적진에 돌진하여 수십 명의 적군 장졸을 쓰러뜨리고 죽자 아들 거진랑이 뒤이어 적진으로 달려갔고 거진랑이 장렬히 죽자 그의 종 합절(合節)이 주인의 뒤를 이어 적진에 뛰어 들어 적군을 베다가 최후를 마쳤단 얘기는 전에도 언급한 바 있거니와, 이 광경을 시종 지켜 본 유신 장군이었다.

  이어 원효가 적진으로 달려가 비녕장군과 거진랑. 합절의 시체를 차례로 업어왔다.

  다른 군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 크게 의분심을 일으켜 죽기로써 적진에 돌진하여 수천의 적군을 베고 승전하였던 것이다.

  유신 장군은 그때 세 시체를 업어 온 원효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분황사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를 단번에 알아보고 아는 체하자 원효도 합장으로 유신 장군을 맞았다.

  "춘추장군, 이 스님이 바로 거진부자를 업어 온 서당화랑이요."

  유신 장군이 이렇게 원효를 소개하자 춘추 공은 원효의 손을 덥썩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하고 장하다고 몇 번이고 칭찬하였었다.

'  이리하여 거진랑의 아내였던 아유다는 원효를 알게 되었고 승만여왕에게도 원효의 공로를 아뢰어 여왕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이들 두 여인의 가슴에 사모의 정이 싹텄던 것이다.

  화랑은 신라 여성들의 사모의 대상이었다. 어려서부터 수련생인 낭도(郎徒)로 들어가 남보다 뛰어나게 수련을 쌓아야만 화랑이 되는 것이다.

  일단 화랑만 되면 수백 명 낭도를 지도하는 우두머리가 되고 그 휘하낭도들의 존경은 물론, 온 백성들의 신앙의 표적에 가깝도록 숭배를 받기도 한다.

  관리들도 마찬가지다. 관리들 자신이 화랑출신이요, 후배 화랑들을 극진히 대우한다.

  신라의 여성들은 씩씩하고 늠름한 화랑을 가장 멋진 사내로 여겼다.

  학문도 거개가 깊거니와 무술에 있어 일당백(一當百)의 실력이 있으며,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신의 있고 용맹하고 또 어진 마음씨 지닌 화랑이야말로 가장 멋진 사내가 아닐 수 없다.

  불교가 국교로 되어 차츰 온 백성이 신앙하게 되자, 신라의 여성들은 멋진 사내의 모습을 불교에서도 찾아냈다. 화랑에서 보던 그 멋진 품위마저 모두 번뇌를 돌려 훌훌 벗어버리고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라 청정(淸淨). 적정(寂靜)을 익히는 의젓한 모습. 태산이 무너진다 하여도 끄떡 않을 부동지(不動地). 불퇴전지(不退轉地)에 안주(安柱)하여 광명을 발하는 거룩한 모습.

  때로는 바다보다 넓고 허공보다 큰 미묘난사의(微妙難思議)한 법문을 무애변(無碍辯)으로 연설하며, 때로는 독룡(毒龍)을 항복받아 백성의 피해를 덜고, 때로는 기도로써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하는 등 갖은 신통을 다반사(茶叛事)로 구사하는 거룩한 모습의 승려야말로 일국 전체의 존경의 대상이요, 흠앙의 심볼이었다.

  말하자면 불교가 널리 전파되면서 신라 여성들의 사모의 대상이 더욱 확대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며, 이 중 얼마간은 화랑에서 승려로 그 대상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계율을 지니고 오로지 수행에만 힘쓰는 것은 어디까지나 승려들 자신이 하는 영역이고, 신라 여성들이 사모하는 그 정열, 그 속마음까지 금하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고 보면 이들 여성들은 마음을 다하여 훌륭한 스님을 우러르는데 아무런 장애도 스스러움도 없었다,    -계속-

백운 ; 화엄사, 범엇, 송광사에서 강주를 지낸 바있으며, 현재 부산 미륵사 주지로 있다,. 저서에 「양치는 성자 」「초의선사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