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인도 9 나가르쥬나콘다

부처님이 나신 나라, 인도 (9) 남인도 불교의 중심, 나가르쥬나콘다

2009-04-23     관리자

마드라스행 기차가 남으로 남으로 내달린다. 엊저녁에 뿌네를 떠나 하루 동안 꼬박 달려왔지만 아직 목적지는 멀다. 이글거리던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지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대지에 어둠이 내린다. 어느 새 눈썹달이 떴다. 음력 초닷새는 지난 듯 다소 살이 올라 노란색이 더욱 선명하다. 무엇이든 어린 것은 밉지 않다. 따지고 보면 흙덩이에 불과할 저 눈썹달조차도 그렇다. 아름답다는 말은 곧 선하다는 말일 것이다.

홀연 왔다 문득 가는 것이 삶이라면, 그것이 삶의 실상이라면, 삶의 면면이 찰나 아닌 것 없고 처음 아닌 것 없다 할 것이지만, 처음보다는 처음 아닌 것이 더 많은 것이 범부의 삶이요, 나의 모습이다. 이러한 나의 삶에 마드라스는 대단한 처음이었다. 서름 살이 넘도록 외국으로는 인도가 처음이었고, 그 중에서도 마드라스 였으니 보는 것마다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새롭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곳에서의 두 해는 실로 늘 처음이고 늘 새로운 것이었다. 최초는 최고와 일맥상통한다.

이번에 마드라스로 가는 것은 남인도의 불적을 돌아보기 전에 우선 마드라스의 콘네마라 박물관을 보는 것이 순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박물관은 남인도, 특히 나가르쥬나콘다 계곡과 인드라 지방의 불적지에서 나온 수많은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마드라스에 도착한 날로부터 연 사흘동안 이 박물관을 드나들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 촬영이 금지된 다른 여러 고고학 박물관에서 맺힌 한을 푼 셈이다.

나가르쥬나콘다로 가자면, 하이데라바드에서 크리슈나강을 따랄 내려가든가, 아니면 뱅골만의 군투르에서 이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이크슈바쿠와조의 수도로 한 때 남인도 불교의 중심이었던 이곳은 원래 비자야푸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현재의 이름은 대승불교 중관학퍄의 개조로 칭송되는 나가르쥬나의 리음에서 따온 것으로, 중세에 붙여진 것이다.

전통에 따르면, 나가르쥬나는 이곳에서 약 60년 동안 승가를 이끌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어떤 고고학적인 발견이나 뚜렷한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그가 남인도 지방의 교살라국에서 제바와 만났다는 기록이 있으나, 교살바라국의 위치에 대한 해석이 저마다 다르니, 나가르쥬나가 교학을 논한 것이 반드시 오늘날의 나가르쥬나콘다였다고 말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불교- 특히 대승불교-가 번성해 왔으며, 발견되는 명문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중국이나 스리랑카 등지에서 학승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는 사실이다.

‘콘다’는 이 지방 언어인 텔루구어로 ‘언덕’을 의미한다. 이처럼 나가르쥬나콘다의 유적은 원래 크리슈나 강 언덕에 있지만 1969년에 완공된 나가르쥬나사가르댐 공사로 대부분의 유적은 인공 호수 아래 잠기게 되었으며, 이 때 주요 유적들을 인공 호수 내의 한 섬으로 옮겨 놓았다. 지금 우리가 나가르쥬나콘다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섬을 가리킨다.

유적이 있는 섬으로가기 위하여 이른 아침에 선착장으로 갔다. 생각보다 섬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 짐작컨대, 남인도의 큰 명절 가운데 하나인 퐁갈 축제 기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발 디딜 틈없이 빼곡이 사람들을 태운 낡은 철선은 그야말로 위험천만이다. 설상가상으로 도중에 폭우가 쏟아지고, 우왕 좌왕하는 사람들 틈에 끼여 속수무책으로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삐죽삐죽한 바위산 기슭에 배를 대고 사공이 외나무 다리하나 덩그라니 걸치면, 사람들은 마치 곡예를 하듯 배를 내린다. 십년감수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삼십리 뱃길이었다.

섬은 조용한 낙원이다. 언제 그랬느냐 싶을 정도로 하늘은 맑게 개어 있고 길섶에 휘늘어진 부겐베리다 붉은 꽃이 고요하다. 약간 경사진 길을 한참 따라가면, ‘다’자 모양의 고풍스런 고고학 박물관이 나온다. 수몰지역에 있었던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박물관 초입에 코브라를 모티브로 한 돌조각이 두 점 세워져 있고, 이 문양은 박물관 외벽 아랫도리에 빙 둘러 장식되어 있다.

역시 사진 촬영 절대 불가의 벽을 넘지 못한 채, 박물관 뒷문으로 나와 소로를 따라 모퉁이를 돌면, 이 섬에 복원된 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가람 양식을 보여주는 싱하라 비하라유적이 먼발치에 보인다. 우선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절터가 아니라, 흔히 사진으로 보는 예의 그 불상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기에 세워진 불상은 모조품이며, 진품은 박물관 안에 보관된 것이다.

이 가람에는 만다파를 둘러싼 3면에 승방을 배치하였고 주방이나 창고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방도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 면에는 직사각형의 사당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말굽 모양의 작은 사당을 조성하여 각각 붓다의 입상과 스투파를 안치하였다. 이것은 스투파와 비하라로 구성되는 전통적인 가람 양식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의미하며, 불상이 도입된 이후에도 스투파 숭배가 공존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지방의 불교가 차츰 대승불교를 지향해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장방형을 이루는 이 건물에 인접하여 대스투파를 조성한 것은 이 지역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 양식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문지방앞에 놓인 반달 모양의 석재 장식도 이채롭다.

섬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당시의 왕들- 이들은 대개 힌두교도였다-이 마사제를 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유적이 있으며, 또한 이 섬에서 가장 웅장하고 중요한 대스투파를 볼수 있다. 이 스투파는 이크슈바쿠 왕조 초대 왕의 여동생인 찬타쉬리가 기진한 것으로, 명문에 따르면 아난 존자의 감독 하에 조성된 것이다. 전체적으로 차크라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스투파의 상부에는 네 방위에 아야카석주를 세우고 명문을 새겼는데, 이 또한 스투파 양식의 변천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독특한 예로 기록된다.

다만 옛 유적을 공허하게 재현하고 있는 이 섬은, 전해지는 이름만큼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나가르쥬나의 숨결을 느끼기란 더욱 어렵다. 유적은 역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래도 굳이 이 섬에서 나가르쥬나를 찾아내라 한다면, 박물관 초입에 서 있는 코브라 문양의 조각을 들어야 할 것 같다. 박물관 건물 아랫도리를 돌아가며 이 문양으로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범어로 나가 는 뱀 혹은 용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