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화산을 다녀와서 (3) - 인간의 승리 천태산정의 지장왕 보살

이남덕 칼럼

2009-04-23     관리자

화성사 육신보전을 참배한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나서 우리는 천태정상에 오후 3시 경까지 오를 수가 있었다. 구화산 등산길은 모두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계단수가 다 합하면 8만 6천 8백개나 된다고 한다. 그것을 일일이 사람의 어깨로 긴 돌을 져 나르며 지금도 군데군데 계단공사를 하는 것을 목도했을 때 중국사람들의 무서운 저력에 대해서 실감할 수 잇었다.

엊그제 지나온 황산 72봉도 다 돌계단으로 된 등산길이었다. 이 실력가지고는 만리장성을 몇 개라도 더 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화가에서 천태정상까지 2만 3천여 개의 계단이라니 내가 어떻게 거길 다녀왔나 꿈만 같다. 한 계단 한 발자국씩, 왕복 하면 4만 6천 보를 오르내린 셈이다. 구화가에서 백세궁까지의 오르막 게단에서 일어났던 일. 만일 노약자가 산에 오르려면 좌교라는 일종의 인력거를 타고갈 수 밖에 없다. 바퀴 달린 인력거가 아니고 앞 뒤 두 사람이 떠메고 가는 가마식인데, 가마라야 대소쿠리만한 크기에 겨우 궁둥이만 들어가게 돼 있다.

나를 보더니 안성맞춤의 대상으로 점찍고 이 좌교꾼들이 모여들어 타고가라고 졸라대는데 “내가 지금 김교각 스님 다니시던 산길 발자취를 찾아 가는 길인데 가마 타고 가게 생겼냐.”싶어 아무리 손사래를 흔들고 거절을 해도 막무가내다. 계단을 오르는 것보다 좌교꾼들 거절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런데 그와는 정반대로 천사백 년이나 되었다는 나무 봉황송 지난 지점에서 꼭대기 천태봉까지 전장 1,350m의 구간을 12분 동안에 갈 수 있는 케이블카가 놓여 있어서 앉은 채로 신비로운 구화산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관음봉 차아산봉 그리고 이름모를 산봉우리들이 하늘을 찌르는데 그 발밑 천인벌벽 산허리에는 돌계단의 띠길이 휘감고 있다.

천태봉으로 가는 이 근처의 절과 암자 건물들은 모두 산형세에 의지해서 절벽이나 계곡 등에 지었기 때문에 건축학의 천재들이 있는 지혜를 다 동원해서 지은 듯하다. 앞면을 베란다로 지었는데 실은 동과 서를 잇는 통로로 양쪽의 출입문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들른 고배경대사도, 그 위에 있는 천태사도 깎아지른 절벽 위에 지었기 때문에 건조된 기초 또한 직각을 쌓아 올린 위에 지은 건물이다.
드디어 우리는 천태산봉 꼭대기에 올라왔다. 구화산의 초고봉이라는 시와봉이 바로 옆에 부르면 대답할 듯이 서 있다. 그런데 나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감동을 천태봉상에서 받았다. 천태봉 꼭대기는 비교적 편한 넓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바위를 몇 발 걸어서 향을 바꾸었을 때 그 바위 너머에 길이 나 있고 그 길 끝에 단정하게 깎은 듯한 이등변 삼각형 동굴이 있는 것이었다.

겨우 몸이 들어가기 편할 정도의 넓이로 된 석실이었다. 사람들은 거기서 예배하고 있었다. 바로 거기가 김지장 스님이 수도하시던 동굴이었다. 앞에 있는 편한 바위에 앉아 눈 아래 사면을 보니 멀리 구름바다가 아득히 깔렸을 뿐, 거기에는 고요적정의 극치였다. 스님께서 참선하시던 자리가 여기일까. 70여 년 동안의 구화산 수도 생활은 처음에는 지장동, 노호동, 동애굴을 위시하여 아마도 안 가보신 동굴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는 천태산정의 이 동굴이다. 비바람을 막고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동굴. 그리고 이 자리다. 그가 이 자리에서 어떤 참선 어떤 삼매에 드셨을까. 일망무애의 운해를 내려다보며 독좌대응봉의 고봉관을 하셨을까.

화성사의 이름에서 그는 법화경과 가까운 분임을 알 수 있었는데, 천태정정 산봉우리의 이름에서 다시 한번 천태 지의 대사의 법화경 경도를 연상하게 된다. 그것은 또 궁극적으로는 아미타 신앙에 귀착하는 것이다. 지의 대사의 “ 보보성성염념유재아미타불” 의 염불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교각 스님이 정토 4부 불경을 무척 사랑하여 백리 밖에 있는 남릉 땅에 친히 가서 구하여 온 기록이 있다. 남릉 사람들이 스님의 구법열에 감동하고 숭경하여 혼연히 몇 사람이 손을 나누어 필사본을 만들어 드리니 마치 극진한 보배를 얻은듯 산으로 돌아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잠심해서 읽으셨다는 것이다.
정토 4부경이란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 아미타경, 고음성다라니경이다.

앞에서 본 고배경대사 대웅전 옆 돌계단 위에 ‘고배경대’ 라는 터가 있는데 여기서 교각 스님은 화엄경을 배송했다고 한다. 물론 정토4부경도 배송했을 것이다. 구화산 고봉들이 스님의 청정한 독경소리에 심취 경청했으리라. 천태봉 서쪽에 대봉청경석 이라는 바위가 잇는데 대붕새가 지장보살의 송경 소리에 감화해서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을 지경이다. 스님과 구화산은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구화산 천태봉상에서 온누리와 하나가 되었으리라. 온 누리에 가득찬 진여불성과 한마을 삼매에 들었으리라.

부처님이 드시는 해인 삼매 가운데 에서는 부사의한 여의 공덕이 한량이 없다고 법성게에서도 말씀하셨다. 불경에서 ‘부사의, 불가사의 ’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종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기적적 현상에 대해서는 인간의 사고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기에 우리 중생들에게는 경이로울 뿐이지 의심하거나 부정할 근거는 없는 것이다.

김지장 스님이 입적하셨을 때도 부사의한 이적이 일어났다. “온 산이 울리면서 바위와 돌들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는 기록에서 나는 부처님께서 상서를 보이실 때 광명을 발하고 대지는 ‘욱종진동’을 했다는 불경의 말씀을 상기했다. 칠십여 년간을 구화산과하나가 되어 삼매에 드셨던 스님이 입적하시는데 산하대지인들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그와는 대조적으로 스님께서 돌아가시자 사중의 큰 종을 쳐도 종소리는 울리지 않고 대종은 땅에 떨어졌다. 이렇게 동과 저의 극치로써 대자연은 그의 열반 드심에 감응을 표시한 것이다. 삼 년 후 밀봉한 독뚜껑을 열었을때, 그는 안색이 살아 있는 모습처럼 유연했고. 뼈마디에서 금사슬 흔드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승도들이 그의 유체를 남대 위에 삼층석탑을 세워서 모셨는데 그때도 땅에서 원광이 발하여 오색빛이 하늘에 닿았으므로 그곳 을 신광령이라 했다. 후인이 그 탑에 전각을 지은 것이 육신보전 인것이다.

 
등신불은 바로 이 기적의 결정체이다. 생물이 죽어서 시신이 되면 유정물이건 무정물이건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부패하지 않는 것이 없다. 유정물의 경우, 나무 같은 무정물보다 부패의 속도가 더 빠르다. 부패한다는 것은 그 생명체의 내부에 부패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등신불의 경우, 고목나무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부패하지 않고 원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생명체 내부에 일미진의 부패요소도 없었다는 말이니, 아아 얼마나 청정무구한 심신이셨기에 그렇게 될 수 있었겠는가. 그 자리가 바로 진여불성과 하나인 자리가 아니겠는가.

그 청정성이란 오랜 각고의 수도정진 생활의 결과임을 생각할 때 천지신명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청정한 계행을 지키고, 삼독번뇌의 독소를 뿌리뽑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상을 여윈 반야광명 속에서 참선 수도하신 스님, 그러면서도 오직 중생제도의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의 화신이기에 중생과 하나가 되신 것이다 내가 먼 길을 찾아가서 이런 큰 감동을 받게 된 것도 그분의 원력에 의한 부처님의 가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믿어진다.

천태봉에서 돌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길은 다리 힘줄이 땡겨서 올라갈 때보다 발디디기가 몇 배나 힘들었지만 마음은 기쁨에 가득 찼었다. 영성주 보살과 나는 팔짱을 끼고 “지장보살 지장보살...”고성염불 리듬에 맞추어 그 많은 돌계단을 내리막길을 한달음에 뛰어내려 올 수가 있었다. 고유명사로 불리울 김교각 스님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보여 주신 ‘지장왕보살님 ’인 것을 구화산 천태봉에서 실감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