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금강 월출산을 품안은 영암

바라밀 국토를 찾아서/ 영암군

2009-04-23     관리자

불교사의 인물 가운데 우리 민족의 사상사에 가장 넓고 깊은 자취를 남긴 스님은 누구일까? 원효 스님이나 의상 스님께서 누구보다 깊은 자취를 남겼다고 한다면 그 넓이에 있어서야 도선 국사를 따라갈 분이 없지 않을까? 하긴 이 세 분의 명성을 빌어 창건되었다는 절이 전국에 걸쳐 반은 뭣해도 족히 3/1은 되고도 남으니 선사들의 자취를 굳이 깊이나 넓이로 따져 무엇할까?

도선 국사 하면 누구나 풍수를 먼저 떠올린다. 풍수를 미신연하고 비과학이라 누명씌웠던 오랜 미명(?)에서 두 눈을 쓱쓱 비벼 전통의 지리학으로 새롭게 자리매기고 있는 요즘,. 도선 국사께서 우리 민족 생활상에 끼친 영향은 한층 빛을 발한다. 이런 점에서 도선 국사는 원효나 의상 스님보다도 이 땅의 민초들에게는 불교를 생활에서 부대끼게 한 누구보다 친근한 스님이요. 대대로 천 년을 우러름 받는 큰 스승이었는지 모른다.
영암, 월출산 꼭대기 신령스러운 바위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이 고장에서 바로 민족의 큰 스승인 도선 국사가 태어났다. 입 속으로 영암을 불러보면 눈에는 월출산이 떠오르고 떠오른 월출산에선 자연스럽게 도갑사가 따라나온다. 이 도갑사가 통일신라 이전에 문수사로 불리 울때 어린 도선 국사가 그곳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 지방에 전하는 ‘최씨원 전설’에 의하면, 옛날 최씨 성을 가진 처자가 이곳에서 빨래를 하다가 물에 떠내려 오는 사람 키만한 참외를 먹고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이 아이가 도선 국사로 최씨 부인은 이 아이를 낳자마자 내다 버렸으나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날개로 덮고 먹이를 물어 와 먹이므로 문수사 주지스님이 이상히 여겨 데려다 기르니 장성하여 스님이 되었다. 이후 도선 국사가 중국에 다녀와서 문수사터에 절을 지으니 그것이 오늘의 도갑사라고 했다. 이 얘기는 그대로 도갑사의 창건설화가 되었다

봉긋봉긋한 산으로 에워싸인 호남벌 복판에 훨훨 타는 듯 웅장하게 솟아오른 월출산은 그렇게 한 위대한 인물과 위대한 진리, 불교의 만남을 잉태했다. 월출산은 얘기만 듣고 실컷 자다 일어나 쳐다봐도 ‘ 아, 저것이 월출산이로구나.’ 할 정도로 인근에서는 닮은 산이 없다. 수려한 바위 군락이 겹겹으로 산머리에 올라 서 있어 큰 헛기침 한번에 우르르 쏟아질 것 같다. 광주에서 나주를 지나 덕진 낭자의 고운 뜻이 서린 영산포 덕진다리에 이르면 벌써 산의 먼 자태가 눈에 들어온다.

 강진행과 목포행으로 나뉘는 삼거리가 영암읍이고 이곳에서 목포쪽으로 방향을 잡아 평평한 시오릿길을 가다 왼편 산길로 다시 십리를 가면 도갑사가 나온다. 다시 말하자면 월출산 서쪽 능선이 가라앉는 지점이 바로 도갑사다. 입춘이 지난 지 수십여 일이 됐건만 여기는 때 아닌 폭설이 내겼다고 한다. “나가 쬐끄매서 그렇게 내리는 거 보구 시방이 츰이오,” 눈이 얼마나 내렸냐고 묻는 말에 40대 동네분이 큰 목소리로 대답하는 남도사투리가 과장만은 아닌 것 같다.

눈 쌓인 아침 도갑사는 한적했다. 해탈문(국보 제 50호) 안으로 보이는 피안의 세계는 나부끼는 눈꽃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적멸 그 자체다. 호남의 절집들은 이런 고즈넉함이 남아 있어 좋다. 세 개의 어깨돌 나란한 층층다리를 밟고 올라 참으로 오랜 만의 여유로운 구경이라 생각하며 아껴아껴 해탈문을 살핀다. 대체로 단정한 느낌이 드는 이 건축물은 조선 세조에서 성종 연간에 만들어진 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양식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양편 초입에는 금강역사가 나누어 서있고 뒤편으로는 각각 사자와 코끼리 등에 올라앉은 문수동자와 보현동자가 다소곳이 미소 짓고 있다. 이들 모두는 뛰어난 목공예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밖에서는 비바람을 막으려 쳐놓은 바람막이에 가려 볼 수 없지만 안에서는 목조 건축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맛볼 수 있다. 여말선초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히는 수덕사 대웅전이나 인근의 무위사 극락전에서 보이는 건물 측면의 면 분할이 여기에도 아주 잘 보여진다. 가만 살피면 단청빛이 푸릇하게 남아 있는 것이 보이지만 이미 그것은 단청으로서의 효용가치는 끝나 보이고 여닫이 널문이 걸려 있었던 듯 중앙에는 문을 해달았던 흔적도 보인다.

이 문을 지나야 진정 부처님의 땅에 이른다고 했던가. 마주 보이는 대웅전에서 이쪽을 응시하고 계실 부처님의 위용이 느껴지는 듯도 싶다. 대웅전 앞에 세워진 단정한 오층석탑을 눈으로 어루고 그 양편에 자리한 퇴색한 두 채 요사도 가만가만 살펴본다. 대웅전 뒤편에는 목포대학교 발굴팀이 한창 발굴조사 중이어서 현재의 규모보다 훨씬 더 컸을 원래의 가람터를 밝혀주고 있다.

여기서 뒤편 등산로를 따라 백여 미터 올라가면 개울 건너에 작은 법당이 한 채 더 있다. ‘미륵전’이라는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큼직하게 쓴 판액을 달고 있는 이곳이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89호)을 모셔둔 미륵전이다. 높이가 3미터에 달하는 장부형의 부처님께서 근엄하게 자리하고 계신다. 고려 초기의 양식을 띠고 있다고 하는데 불신과 광배가 한돌로 조성되었다. 등산로를 따랄 조금 더 올라가면 조선조(선조14년)에 세운 비로서는 그 규모나 솜씨가 크고 뛰어난 도선수미비가 나온다. 하얀 비신에 회오리 치는 듯한 자연 돌무늬가 인상적이다.

도갑사에서 구정봉 오르는 중턱인 갈대밭까지의 2.6 킬로미터 계곡이 홍계골이다. 이 계곡길 끝에 있는 고갯마루가 미왕재이고 그 고개를 넘어가면 강진 무위사에 이른다. 지금이야 등산객이 주로 찾는 국립공원 등산로지만 예전에는 스님들이나 오르내리며 선심 다잡던 한적한 길이었을 것이다. 미와재에서 험한 바윗길로 1.5 킬로미터를 더 가야 어떤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 산꼭대기에 아홉 군데나 있다는 구정봉에 다다른다.

장비랄 것도 없는 트래킹용 등산화 한켤레에 의지해서 구정봉까지는 그런 대로 무사하게 올라왔지만 올라오는 코스 대부분에서 면장갑 한 쪽 끼지 못한 양손까지 동원해야 했다. 꼭대기에 올라갈수록 눈은 더 쌓여서 발목을 낚아채던 축축함이 이제 무릎께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가끔씩 허리를 펴고 내려다 보는 산 아래 풍경은 몇 번이고 포기하고 내려가려던 발걸음을 돌아세웠다. 아스라이 목포시가 보이고 그 너머로 서해바다가 남실거렸다.

남쪽으로는 다산 정약용과 초의 선사께서 다담을 나누며 거닐었을 만덕산 자락도 구강포 잔잔한 물결에 실려 보인다. 구정봉에서 북쪽 가파른 바위 능선을 타고 오백 미터쯤 가면 깎아지른 바윗면에 마애여래좌상(국보 제 144호)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규모에서나 솜씨에서나 그 풍모가 빼어난 부처님으로 소문 나 있다. 눈길을 기다시피 여기까지 올라온 목적이 바로 이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우린 결국 그 발치에서 포기하고 내려와야 했다. 구정봉 아래 통신부대 울타리 옆으로 난 내리막길에서 전혀 사람 발자국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처럼 원을 세웠던 사람이 있었든지 무릎이 훨씬 더 잠기는 내리막 눈길을 용감히 따라간 발자국이 찍혀 있었지만 한 20 미터를 못다가서 끊기고 말았다. 거기서 약 30미터쯤 더 발자국을 연장하며 객기를 부려 보았지만 눈밭 위에 총총 아쉬움만 찍고 돌아섰다.

구정봉에서 월출산 제일봉인 천황봉까지는 손으로 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천황봉 아래 천황사쪽 능선은 꽤 가파라서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구름다리도 놓여 있지만 오르내리기에 시간은 훨씬 덜 걸린다. 그 아래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작은 절이 천황사다. 천황사는 원효 대사께서 창건하고 도선 국사가 중창한 고찰이라고 한다. 임진란에 불타 없어졌던 것을 해방 직후 마을 청년들이 신행장소로 삼아 작은 법당을 짓고 나중에 스님에게 기부하여 오늘의 천황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엔 옛 고찰의 풍모를 찾아 볼 만한 구석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조악한 슬레이트 지붕에 옆에는 비닐하우스 창고, 완연한 여염농가집으로 여겨도 무방하리라 생각했는데 뒤뜰로 돌아가니 간신히 옛 규모를 말해줄 만한 크기의 수조가 보였다. 아니 그뒤로 높다란 석축도 보였다. 괜히 찾아왔다는 생각을 어느정도 지울 만큼의 감흥을 여기저기 널려 있는 주추에서 느낀 듯 싶었다.

어둑해진 사위를 짐작하며 사진기자는 지레 서둘러 내려가고 혼자 절 옆 능선 위로 올라가보니 왠걸, 여기도 발굴조사가 이미 이루어져 옛 건물터가 번듯하게 드러나 있었다. 건물터를 짐작해보니 정방형이어서 법당터가 아니라 정자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많은 와편이 채곡채곡 쌓여 있고 거대한 탑이나 석등의 기단석인 듯한 석조물들이 뒹굴고 있어 미심쩍었다. 내려와 천황사 주지스님(철훈 스님)을 불러 여쭈어 보니 그곳이 목탑이 서있던 자리라고 한다. 순천대학교 발굴팀이 최근에 밝혀놓은 것으로 이미 학계에서 몇 차례 다녀가며 확인한 사실이라고도 했다.

목탑이라면 역사 속 대표적인 것으로 꼽았던 황룡사탑으로나 짐작하고 지금 볼수 있는 것으로는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이나 불타버린 후 복원한 쌍봉사 대웅전으로 대충 이렇게 생겼겠거니 생각만 했는데 그 목탑이 여기 이 자리에 또 한 기 서있었다는 얘기다.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인근 팔방에 아홉 암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중심이 아마도 이 목탑이 있었던 곳일 거라고 했다.

목탑도 아홉 암자도 사라지고 지금의 초라한 천황사만이 남은 걸 보며 무상을 가르치는 교훈치고는 정말 가슴 시린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 중간에 윤선도가 지은 월출산 아침 안개를 시새우는 시조가 석비에 새겨 있었다. 월출산을 보려 했더니 안개에 가려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조만간 아침 햇발이 부어지면 일시에 그놈의 미운 안개가 걷히리라는 내용이었다.

월출산이 때론 안개에 묻힌 모습으로 또 때로는 활짝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며 항상 거기에 있듯, 때론 장엄한 목탑의 모습으로 또는 퇴락한 현재 천황사 같은 모습으로 가슴에 차디 차게 던져지는 부처님 가르침은 범부가 감당하기엔 항상 가슴 벅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