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을 제대로 알면 살맛이 업(UP)-둘째

이미령의 반가워요, 불교! 7

2007-03-28     관리자


전생에 지은 업 이야기
앞의 글에서 전생에 대해 좀 가볍게 지나치니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경전도 안 읽어봤나 보군요. 경전에는 전생에 이런저런 짓을 해서 지금 이처럼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숱하게 등장하고 있는데 그럼 그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나 역시도 한동안 전생 이야기를 읽으면서 ‘역시 중생은 어쩔 수 없어. 자꾸 죄짓고 사는 수밖에….’라고 간단하게 생각해버렸습니다. 하지만 같은 경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생각해보자니 과연 이런 전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처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려고 하지는 않고 내 좋은 대로만 해석해버렸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죽고 죽이는 일이 멈추지 않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항상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다른 여인을 둘째 아내로 들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 집안에 남편 한 사람과 두 명의 아내가 함께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세 사람이 한 집에서 살아가려니 첫째 아내는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저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나는 하녀 신세가 되고 말 거야.’
그리하여 둘째 아내의 임신을 방해하게 되었고 두 번째 임신까지는 용케 낙태를 시켰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임신에서는 첫째 부인의 계략으로 산모는 아이를 낳다가 아기와 함께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산모는 죽어가면서 한없는 원한을 품었고, 남편도 결국 첫째 부인의 잔인한 행실을 알아채고는 모질게 매질하여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후 두 여인은 태어날 때마다 원수지간이 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죽은 첫째 부인은 암탉으로, 둘째 부인은 고양이로 태어나더니 이번에는 암탉의 알을 고양이가 모조리 먹어 치웠습니다. 여봐란 듯이 복수를 한 것이지요. 곧이어 암탉은 표범으로 고양이는 사슴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번에는 표범이 사슴을 잡아먹었습니다. 역시 통쾌하게 복수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두 여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사윤회를 되풀이하면서 원한과 복수를 맘껏 갚았습니다.

-『법구경』, 거해 스님 편역, 고려원

이렇게 전생을 이야기하는 경을 만나면 사람들은 결론을 내립니다.
“저것 좀 봐. 여자란 어쩔 수 없어.” “중생이니 뭐 하는 수 없지.”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전생에 지은 죄 때문이니 벗어날 길이 없어.”
하지만 이렇게 볼 수는 없을까요?

원인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벌어진 상황에는 분명히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적으로 내게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이니까요. 세상의 그 어떤 일도 원인이 없이 그냥 벌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원인을 찾지 못해서 ‘기적’이나 ‘신비’ 또는 ‘신의 저주’라고 부를 뿐이지요.
원인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게 즐거운 일이 생겼을 때 그 즐거움을 가져다준 원인을 정확히 안다면 나는 계속 즐거움을 불러들일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괴로운 일이 생겼을 때 그 괴로움을 초래한 원인을 정확하게 안다면 다시는 그런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경전 이야기를 한번 다시 생각해볼까요?
부처님은 사람들의 모든 전생과 내생을 환히 아는 분인지라 저렇게 법문을 하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는 전생을 볼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아는 일은 ‘지금 내가 어떤 사람과 몹시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는 현실뿐입니다. 부처님처럼 전생을 환히 볼 수 있다면 뭐가 문제이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전생을 따지고 들자면, 애초에 첫째 부인은 왜 애를 낳지 못했던 것일까요? 그건 누구 때문일까요? 한도 끝도 없습니다.

전생을 탓하지 말고 지금 선업을 지으세요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졌냐면서 언제까지 운명만을, 혹은 남을 탓하고만 있어야겠습니까? 그 시간에 차라리 지금 내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내가 지금 업을 지으면 되는 것입니다. 선업을 지을까, 악업을 지을까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와 남이 함께 좋은 방향으로 일을 하는 것이 선업이라고 하니까, 애초에 시작은 어찌 되었든 지금 나와 상대방이 함께 좋게 끝나면 될 것입니다.
부처님이 경전에서 쉬지 않고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 당장에라도 내가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오고 있는 악순환이 끊어질 수도 있고 계속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일러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부분적으로는 맞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현생에서 내가 지은 업은 없는 것일까요? 왜 사람들은 오늘 아침에도 어제도 그저께도 업을 지어왔으면서, 그렇게 지은 업으로 오늘 저녁의 내가 있는 것인데, 그건 생각하지도 않고 전생에 지은 죄만을 자꾸 들먹이는 것일까요?
지금 내게 벌어지고 있는 악순환을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을까요? 상대방에게 그러지 말라고 요구하면 될 것이지만 그 말을 그렇게 쉽게 들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차라리 한 대 얻어맞더라도 이제 여기서 멈추어야겠다는 의지를 일으키기 전에는 악순환은 멈추지 않습니다.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그 원인을 해결할 수도 없는 일. 나는 여기서 싸움을 멈추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이치를 아는 사람만이 싸움을 멈출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