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키스

김춘식의 행복한 시 읽기

2009-04-23     관리자


황금빛 키스

                                                    정. 끝. 별.


상상의 시간을 살고
졸음의 시간을 살고
취함의 시간을 살고
기억의 시간을 살고
사랑과 불안과 의심의 시간을 살고

폐결핵을 앓던 시절 한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
왼팔이 빠진 채 언니 등에 업혀 울면서 누런 소다 찐빵을 먹었는데, 정말로
흰 왜가리를 탔다, 왜가리의 펼친 날개가 너무 커 창천(蒼天)이 깨지고 벼락을 맞기도 했건만
꿈속 남자와 방 한 칸 얻어 살림을 살았던가
아버지 도박빚에 버스차장이 되어, 미싱공이 되어, 급기야 접대부가 되어
달랑 시집 한 권 남기고 서른세 살에 요절했다 간절히
첫키스를 했던 남자와 두 딸과 부득부득 살고는 있지만

불쑥 돋아나 칭칭 감기며
조각난 채 일렁이는 불의 끝처럼

한 손은 운전대를 잡고 한 손은 밤식빵을 뜯으며 그랜드 힐튼을 오가다 문득
봉쇄수도원의 대침묵에 감춰진 희디흰 맨발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 나였던가?
이미 결혼한 적이 있고 아들이 하나 있음을 떠올리고는 소스라치듯
눈이 까만 순록이 되어 눈 덮인 툰드라를 헤맬 적 바닥이 타는 듯 시렸던
서귀포 물가에 나란히 누워 저무는 생의 끝맛을 보았건만
한 여름 네거리에서 빨간 원피스의 미아가 되어 아모레 아모레 미오를 듣던 그때나 지금이나

촌충의 몸은 도대체 몇 마디일까
아메바의 촉수는 몇 가닥일까

삶이 이게 전부일 거라 생각할 수 없다
시간은 폭포처럼 떨어지고 되솟는다
나비처럼 펄럭이며 떠다닌다
아직까지 누구도 아니었던 나는
눈을 감고 기다린다 황금빛의

시인의 시간을
도둑의 시간을
거짓말의 시간을
발기된 탑과 덩굴과 안개의 시간을

-시집 『와락』(창작과비평) 중에서

정끝별 _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문학사상」에 시,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으로 등단하여 시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평론집으로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산문집으로 『행복』 『여운』 『시가 말을 걸어요』 등이 있다. 현재 명지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  평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이 동일하고 균질한 시간이라는 믿음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데카르트나 갈릴레오처럼 근대를 합리주의 정신으로 기획한 많은 지성들이 꿈꾸었던 것은 평등하게 균질화된 공간과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놀랍도록 수학적으로 분할된 공간과 시간이 우리의 영혼을, 기억을, 평생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욕망과 상상을 하나로 통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시는 바로 우리의 내면 속에 있는, 균질화 되지 않은 수많은 시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감각적인 작품이다. 때론 상상으로, 또 때로는 기억으로, 또 때로는 환각으로 수 놓여진 많은 기억들, 어쩌면 내 것이 아니면서, 간절하게 내 것인, 그런 기억들이 이 시 속에 나오는 이미지들이다. “첫키스했던 남자와 두 딸과” 살고 있는 시인의 일상 그리고 간간히 마음을 휘젓는 유년의 기억, 또 일상을 벗어난 일탈에 대한 상상으로 뒤죽박죽이 된 나, 그런 나는 과연 누구인가. 어느 것이 진정한 나인가.
촌충의 마디가 셀 수 없듯이, 우리가 사는 시간은 그렇듯 수없이 분열된 이질적인 시간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시인은 격정적이고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삶이 이게 전부일 거라 생각할 수 없다/시간은 폭포처럼 떨어지고 되솟는다”
일상의 획일성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동시에 환희에 가득 찬 깨달음의 순간에 대한 예감이 이 표현 속에 깃들어 있는 까닭은 시인이 하나의 단선적 기억과 시간이 아닌, 욕망과 열망, 환각, 기억이 범벅이 된 시간을 감성적으로 읽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지금, 삶의 비의를 맞이하는 한 순간, 바로 그 깨달음과 구원의 시간을 예감하고 있고, 그것을 ‘황금빛 키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생의 시간이 물밀듯 밀려오며 저무는 생의 한 순간, 그 순간의 깨달음, 그 느낌의 환각이 바로 ‘황금빛 키스’인 것이다.
내가 살지 않았으나 그러나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삶, 내 안의 무수히 많은 다른 나에 대한 추억은 과연 어떤 느낌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김춘식 _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199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현재 동국대 국문과 교수, 계간 「시작」 편집위원이며, 평론집으로 『불온한 정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