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불교미술(3)

불교미술의 이해

2009-04-23     관리자

 북위시대 불교

 중구가에서 한(漢)왕조가 공식적으로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는 220년부터 진(陣)이 멸망하는 589년까지 약 4세기 동안은 가국, 음모, 투쟁, 분열로 일관하여 한(漢)민족으로서는 암흑시대라 칭할만하다. 이는 유럽에서제국 통일체의 붕괴와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조직과 지적생활에 있어서는 변화와 더불어 창조적인 발효와 부흥이 있었으며, 오래사상인 불교의 중국토착화가 이루어졌다.

 봉건적 사회경제 형태는 굳건히 유지되었지만, 민중생활은 무력해지면서 불안과 동요가 가중되어 안심입명의 방법적 모색이 불교활성화를 촉진시켰다. 이러한 변혁의 시대 - 민족적 사회적 변동이 그렇게도 많았던 4세기 후반 화북은 티베트의 장군 부견(符堅:357-385제위)에 의해 잠시 통합되었으나 그의 왕조(秦)는 강남을 정복하려는 야심이 383년 비수전에서 좌절된 후 곧 붕괴되었다. 화북의 안정된 통일은 선비족인 탁발씨(拓跋氏)가 세운 북위(北魏)에서 이루어졌다. 북위는  동위(東魏, 534-550), 서위(西魏,534-557), 북제(北齊, 550-577) 북주(北周, 557-581)로 이어지는 북조의 첫왕조였다. 북위에서 불교교단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는 중국 초기불교시대의 뿌린 씨앗이 발아되면서 북위왕조가 인도의 쿠샨왕조처럼 불교를 열렬히 외호한 연(緣)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북위 말기에 승니의 수가 2백만, 국가적 대찰이 47사(寺) 왕실이 세운 사찰이 849사, 민간인이 세운 사찰이 3만여사라는 사실(辨正論卷三)은 북위 불교교단이 얼마나 융성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예일것이다. 천강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듯 인도에서 꽃핀 불교경전의 대부분이 이 시대에 완벽에 가깝게 한역이 이루어진다. 이는 본격적인 불교연구를 가속화시켜 여러 학과(종파)를 꽃피우게 된다. 또한 불교교단의 사회적 경제적 세력이 팽창하였다. 여기에 제동이 걸린것이 북위 태무제의 폐불(北魏,太平吳君7年:446 A.D) 과 북주 무제의 폐불(北周, 建德 3년:574 A.D)이 잛은 기간이었지만, 그동안 공들여 쌓은 탑에 불을 질러놓은 격이 되었다. 국가 권력에 의한 불교의 흥기와 탄압(法亂)은 당시 종교로서 조직을 갖추기 시작한 도교와의 대립. 항쟁과 무관한 것이 아님ㅇ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강남. 남조의 불교교단도 대단히 융성했지만, 북위시대 탁발씨의 적극적인  불교수용과 승불은 중국불교의 융성기가 북위로 부터 시작 되었다고 하겠다. 남조 불교교단의 성격은 귀족사회의 고답적인 사상 논의에 의해 교학의 발달과 여산(盧山) 백련사(白蓮社)를 대표하는 법사(法社)의 형성을 특색으로 하며, 혜원(慧遠)선사가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저술하여(404 A.D) 수행자 본연의 기개세를 드높인 모습에서 남조불교의 성격의 일면을 볼 수 있다 하겠다. 북조 불교교단은 북위 태종때 사문통<沙門統 : 道人統, 僧統, 昭玄統이라 하기도 하는데 국가가 불교교단을 통제 감독할 목적으로 승니를 통찰하고 법무(法務)를 행하게 하는 승관(僧官)제도로 그 기원은 북위 태조때 법과가 '도인통'이 되면서 부터의 일이다> 인 법과(法果)의 "혀재의 황제는 현재의 여래이다" 라고 하는 주장은 북조불교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이는 초기 오호(吳胡)의 국왕이 불교의 신이(神異), 방술(方術)을 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탑(寺塔)의 건립, 불상 조성의 풍조가 황실에서부터  점차 일반민중에 까지 유행하여 재가불자를 중심으로 의읍<義邑 : 재가불자들이 邑子가 되고 스님이 邑師가 되어 義.邑을 순회하며 교화를 하는데 일반적으로 불상, 종 등을 조성, 법당건립, 간경....등의 불사를 위한 재가신자 중심의 모임인듯 하다> 이라는 신앙단체가 발달한 예도 북조불교의 성격을 암시한다 하겠다. 북조불교는 북위 이후 국가적 색채가 강화되고 주술적, 실천적, 민중적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태무제의 폐불

 북위왕조 3대 세조 태무제는 초기에는 호불(好佛)의 황제로서 불심을 다졌다. 태무제의 장안 점령(426), 북량 정복(439)등은 실질적으로 당시 북중국의 문화권인 불도징과 도안으로 대표되는 업도불교, 구마라습으로 대표되던 장안불교, 담무참으로 대표되던 량주불교를 통합하여 북위불교의  전성시대를 구가할 채비를 갖추는듯 보였으나, 당시 유학자인 재상 최호(崔浩 : 381-481 A.D>가 신천사도(新天師道)의 창시자인 도사 구겸지(寇謙之, 363-448 A>D)와 결탁하여, 태무제를 도교의 군주로 변신시키면서 불교탄압의 기치를 세워 사문을 살육하고, 불상과 경전을 불태웠다. 격심한 폐불의 참화가 7년동안 있은후 태무제는 시해되고 곧이어 452년 문성제에 의한 교단의 복구가 이루어지면서, 더욱 국가권력과 밀착한 국가 종교로서 부흥되면서 운강석굴이 개착된다(운강석굴은 다음호에).

 북위시대 불상 I

 태평진군 4년명 불상을 중심으로

 북부 중국에서 발견되는 불교미술의 가장 중요한 기념물들은 대부분 황실과 관련된 석굴사원의 불상들이다. 현존하는 초기 불교 미술의 조각품들은 대부분 석굴사원에서 떼어낸 유품들이다. 그리고 청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금등불의 경우, 폐불 등 역사의 변동속 수난을 당하여 대부분 없어졌지만, 현존하는 초기 청동불(금동불)들은 대부분 소형의 개인 원불(願佛)이었기에 오늘날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으로 조각적인 조형요소가 강조되어진 것이라기 보다 공예적인 완성미가 돋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소형 금동불이 여행자나 순례자를 통해 극동아시아에 불상양식 전파의 규범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북위 태무제 이전에 조성되어진 많은 불상들은 446년 폐불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형상을 통한 그 시대의 미의식이나 시대정신을 조감하는 미술사에서는 큰 공백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공백기에 유려하고 뛰어난 금동불을 만나니 태평진군 4년명불입상(泰平眞君四年銘佛立傷)이다 (도판 I 참조). 태평진군은 태무제가 도교에 심취했을 때의 440년부터 450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이 상을 바라보면 일찌기 한번도 경험해 보지못한 대법난을 만나기 직전, 불교교단은 앞으로 다가올 태풍과 같은 파멸을 예감하지 못하고, 안일과 자기과신에 빠져 있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북위시대 불상으로 명문을 확인할 수 있는 불상중에 태평진군시대보다 앞선 불상은 없다. 이 상은 불타의 32상 89종호의 특상관을 이해한 바탕에서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상의 먼 모델이 되고 있는 간다라와 굽타불의 양식을 중국적인 조형의식 근저에서 이해하고 극복한 불상으로, 북위시대 기념비적인 불상이라 하겠다.

 가운제가 파도문 같은 우아한 선으로 처리된 공간을 남겨놓고 네다리는 방형대좌를 이루어 그의에 복련(覆蓮)의 연화와 연꽃씨방으로 이루어진 연화좌에 두발을 약간 벌리고 선 모습에서, 지혜와 복덕을 원만구족하신 세존이 일체중생의 안락과 이익을 위해 당신의 세계를 열어 보이시는 외외(巍巍)하고 당당한 모습을 뵈옵는 듯 하다. 육계는 높고, 헤어 스타일은 인도 불상과는 달리 새로운 모습으로 보이는데 마치 털모자를 쓴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동심원의 소용돌이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부처님의 머리모양이 80종호 중 다섯개의 卍자가 있고(髮有五. 卍字 :方廣大莊嚴經卷三), 머리카락이 오른쪽으로 돌아있으며(髮右旅 : 大乘百福相經), 머리카락이 빛나고 소라처럼 돌아오르는(髮菜螺旅 :方廣大莊嚴經卷三)모습을 전통적 중국의 태극문양 비슷하게 동심원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은 갸름하면서 두 볼은 야간 살이 올라 풍만하고 목에는 삼도 표현이 없으며 코는 오똑하고, 귀는 어깨 가까이 내려와 부척이나 큰 모습이며,눈은 중국인다운 모습으로 은행 알맹이 같이 튀어나와있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는 미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후일 담요(曇曜)에에 의해 개착된 운강석굴에서도 이와 윳한 모습을 보게됨은 분명 당시 북위  탁발씨의 상류계층의 미소년을 모델로 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육체가 크게 보이지만, 신체의 균형이 매우 잘 잡힌 모습이다. 법의가 얇아 신체적 특징이 그대로 잘 드러나 있지만 인도불상에서 보이는 관능적인 모습은 아니다. 전면에는 가는 주름을 이루며 신체에 밀착하여 흘러내리는데 이는 5세기 굽타양식과도 연관을 지을 수 있겠다. 옆으로 벌린 손은 "두려워 말라! 네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하시는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짓고 있는 모습은 만인의 귀의를 받기에 충분하다. 손가락 사이에는 만망(漫網 : 물갈퀴)이 표현되어 불타의 특성을 그대로 형상화시키려 한 듯하다.

이는 2세기 후반 간다라불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육게, 법의, 수인, 자세등을 보면 분명 불상(佛像)임에 틀림이 없는데, 미간백호가 표현되지 않은 점은 불상의 형식을 갖춘 보살상 즉 미륵보살(미륵불)로 이 상을 조성하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으며, 바로 이 상이 다음 황제로 보위에 오를 동궁 황태자를 위해 조성했다는 명문이 다음 오실 미륵과 그 성격이 일치하기 미륵불이라는 심증이 확실해진다. 그리고 재료인 청동을 처리한 기술적인 완벽성은 청동기 문화의 오랜 전통을 지닌 중국다운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음을 본다.

 방형대좌 뒷면과 측면에는 명문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태평진군 4년에 고양군 려오임구촌의 원신인 동궁 황태자를 위하여 백옥보살님을 조성하는데, 아래로는 부모와 일체지식을 위해서 발원합니다. 미륵불이 하생하시어 용화삼회하시면 법언을 받들어 듣고 일시에 도를 얻게 하소서...(太平眞君四年 高陽蠡吾任丘村人, 苑申 發願 爲東宮皇太子 造百玉菩薩, 下爲父母 一切知識, 彌勒下生, 龍華三會, 聽受法言, 一時得道......)"

 이 태평진군 4년명 불상을 계승하고 있는 예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의 불입상(높이 : 140cm, 470년경, 도판 II 사진 참조)인데 한결 양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태평진군 4년명 불입상에서 보았듯이 이 시대의 불상은 초기 불상의 고졸하고 경직된 모습에서 벗어나 중국적인 도형언어가 원숙해지면서 중국 불상조각의 토착화와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주는 자신감 넘치는시대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