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송의 건강학

현대인의 정신건강

2009-04-23     관리자

불교이전의 고대인도에서는 주력(呪力)을 활용하여 어떤 효과를 보고자 하는 주술 · 주법(呪法)이 크게 발달해 있었다. 고대인도에서의 주법을 대표하는 문헌자료로서는 「아탈바 · 베다」를 들 수가 있다. 「아탈바 · 베다」가 기록하고 있는 주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병마를 제거하는 치료법, 건강유지와 연명을 위한 장수법, 위해를 가져다 주는 위험한 요소를 파괴하는 조복법(調伏法), 남녀간의 애정문제와 아이들의 탄생에 관련된 부녀법, 대인적인 조화융합을 도모하는 화합법, 번영의 실현을 도모하는 중익법, 죄과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속죄법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 종교가 발달함에 따라 주법의 영향력은 저하 되었다. 하지만 질병의 치료나 재산모으기 등의 여러 가지 현세적인 소망을 이루어지게 하여 준다고 믿어지는 진언(만트라)은 계속하여 주술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불교성립 초기에는 이와같은 진언의 사용은 일단 금지되었다. 불교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실현 즉 열반의 달성에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와같은 합리적 측면과는 별도로 불교내부의 일반적 수준에서는 현실상의 문제로서 주법이 계속하여 활용되었다.
부처님 입멸후의 부파불교시대에 이르러서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에서는 열반의 의미와 열반에 이르는 수행계제를 상세하게 규정했다. 즉 「초전법륜경」에 기록된 부처님의 수행의 모습을 모델로 하여 계 · 정 · 혜(戒 · 定 · 蕙)의 삼학을 수행하는 것을 통해 고의 근본원인인 모든 번뇌가 단멸된 마음의 상태가 열반이고 해탈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사상에 대하여 후세에 일어난 대승불교는 일체법은 개공(皆空)이라고 주장하면서 법의 실유사상(實有思想)을 비판하고 사제(四諸)의 학습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 한편으로 「본생담」에 기록된 부처님의 자비행의 모습(보살)을 모델로 하여 육바라밀의 수행을 강조하면서 설일체유부의 열반관을 공격했다. 자비행 없이 열반 없고 열반 없이 자비행 없다는 것이 기원전 1세기에 일어난 대승불교운동의 보살사상이었다.

대승불교운동에서는 수행자를 보살이라고 부르면서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자비심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교설했다. 이와같은 보살의 자비심을 상징하는 존재가 「법화경」등에 등장하는 관음 즉 관세음보살이다. 이 보살은 자비심을 가지고 다양하게 변신하면서 일체중생을 구제한 활동을 전개한다.

보살의 실천도로서의 육바라밀은 그 여섯 번째에 위치하는 ‘반야바라밀’ 즉 완전한 최고의 지혜를 기본으로 하는 사상에 바탕을 두고 일련의 「반야경」을 성립시켰다. 반야경전군에서는 보살의 수행은 교설하는 바 특히 삼매상태를 지향하거나 그 상태에 들어가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든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체득하여 완전한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점이 어떤 관념을 대상으로 하여 되풀이 되풀이 교설된다. 그리고 경전을 숭배할 것을 권장하는 것이 반야경전의 특색이다. 그러나 설제로는 방대한 분량의 반야경전을 허구한날 다 읽고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간편하게 염송할 수 있으면서도 전체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문의 진언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필요성에 맞춰서 「팔천송(八千頌)반야바라밀다경」은 「반야바라밀다심경」으로 요약되고 다시 「반야바라밀다다라니」를 거쳐서 ‘반야바라밀 · 진언’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종자 · 진언’으로 요약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법회에서나 일상적으로 염송하고 있는 ‘마하반야바라밀’의 철학 모두를 완전하게 배우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 것이다. ‘반야’란 대상을 분석적으로 판단하는 인식작용인 식(njnana)을 초월하여 순식간에 존재 전체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직관적으로, 바르게 파악하는 지혜이다. 이 반야에 의해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불모(佛母)라고도 불린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염송되고 있는 단문 진언 가운데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해야 하겠는데 이 가운데서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은 각각 아미타신앙과 관세음신앙과 연관을 가지고 제재득복성(除災得福性)의 칭명 진언이고 ‘마하반야바라밀’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반야사상과 연관을 가지고 있는 진언이다.  

그래서 참된 지혜인 반야의 획득은 동시에 일체중생의 구제를 발심하는 사심없는 자비심으로 전환된다고 하니만큼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는 행위와 ‘바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행위가 가져다 주는 자기 암시효과 사이에는 차이가 크게 있으리라는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제재득복성, 즉 이기성의 진언(암시문)을 염송하는 행위와 깨달음 추구 · 중생구제의 발심 즉 이기성 · 이타성의 진언(암시문)을 염송하는 행위가 가져다 주는 생리 · 심리적 효과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현대의 정신생물학에 의해서도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높은 종교심의 경지를 생리학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설명한다는 것은 좀 뭣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생리학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도 사실이고 종교적 수행의 계제는 생리 · 심리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이 자비심을 느낄때면 뇌파는 알파파의 상태가 되면서 의식과 잠재의식이 통합되며 이 때에는 감사와 감동과 편안함과 사랑의 홀몬인 엔돌핀과 즐거움의 홀몬인 도파민이 분비된다. 엔돌핀은 사람의 활동의욕과도 관계가 있고 질병에 대한 저항력, 통증의 완화와도 관계가 있다. 이와 아울러 정서불안이 해소되어 집중력도 증대된다. 집중력이 증대되면서 매사에 능률이 오른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생활을 규칙화, 일상화하게 되면 일종의 조건반사가 형성되어 어려운 생활국면을 맞이했을 때에 속으로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면 바로 침착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되고 긴장이 완화되어 편안함을 회복할 수가 있게 된다. 평소에 조건반사만 잘 형성되어 있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현법열반반야공(現法涅槃般若空)의 경지에 들어서면서 마음이 태양처럼 밝아지는 반야대락(般若大樂)의 일대 환희심이 솟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좋은 조건반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염송을 하는 데에 있어 약간의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가급적이면 어렸을 때부터 불심 · 반야심을 길러야 하고 좋은 스승과 좋은 도반을 만나 평소에 낭랑한 목소리로 염송을 함께 하는 습관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염송을 하는 장소와 시각도 무시못할 몫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깊숙한 산사에서 일출 · 일몰 때에 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야 최상이겠으나 우리같은 도시민으로서는 이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다.  그러나 이왕에 그런 것이라면 대안은 있다. 자기가 규칙적으로 다니는 시중의 법회장소(절)를 평소에 깊숙한 산사라고 심상으로 그리는 습관을 들여둔다면그 사원공간에 들어설 때마다 뇌파는 바로 알파파로 바뀌고 반야대락을 맛 볼 수 있는 입지가 마련될것이다.

나는 20여년간 피워오던 담배를 5,6년전에 끊었는데 담배없는 허전함을 수시로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면서 메운 일이 있다. 한 2개월간 그렇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