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氣)가 생동하는 불교음악의 큰 잔치

창작국악교성곡「보현행원송」발표 공연을 보고

2009-04-23     관리자

 자연의 이치는 어김없이 우리에게 찾아와 화창한 봄날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만들어주고 있지만,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치세력의 한심스러운 작태가 나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어주는 요즈음이다. 목련꽃과 개나리 그리고 진달래 꽃의 고운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기도 전에, 대권경쟁의 드라마가 우리들의 시선을 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4대 총선 때 있었던 군부재자투표의 부정시비 의혹과 안기부 개입의 흑색선전 문제를 깨끗이 마무리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총선 결과를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함으로써, 겸허한 자세를 보이는가 싶더니, 대권의 고지를 향해서 핏발선 눈으로 뛰고 있는 정치현실이 나를 더욱 우울증의 늪에 빠지도록 만든다.

  이런 정치적 부도덕성의 실망으로부터 울적한 심정을 잠시 해방시켜 준 반가운 음악행사가 4월 2일에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청암(靑岩) 박범훈 교수 작곡 및 지휘로 발표된 그의 세번째 불교음악 '보현행원송'의 연주회였다. 불광사와 불광법회의 협찬으로 중앙국악관현악단. 중앙디딤무용단. 극단미추. 불광합창단이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펄친 현대판 불교음악의 큰 잔치마당은 나의 답답했던 가슴 속에 근래 흔하지 않은 진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역사적이라는 말은 음악 작곡의 '보현행원송'이라는 창작국악교성곡이 지닌 의미를 필자는 다음과 같이 두 각도에서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보현행원송'에 대한 음악사적 측면에서의 조명이고, 둘째는 새 창작품의 예술성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하는 것이다.

  4세기부터 불교가 한반도에 수용되어 민족종교로서 오랜 동안 뿌리를 뻗어내린 이후, 많은 유형 및 무형문화재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이 땅의 수많은 미술품들과 건축물들이 불교를 수용한 결과의 유형문화재라면, 범패(梵唄)나 화청(和請)같은 불교 음악은 불교문화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재 중 하나로 꼽힐 수 있다. 불교의 이런 전통 음악은 그러나 오늘날 겨우 명맥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실정인데, 그 이유를 골똘히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근대화과정에서 잘못 전개된 음악의 역사에서 그 뿌리를 찾아 볼 수 있다.'  우리의 앞 세대들은 그릇된 개화기의 결과로 인하여 망국의 서러움을 안고 일제식민지의 지배 밑에서 나라를 잃은 채 민족적 수난을 겪었고, 이 때문에 전통문화의 단절에서 오는 가치관의 혼란 및 주체성의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일제시대의 왜곡된 문화정책 때문에 외래문화를 자주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자아의식을 잃어버림으로써, 가치관의 혼란은 심화되었고 주체성의 상실은 가속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서 남의 장단에 춤추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고, 서양음악의 수용문제도 그런 시대적 대세속에서 예외적일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 전통음악의 가치와 전통성을 제대로 평가할 수도 없었음은 물론이었고, 기독교문화의 그늘속에서 불교음악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데 그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국근현대음악사의 불행한 현실 아래서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문제는 이 시대 한반도의 음악지성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민족음악사적 과제의 하나였다. 이런 역사의식에 투철한 젊은 작곡가들이 요즈음 새 불교음악의 창작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음은 반가운 현상이라고 하겠다.

  불교음악에 관심을 둔 젊은 작곡가들 중에서 요즈음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청암 박범훈 교수의 창작활동을 잠시 개관하면 대략 이러하다.

  박교수가 최초롤 불교음악 작곡에 인연을 맺은  때가 1973년인데, 그 당시에 작곡된 창작품은 송범 안무의 '사의 승무'라는 무용극의 반주음악이었다. 그후 1988년 서울올림픽의 문화예술축전 작품으로 박 교수는 이차돈의 일대기를 무용극(국수호안무)으로 꾸민 '하얀초상'의 반주음악을 작곡하면서 불광사와 인연을 맺었다.

  '하얀 초상'의 합창곡과 독창곡을 다시 손질하고 새로 첨가하여 박 교수가 순수한 불교 음악작품으로 발표한 것이 바로 '아제 아제'라는 창작품이다. '아제 아제'와 '예불'(1988년 작편곡)을 담은 음반은 한국불교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90년 종교음악제에서 '아제 아제'를 발표하게 되엇으며, 91년 종교음악제에서는 석성일 스님 작시의 '붓다'라는 새 창작곡이 초연되기에 이르렀다.

  불교음악과의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박 교수는 '보현행원송'을 작곡하여 발표하게 되었다. 특히 이번 창작국악교성곡이 우리의 민족 음악사적 관점에서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고 필자는 보고 있으며, 앞서 필자가 이번 불교음악발표회를 역사적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도 바로 이런 뜻에서였다.

  작가의 생각이 자기 창작품에서 반드시 나타나게 되듯이, 작곡자의 마음이 음악작품에 뚜렷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들의 예술작품에 투영되는 작가나 작곡가의 생각이 다름아닌 동양철학에서 말하는기(氣)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작곡가의 기는 그의 창작품을 생동감 넘치게 만드는 근원이므로, 어느 작곡가이든 간에 그들의 음악작품에 기를 불어넣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기가 부족한 창작품은 가뭄에 시든 풀이나 나뭇잎사귀에 비유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하다. 예술적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끼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임신년의 새해 벽두에 필자는 지리산의 정기가 감도는 남원땅 불락사(佛樂寺)에서 청암 박범훈 교수가 사바세계를 멀리하고 상훈스님의 보살핌으로 '보현행원송'이라는 창작국악교성곡에 자기의 기를 불어넣는 현장을 목격한 증인 중의 한 사람이다. 박범훈 교수의 이번 불교음악연주회가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이유도 알고보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비록 박교수의 기를 많이 불어넣은 '보현행원송'이라고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뒷받침을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연극계의 혜성처럼 나타나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는 극단 미추의 대표 손진책 씨의 연출솜씨는 무대예술의 공연분위를 한층 고조시키기에 충분했으며, 중앙디딤무용단의 예술감독 국수호씨의 안무는 악가무(樂歌舞)라는 공연예술에서 춤의 중요성을 깨우치기에 충분한 솜씨였다.

  더욱이 중앙국악관현악단과 불광합창단을 신들린 듯이 휘몰아가는 박 교수의 뛰어난 지휘솜씨와 더불어 연주된 합창단의 노래와 관현반주음악이 한층 돋보인 공연이었다. '보현행원송'에 쏟아부은 박 교수의 기를 생동감있게 재현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한 여러분들의 지극한 정성이 이번 불교음악의 큰 잔치마당을 성공적으로 이끌지 않았나 한다.

  어떻게 하면 '보현행원송'과 같이 불교음악을 빛내는 제2, 제3의 새 걸작품들이 박 교수 또는 다른 작곡가들에게 의해서 계속 발표됨으로써, 민족음악사의 발전이 가속화될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대구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이제 그런 문제에 대한 필자의 단편적인 견해를 여기서 피력하면서, 연주회의 참관기를 마무리 지을까 한다.

  한국근현대음악사의 견지에서 살펴볼 때,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과 서양음악의 자주적 수용이라는 문제가 일차적으로는 이 땅의 음악지성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라고 하겠지만, 이차적으로는 한겨레 모두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작곡가와 연주가를 포함한 음악가라는 물고기가 한반도라는 어항에 담긴 한겨레라는 물, 그리고 산소를 공급해 주는 이 사회의 예술후원자(佛敎徒 등)를 떠나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리가 그러하다면,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풀려고 노력하는 청암 박범훈 교수와 중앙국악환현악단의 창작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할 후원자가 누구여야 하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물어보자면 "한반도의 불교음악을 중흥시켜야 할 과제가 과연 음악가 자신들만의 책임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조용히 우리 모두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한국불교계의 적극적인 후원이야말로 불타의 이(理).  정(定). 행(行)의 덕 및 정각(正覺)의 지혜를 이룬다는 '보현행원으로 보리이루리'라는 게송(偈頌)을 달성하는 첩경이 아닐까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현대불교음악의 중흥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1)  1992년 4월 2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발표한 「보현행원송 프로그램」의 '보현행원송을 작곡하면서'라는 청암 박범훈 교수의 글에 의하면, 이차돈의 일대기를 무용극으로 꾸민 '하얀초상'은 1988년 서울올림픽 대 문화예술축전의 작품으로 공연되었는데, 그때 불광사 마하보디 합창단 60명이 출연하여 중앙국악관현악단과 함께 공연한 불교음악의 새 창작품이라고 함.

  2) 불광사 마하보디합창단 및 상훈스님, 김성녀, 정태춘의 노래와 중앙국악관현악단의 반주에 의한 '아제 아제'및 불광사 마하보디합창단과 동국대학교 합창단 그리고 중앙국악관현악단의 반주에 의한 '예불'을 담은 음반은 중앙국악환현악단연주곡집(4) : 박법훈의 불교음악(서울 :오아시스레코드사, 1990)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