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서양철학이 간직되어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

풍경소리

2009-04-21     관리자

우리는 플라톤, 칸트, 니체 등 서양의 철학사상을 교양으로 많이 공부하지만 우파니샤드. 불교, 라마야나 등은 교양을 위한 필수과목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네루는 그이 저서[인도의 발견]에서 자기가 서구에서 인도에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불교사상의 깊이에 매우 놀랐다고 말하고 있다. 이 놀라움이 서양의 지식을 거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적인 사실이다. 네루는 이 책에서 부처님의 말씅을 인용하여 언급하고 있다.

“만일 절대자란 이미 아는 모든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라면 그 존재는 우리가 아는 추리로써는 결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이든간에 다른 것과 관련 없이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지식으로써 가능하지 않은 곳에 대해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연기[緣起]로 설명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칸트의[이성비판]에서 전개한 철학의 근본적 사고즉 초경험적인 이성의 사용을 경계하는 비판의 철학인 것이다. 네루의 저서를 통해 부처님을 말씀하신다.
“우리의 육체.우리의 영혼은 순간마다 변한다. 어떤 의미에서 볼때 우리는 끊임없이 죽고 또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쉬지 않고 변화하는 동일성의 연속이다. 모든 것은 유동적이고 연속적이고 변화하는 것이다.”

이 부처님의 말씀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동의 법칙이나 헤겔의 변증법, 그리고 베르그송의 생명의 약동의 원리 등 서양철학의 근본문제가 잘 나타나 있다. 또한 부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는 실체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서술하는 데는 매우 불충분한 것이다.
진리는 ‘아니’나 ‘아니다’의 중간의 어느 지점 또는 그것을 초월한 어느 지점에 있는 것이다. 이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는 현대의 구조주의나 분석철학의 여러 가지 명제 그리고 다가치논리학(多價値論理學)이나 현대 프랑스의 신철학자의 사고법의 기반이 다 나타나 있다. 부처님은 이미 2.500년 전에 서양철학의 거의 모든 것을 종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루는 불교에 대해서 이전에 아무 것도 모르고 이처럼 심오한 부처님의 말씀을 칸트니 헤겔 또는 분석철학을 거처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네루는 [인도의 발견]에서 불교와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카스트란 일찍이 인도를 정복한 아리안 민족이 자기들을 피정복인들로부터 구별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가혹한 계급제도이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인도에 존속하는 이유는 설명하기 매우 어렵다.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제일 먼저 카스트를 폐기하고자 한 노력은 불교에서 일어났다. 불교는 여기에 성공하지 못하고 그 후 수백 년에 걸친 무갈제국의 회교 지배에도 불구하고 카스트제도는 계속 존속해왔다.

부처님의 어린시절의 고뇌는 이 카스트 제도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어렸을 때 성밖에 나간 일이 있다. 동문을 나가자 노인을 보고 인생의 변화무상함을 느끼고, 남문을 나갔을 때 병자를 보고 인생의 몰락을 생각하고. 성문을 세계를 생각하고, 북문에서 고행승을 보고 출가하게 되었다. 오늘날 캘커타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듯 부처님의 시대에도 길거리에 나가면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정경을 보았을 것이다.
부처님은 카스트에 바탕을 둔 인도인의 사고팔고(四苦八苦)를 뼈아프게 느끼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하는 구원의 길을 모색한 것 같다. 네루는 카스트 제도가 없는 밝은 미래를 드러내기 위해 고대의 인도로 되돌아갔다. 하나 그 근원을 살피면 살필수록 근본적인 인도문명의 철학적 이념을 발견하는 데는 매우 어려움이 많았다.

그 어려움은 인도의 넓이나 다양성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깊이이다. 인도에 오래부터 존재해온 열반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은 ‘덮여 있지 않은 있는 그대로’를 뜻한다. 즉 모든 욕망, 의지, 고뇌, 쾌락과 같은 인간의 정신적 감정이 제거된 상태, 편안과 정적이 지배하는 경지를 말한다.
이 경지를 얻기 위한 수련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인생이란 하나의 문제집이고 살아가며 우리는 그 문제를 푸는 것이다. 못 푼 것은 다시 태어나 풀어야 한다. 여기에 마음의 세계가 가장 소중하다. 마음이라 밭과 같은 것이다. 메마른 땅을 갈고 돌을 제거하고 잡초를 뽑고 비료를 주고, 물을 주고 씨를 뿌리고 흙을 덮어주고 벌레를 없애주고 열매가 열기를 기다린다. 마음의 작용은 업으로 나타난다.

인류의 역사란 인간의 업이 시간의 흐름속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록하는 일을 말한다. 헤로도토스는 역사는 영원한 기억이 되도록 하기위해 기록하는 일이다. 말하고 있다. 그러면 기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윤회전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독교가 5세기 윤회전생을 발견하고 6세기 이후에 성경이 새로 쓰여짐으로써 오늘날 에드가 케이시나 그밖의 뛰어난 기독교인이 진리를 앞에 놓고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어온 사실은 가슴아픈 일이다.

플라톤은 [메논]에서 소크라테스의 말을 매우 흥미 있게 전개하고 있다. ‘알겠니, 메논아. 이것은 내가 신관이나 무당 핀다로스 같은 뛰어난 시인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죽지않고 수없이 다시 태어나는 법이다. 그러기 때문에 영혼은 현세의 일도 내세의 일도다 빼놓지 않고 보아온 거야. 영혼은 모든 것을 다 배웠지. 하지만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영혼은 다만 상기만하면 되는거야. 상기하는 일[아나브레이스]이바로 배우는 일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태어나서 전혀 경험하지 않는 것까지도 스스로 발견할 수가 있는 법이지 탐구하고 하는것이 바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마음속에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간직할 수 있는가가 한 인간의 인생의 실력 그 자체인 것이다. 역사란 희랍어로 탐구를 뜻하며 그러한 역사는 그대로 인류의 모든 일의 상기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자기가 전생에 이루지 못한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상기하는 것을 가르쳐줌으로써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하는 행복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서양사상의 모든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모르고 있는지 생각만해도 놀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