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촬요 연의] 오조 홍인대사 술 최상승론 (2)

[선전촬요 연의] 五祖 弘忍大師述 最上乘論 (2)

2009-04-21     석주 스님

우리의 성품은 본래로 청정하며 본래로 불생불멸하니 이 자성이 우리가 의지하고 닦아갈 본 스승이다. 그러므로 입으로 불을 부르느니 보다 자기 진심을 지키는 것이 낫다. 바른 생각을 지키면 그 자리가 바로 불성인 것이다.

7. 본래청정本來淸淨

문) 自心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답) 十地經에 일으기를 “중생의 몸 가운데에 금강 불성이 있으니 이것은 마치 해와도 같다. 해는 그 광명이 일체를 두루 비춘다. 광대무변한 그 밝음은 헤아릴 수 없다. 중생의 마음인 금강 불성도 이와 같이 광대무변하여 일체를 두루 비춘다. 그러나 해도 구름에 가리우면 구름 밑에서는 밝음을 잃은 것과 같이 자성의 불성 광명도 중생의 오온 먹구름에 덮이게 되면 마치 토굴안에 켜놓은 등불처럼 능히 밖을 비추지 못하게 된다.”하였다.

여기에 다시 비유를 들어 보겠다. 태양이 아무리 밝고 그 빛이 찬란하게 빛나더라도 이 지구에서는 구름이 일고 안개가 자욱히 낄 때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도록 캄캄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어찌 태양이 밝게 빛난다 할 것인가? 이 지상에서는 캄캄하다고 할 밖에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캄캄하다 할까? 원래로 태양은 여전히 빛나건만 다만 운무에 가렸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의 청정한 마음도 또한 이와 같다. 태양과 같이 영원히 변함없이 빛나고 있건만 다만 망년된 생각에 끄달려 번뇌와 그릇된 견해가 마치 먹구름과도 같이 마음에 덮였기 때문에 중생심 중에 청정 광명심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못 마음을 바로 잡고 마음을 지켜서 망령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열반대도가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自心이 본래로 청정한 것을 알 수 있다.

8. 불생불멸不生不滅

문) 自心이 본래로 불생불멸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답) 유마경에 이르기를, “如에는 生이 없으며 다시 滅도 없다.”하였다. 여기에 如라 한 것은 眞如佛性을 말한 것이며 우리의 청정자성을 말한 것이다. 청정자성 이것이 마음의 근원이다. 이 청정자성인 眞如는 누가 만든 것이 아니며 인연 따라 생긴 것도 아니다. 본래로 있는 것이다. 영원히 변할 수 없다.
경에 또 일으기를 “일체 중생이 모두가 如다. 모든 성현도 또한 如다.” 하였다. 일체중생이라 한 것은 즉 우리들을 가리킨 것이며 모든 성현이라 하는 것은 모든 부처님을 가리킨 말이다. 중생과 부처님은 그 이름이 다르다. 물론 그가 나타내는 모양과 형색은 엄청나게 다르다. 그러나 이름이나 모양다리는 달라도 眞如法性은 모두가 같다. 모두가 일찍이 난 바 없으며 또한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如라 한 것이다. 이것으로 自心이 본래 불생 불멸인 것을 알 수 있다.

9. 자심본사自心本師

문) 어찌하여 自心을 本師라고 하는가?

답) 사람에게 갖추어 있는 眞心은 스스로 본래부터 있는 것이지 결코 밖에서 오는 것이거나 修行한 데서 비로소 생기는 것도 아니다. “존래부터 갖추어 있어 영원히 변치 않는” 이 眞心은 지내온 기나긴 과거를 통해서나 또한 현재에 있어서나 다가올 영원한 미래에 있어서 우리에게 지극히 간절하고 긴요한 것은 이 자기 마음을 스스로 지키느니보다 지내는 것은 없는 것이다. “ 이 마음이 참 자기다. 모두는 시간과 환경을 따라서 젼하고 흩어지고 마침내는 아무것도 남기는 것이 없지만 이 眞心은 영원히 변치 않고 나와 함께 있는 ‘참 나’인 것이다.” 만약 이 마음을 알아 이 마음을 잘 지키면 곧 생사가 없는 열반 언덕에 이르거니와 마음이 迷하면 이 마음을 잊게 되니 곧 고통과 부자유에 얽히고 마음의 밝음을 잊어 이른바 지옥, 아귀, 축생의 三악도에 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眞心이 바로 생사가 없는 열반의 핵심이며 무량공덕이 끝없이 넘쳐나는 보배 창고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아 眞心대로 지니면 무량한 지혜 공덕을 자기의 것으로 잡아 쓸 것이니 그는 바로 열반에 이르는 것이며, 이를 모르면 스스로 등불과 공덕장을 등진 것이므로 고통과 장애와 우치가 그에 몸에 감기게 된다. 그래서 그는 三惡途라는 고통 바다를 제것으로 차지하게 된다.” 이 까닭에 三世 모든 부처님이 自心으로 本師을 삼아 마침내 성불한 것을 알게 된다. 그런고로 論에 일으기를 “훤출하여 밝게 마음을 지키면 곧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되니 이것이 無生이다.”하였다. 이로써 眞心이 바로 本師임을 아는 것이다.

10. 자심自心과 염불念佛

문) 眞心을 지키는 것이 어찌하여 다른 부처님을 생각하느니보다 수승하다고 하는가?

답) 대개 항상 다른 부처님을 생각한다고 생사를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의 본심을 지키면 곧 열반, 언덕에 이르게 되니 “이것은 자기의 本心이 바로 생사와 명념이 끊긴 眞心이며 眞心이 열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만약 色으로써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如來는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형상으로 찾을 수는 없다. 三十二相, 八十종호의 부처님의 몸매가 부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거침없는 말씀,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고 멀고 가까움이 없는 청아하고 부드러운 말씀은 참으로 아름답고 실증을 모르게 하는 거룩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나 목소리가 또한 부처님은 아니다. 부처님을 나무로 비유한다면 형상이나 목소리는 잎이며 꽃이냐. 잎과 꽃은 피고 다시 진다.

이와 같이 잎이나 꽃과 같은 부처님 몸이나 목소리는 마침내 시간과 계절에 따라 스러지고 헐어진다. 이것을 道로 알고 찾는다면 실로 허망하다. 허망한 것을 도로 알고 구하는 것이 삿된 道다. 그러니 부처님은 보지 못한다. 참된 道는 못보는 것이다. 참된 道를 구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가지나 잎을 찾아 헤매지 말고 뿌리를 잡아야 한다. 도의 뿌리 - 도의 근본이 우리의 참마음이다. 그러므로 근본되는 참마음을 지키는 것이 다른 부처님을 생각하느니 보다 낫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眞心을 지키는 것이 다른 부처님을 생각하느니 보다 낫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대체로 사람에게 알아 듣게 권하는 입장에서 하는 말일뿐 실지 구경에 들어간 道의 근본에는 실로 평등하여 둘이 따로가 아니다. ”우리는 진심이 부처님이며 道라는 사실을 깊이 명념하여야 겠다. 부처님을 찾아야 한다. 도를 구하여야 한다. 진심밖에 道가 있고 부처님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도다. 구름을 타고 나타나는 부처님을 찾거나 기이한 위신력을 부어주는 부처님을 마음에 그리고 그런 것을 쫒는다면 그것은 알맹이를 놓친 수행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위신력과 부처님의 무량공덕에 이르는 문은 眞心이다. 진심을 찾을 때 일체가 거기 있다. 眞心이 아닌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

11. 불佛과 중생衆生의 차별

문) 중생과 佛이 그 참 몸이 아니 같을진데 어찌하여 제불은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아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으며 걸림없이 자유 자재하며 우리들 중생은 생사중에 빠져서 가지가지 고통을 받는 것일까?

답) 十方 제불은 제법의 참성품을 깨달아 어느 때나 자연히 마음의 근원을 밝게 비추므로 망상이 나지 않는다. “망상은 마음의 근원을 망각하고 경계를 따라 todr가이 허둥대는 데서 생기는 것이니 마음이 어루대지 않고 마음이 근원을 사무쳐 근본 마음이 활연히 들어나면 망상이란 아예 이름조차 없는 것이다.” 이 근본 마음이 명철하게 드러난 것이 正念이다. 正念이 들어난 곳에는 능히 생각하되 생각하는 생각도 터럭끝 만큼의 남보다 낫다는 것도 없게 된다. “대개 생사라는 것은 마음이 제자리를 잃었을 때 생각하는 주체가 생각하는 생각을 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최초 一念의 착각이다. 여기서 我 와 所가 벌어진다.

번뇌의 출발은 바로 이 我所心이다. 이 번뇌가 生死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正念을 아룰 때 我所心은 없어지고 따라서 번뇌가 설 곳이 없다. 번뇌가 없는 곳에 生死가 있을리 만무하다. 이와같이 我所心이 없으므로 生死를 받지 아니하며 生死를 받지 않으므로 필경 출몰, 거래, 동요를 멀리 여인 적멸에 이른다. “이 寂滅地는 출몰, 거래, 동요 등 分段형상이 없는 것을 말할뿐 결코 正念의 活性이 죽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체 분단적 걸림에서 벗어나 本性 本然의 大活이 전개된다. 이곳이 적멸락이며, 大安이며, 大樂이며, 大活이며, 大解說이며, 大自在다.” 여기서 만 가지 즐거움이 스스로 갖추었음을 알게 된다.

일체 중생은 자기 참성품을 잊어 (迷) 마음의 근본을 알지 못하므로 가지가지 망령된 인연에 끄달려 正念을 닦지 못한다. 만나는 인연 중에 혹 마음에 맞으면 애착심을 내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싫어하고 멀리하는 생각을 내나니 이 증애심이 있으므로 번뇌는 치성하게 되고 번뇌가 치성한 즉 自心의 청정 적멸과는 더욱 멀어져 마음은 온전히 혼란을 일으킨다. 좋고 나쁜 것이 벌어지고 나쁜 것은 멀리하고 좋은 것은 취하기 바쁘다. 이 마음의 혼란과 갈등을 마음 그릇이 깨어져 샌다고 한다. “마음의 그릇이란 무엇일까? 마음은 온전하다. 무한대다. 긑이 없다. 안도 없고 밖도 없다.

따라서 저(疲)도 없고 나(我)도 없다. 得도 없고 失도 없다. 이것이 온전한 참나(進我)의 경지다. 이러한 주체적이며 全一的인 경지를 마음이라 하고 이러한 광대무변하되 경계와 名相과 生滅을 超絶한 경지를 마음 그릇으로 표한한다. 그는 有도 아니며, 無도 아니다. 本然地다. 그릇이로되 보통 그릇이 아니다. 깨어졌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본래도 대대가 끊인 全一的이며 주체적인 자기를 잊고 마음 밖에 따로 취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대의 경계를 인정하고 있다. 이것이 迷다. 이것은 마음의 온전한 주체성의 상실이다. 全性的인 本分地의 몰각이다. 번뇌는 여기서 시작한다. 여기에서 彼我가 있고 生入이 있고 생몰이 있다.

우열이 있고 미움도 사랑도 얻음도 잃음도 있게된다. 바로 이것이 마음의 그릇이 깨어져 새는 것이다. 마음 그릇이 깨어져 샘으로 마음은 경계를 따라 흐르고 집착하게 된다. 妄경계를 애착하고 원만자성을 상실한 데서 중생의 분단생사는 벌어진다. 이 생사가 생기는 데서 온갖 고통은 저절로 따라 나오게 된다.” 心王經에 일으기를 “眞如佛性이 중생의 치우친 알음아리가 들끓는 六識바다에 빠짐으로 생사에 빠져들어 해탈을 얻지 못한다.” 하였다. 본래로 경계를 두지 않는 本分地에서 참 자기를 착각하여 경계를 보는 것이다.

보는 자아와 보이는 경계, 그리고 보아진 알음아리 - 이것은 끝없이 벌어져 마음 속은 잡다와 혼란의 도가니가 된다. 이것이 중생의 心識이다. 색성향미촉법의 경계를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기관이 대하고는 거기서 알음아리와 분별을 내는 것이다. 우아한 모양, 부드러운 목소리, 환상적인 향기, 아름다운 맛, 따스한 촉감, 이들을 분별 인식한 데서 얻은 의식들이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六識이다. 이놈이 도적이며 이것이 臟物이다. 心王의 보배를 파괴하여 쪼각을 내어 훔쳐낸다. 그래서 육적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 자기를 잊고 妄我를 세운다. 그리고는 자기에 맞고 안맞고 옳고 그르고를 세우고 고집한다. 이것이 망견이며 악지견이다. 중생은 망견에 사로잡혀 번뇌의 둥치는 견고해지고 따라서 생사의 바다에 더욱 깊이와 넓이를 더해 간다. 그러니 어찌 해탈이 쉬우랴?

그러므로 마땅히 노력하여 근본된 참마음을 지키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참마음을 지키면 망념이 나지 않으며 我所心이 나지 않을 것이니 자연히 佛과 더불어 평등하여 둘이 아닌 자기를 알게 된다.

12. 열반涅槃의 근본根本

문) 근본된 참마음을 지키는 것을 어떻게 해서 열반의 근본이라 하는가.

답) 열반이라는 것은 그 體가 寂滅하여 “일체 출입, 생멸, 거래가 없으며 하나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다. 능히 치성하게 만행을 벌리되 실로 함이 없으니 이곳이” 大安이며 大樂이다.
열반은 얻는 것이 아니다.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잃는 것도 아니다. 변하는 것도 아니다. 본래로 있는 것이다.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처소, 지역, 공간에 상관이 없다.“
나의 본심이 이것이 본래의 참마음이니 이곳에는 망상이란 없다. 닦아서 끊어진 것이 아니다. 끊길, 망상이 본래로 없다. 망상이 없으므로 이곳은 참마음 본연의 正念이 그대로 온전하다. 정념을 온전히 갖추었으므로 寂照智가 드러난다.

“적조지가 무엇일까. 적이라 함은 일체 망념이 끊어짐이요, 조라 함은 망념이 끊어진데서 발하는 지혜의 빛이다. 적지는 일체에 두루하고 古今을 관통한다. 十方三世가 온전히 적지뿐이다. 그를 막을 존재가 없다. 그가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우주의 모든 현상의 근본을 이룬 진실 불변의 본성을 여지없이 궁구하고 체달한다. 법성을 궁달하여 법성이 자기며, 자기가 법성이며, 자기와 법성이 참마음이며 법성과 참마음이 오직 자기여서 낱낱이 대대가 끊겨 일체 걸림에서 훤출하고 일체에 古今에 사무쳐 大寂大樂 大自在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열반을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되는 참마음을 지키는 것이 열반의 근본이 됨을 알 것이다.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