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승리를 위한 서장] 불교인의 산아조절론(3)

2009-04-21     광덕 스님

이 元相 - 實相은 시공분별 이전의 눈 - 분별없는 지혜(般若)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보아진다. 이것이 바라밀이며, 진리와 자재와 제불이 탄생하는 곳이다 (이 점을 증거하는 데는 반야심경의 序句를 음미해 보아도 알 수 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하였다)
그러므로 조금만 물질에 치우친 견해를 쉬고 깊이를 살핀다면 거기에는 물질 아닌 또 하나의 경계인 靈의 실재 여부에 대하여도 別稿 “인간은 죽으면 그만인가.”에서 설명하고 다만 여기서는 육체아의 본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靈我라고만 거듭 말하여 둔다.

V. 受 生

11. 靈我가 수생하는 과정
靈의 세계가 靈界다. 영계에는 무수한 차별을 가진 영들이 생존한다. 이들 영 중 일부가 地上修業아니 業感力으로 인간계에 受生한다.
受生이란 다름아닌 人間服을 입는 것이다. 인간복은 부모가 지어준다. 부모가 어떻게 지어주는가? 부모가 제공하는 細胞 즉 精子와 卵子의 결합에 再結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세포의 결합이 있다하더라도 여기에 영의 결합없이는 임신이 될 수 없다.
어찌하여 하필이면 부모에게 분열된 세포에 결합하는가?
대개 靈我는 물질이나 육체를 의식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만으로 의식한다. 그리하여 부모의 뜨거운 애정만을 의식하고 그에 결합한다. 이것이 임신이다. 애정은 마음의 상태인데 어찌하여 子宮안에 있는 세포에 결합하는가?
부모의 애정적 결합의식이 자궁에 있기 때문에 영아는 다만 결합에서 오는 애정의식만을 의식하고 추적하며 결합하여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영아는 이와 같이하여 인간계에 나타날 준비가 완료된다. 그는 부모의 세포속에 내재하는 遺傳因子를 자기것으로 삼으면서 서서히 자기를 실현한다. 이 과정이 태아의 성장이며 출산이며 인간으로서의 성숙이다.
그것은 무엇으로 입증하는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現實存在”인 “나”로 입증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생각하고 말하고 공작하는 “나”는 물질의 연장인 육체가 아니다.
나는 육체를 움직이고 살리고 생명있게 하는 “主體”다. 이와같이 하여 영아는 육체와 결합하여 자기를 실현하다. 이 육체는 부모가 제공한 것이며 그 특성은 대체적으로 그 육체를 제공한 부모의 특성을 계승한다. 이와같이 하여 육체와 결합한 시기 즉 受胎의 시기에 비로소 영은 물질현상을 가지게 됨으로 우리의 이른바 과학적 인식은 비로소 “임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물론 임신이라는 사실의 인식은 좀더 시간이 경과한 뒤에야 아는 일이지만 이러기에 필자는 앞서 인간은 인간옷을 입은 영이라 말한 것이다.

12. 靈이 이땅에 오는 “채널” - 同位靈性
이상에서 인간은 육체가 아닌 영이며 우선은 영이 인간실체임을 말했다.
여기서 논할 것은 어떤 영이 이 땅에 오느냐, 아무 영이나 다 마음대로 누구에게나 자유 수생하는 것이냐의 문제를 논하여야겠다.
한말로 그것은 않된다. 영성이 도야된 고급영을 제외하고는 일반영들은 그런 자유도 없고 능력도 없다. 오직 영이 가지는 영적 의식과 동등 수준인 상대 의식 밖에 인식하지를 못한다. 이것을 필자는 同位靈性이라고 부른다. 영적 의식, 靈識의 의식 수준이 높을 때 그에 상당한 대상으로써의 영식 즉 人間心性에 형성된 영식만을 인식하고 영식 수준이 낮은 저속한 영은 역시 자기 영식 수주에 상당한 대상 영식을 찾고 또한 발견하게 되고 다시 그에게 결합을 시도한다. 여기에는 오직 영식 수준의 高低淸濁의 정도가 있을뿐 형상적인 형태가 문제되지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급 영은 저속 영식에 찾아 들어 그와 결합하게 되니 자연히 그 결과는 저속 중생의 형태를 갖추게 마련이다. 형태를 갖추어 - 즉 인간으로 육체를 얻어 겉형태(外樣)를 이룰 때 비로소 자신의 형태가 어떤 것인가를 타와 비교하게 되고 그 때에 好惡를 말해 봐야 이미 때늦은 것이다. 이제는 주어진 여건을 가지고 새로 노력하여 영식의 향상을 도모할 길 밖에 별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靈은 영식 수준이 자기와 동등한 대상에만 교통이 가능하다는 사실 즉 동위영성이 個靈과 個靈과의 통로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 땅에 受生할 “靈”을 선택할 방법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단순하다. 영계에 생존하는 영들이 고급영이든 또는 저급영이 득실거리든 걱정할 것이 없다. 오직 인간측에서 고급영만이 통과할 수 있는 통로만을 설정하면 된다. 그러면 저급영의 출생은 저절로 봉쇄되고 고급영만이 이 땅에 수생하여 우리의 가정에 행복을 주고 사회와 국가와 역사를 빛낼 것이기 때문이다.

13. 社會的 覺性의 중요성
이 땅에 영광을 채우는 방법이 무엇일까? 무엇보다 지혜와 덕과 능력이 구족한 사람이 사는 것이다. 이 땅에 영광은 유덕한 인간에 의한 영광된 행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만약에 암둔하고 포악하고 무능한 인간이 이 땅에 득실거린다면 이 땅은 이대로 포악한 금수세계가 될 수 밖에 없다. 인간에게 숨은 순수 영성이, 즉 불성이 유감없이 발휘될 때 사람은 佛 이요, 聖이요, 참사람이요, 국토는 극락이요, 불국이다. 반대로 인간이 자신을 물질시 육체시 하고 물질과 육체를 지상 가치시하여인간이 지닌 靈性(佛心)을 아주 매몰하고 은폐하고 무시한다면 거기에 있는 것은 유물주의뿐이다. 인간은 기계요, 사회는 공장이며, 세계는 사막이 된다. 이곳은 인간이 살 곳이 아니다. 생명의 불모지다. 인간은 靈性인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신의 본체인 불심(영성)은 동댕이치거나 차라리 눈을 감고 오직 현상적인 것, 감각적인 것, 물질적인 것, 가시적인 것만을 추구하여 찾아들 때는 어떻다 할 것인가. 그것은 인간 타락으로에 직행이며 생명 불모지로서의 진행 과정이다. 오늘날 “사막의 도시”가 아닌 “도시사막”에로 진행은 실로 가공한 일이다. 이곳에는 인간이 출타하고 없다. 인간성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는 이러한 물질 가치 감각 향락의 풍조가 도도히 흐르고 그것이 철학이니, 사상이니, 인간 긍정이니 하여 가위 가치와 사상의 무정부상태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풍조, 이러한 혼란상태는 온 세계에 퍼지고 많은 사람의 의식속에 “유물주의”와 “혼란”이 침전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 심층에의 불순물의 沈澱堆積은 현금의 세계와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오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 지상에 계속 오늘날의 양상을 지속시킬 요인을 이룬다. 의식의 상속은 현상에서 뿐만 아니라 동위영성의 통로를 통하여 또 다른 저급영들이 출현함으로써 계속 물질 감각 위주의 “俗物靈” 들이 인간옷을 입고는 이 자상에 당당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저속영들의 통로를 개방하여 놓고 저급옷을 준비하고는 계속 초대장을 영계에 발송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둘 낳기 운동” “안낳기 캠페인”을 벌려 봐도 나타나는 것들이란 유물 감각적 속물일 밖에 없는 것이니 거기에다 교육이니, 훈련이니, 교양이니, 해봤자 勞倍 功半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은 또한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 땅의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는 무엇보다 인간수락을 방제할 보루가 설정되어야 하며 인간의식의 착각과 혼탁과 오염을 근본적으로 방제할 사회적 국가적인 시설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IV, 인 격

14. 고급영을 受生하게 하는 방법
이 땅에 고급영을 탄생시키려 하면 이 땅에 고급 인간옷 즉 고도로 도야된 품격과 고결한 덕성을 지닌 영식간의 애정 결합이 필요하다.
이 지상에서 고결한 영식의 애정 결합이란 바로 고결한 인간의 애정 결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고결한 인격의 존재”가 절대적인 선재 요건이다. 고결한 인격간의 애정 결합에서 얻어진 고결한 세포가 다름 아닌 고급영이 인간계를 유영하기 위하여 입을 인간옷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결한 “영식”을 형성하는 고결한 인격이란 무엇이며 그 훈성 방법은 무엇이냐가 문제된다. 이에 대하여 필자의 대답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독자들이 너무나 잘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바만 근본 요건으로 말할 것은 “물질”이나 “감각”에 탐착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인격은 저속화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허공에 천국을 그리는 환상과 공허를 일심으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환상에 사로잡힌 공상가이지 인격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고 진리를 실천하는 지혜와 용기가 인격을 향상하는 궁극의 대도다.
특히 강조할 것은 감각에의 탐익이다. 정감에 깊이 빠져들고 탐착하는 데서 인격은 누추해 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온 독자들은 “인격자의 애정결합”과 “감각에의 탐익”은 어던 관계에 있는 것이냐고 물을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육체적 애정 교류에는 반드시 감각이 동반한다. 아무리 “프라토닉”한 “러브”에도 애정과 정감은 공존한다.

15. 애정 애욕의 정체
여기에 문제는 있다. 근본적으로 “애정”, “사랑”, “애욕”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문제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많은 말이 필요하리라.
그러나 필자는 짧은 지면에 이를 설명할 겨를을 갖지 못한다. 다만 극히 필요한 一言만 해둔다. “애욕”이란 근본적으로 “독립자존하는 절대나(佛性我)인 個我가 본래의 입각처를 상실(미혹으로 인함) 한 중생의 공허를 극복하고 본래의 완전에 귀일하고자 하는 착각된 의욕”이며 애정이란 “개아의 공허감을 충족시키는 감정”이라 하여 둔다. 그렇기 때문에 애욕이 그의 본래 욕구하는 바는 원만무결, 절대자존한 영적인 자아에의 복귀에 있지만 그는 迷로 인하여 감각적인 대상을 구하고 거기에서 고식적인 충족감을 얻으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經에 “중생은 애욕과 음욕을 근본으로 한다.”는 말씀이 있는 것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