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수상] 보살정신과 교육애

2009-04-21     김동산

敎育愛를 교육자의 첫째 조건으로 삼은 사람이 독일의 “쉬프랑거”이다. 교육애란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어 받은 문화가치를 최대한도로 발휘시키는 것에서 가장 큰 보람, 즉 사는 즐거움을 느끼는 그러한 심경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소질과 환경의 혜택을 입지 못한 사회의 밑바락에 처해있는 자들에게 향할 때 더욱 그 빛은 찬란해진다. 교육자에게는 경험의 축적과 숙달이라는 것이 요구되고 이 숙달에는 익숙한 데서 오는 관습이 생긴다.

이 관습에는 의례히 타성에 안주하는 무반성이란 심성이 어느듯 스며들기 마련이고 이렇게 하여 이타적인 거룩한 교육애도 세월과 더불어 본능적 이기적인 凡情에 침범되기 위워져서 학생들에게 바쳐져야 할 교육애도 자연히 퇴색이 되고 만다.

종교의 세계는 자신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비롯된다. 이때 만일 교육자가 자기의 직책과 사명에 생각이 미쳤을 때 학생들이 갖는 가치의 실현보다도 같으로는 賢善과 정진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안으로는 虛假를 품고 또한 애욕의 바다에 빠져들고 名利의 大山에 미혹하는 마음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때 스스로 교육자로서의 자격에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문화 가치에 대한 사모의 정이 깊고 교사로서의 양심과 반성력이강하면 강할수록 치열한 법이다. 즉 교육의 눈을 교사 스스로에게 쏟을 때 거기에 바로 자격없는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사는 절대절명의 경지에 빠지고 인간의 본질적인 근원적인 문제와의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종교가 문제가 되는 때가 이때이며 여기서 교육자는 구도자로서의 모습으로 변한다. 이러한 때의 교사로서의 근원적이고도 종교적인 고뇌에 불교는 어떻게 가르치는가. 그것은 보살의 정신일 것이다.

보살정신이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실천에 단적으로 표시되고 있다. 보통 상구보리란 자리적인 위로 향하는 佛果菩薩을 구하는 행위이고 또 下化衆生이란 아래를 향하는 利他的인 행위로서 양자가 모두 그 방향을 달리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행위가 한 인격 속에서 통일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보살 정신일 것이다.

이 보살정신이란 상구보리가 완성하고 스스로 깨달아 안정을 얻은 연후에 비로소 하화중생의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상구보리의 구도생활의 내용으로서 그 과정 안에서 利他的인 하화중생의 실천이 이루어 지는 것이며 또 하화중생의 행위속에는 끊임없이 위로 향하여 보리를 구하는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만 되는 것이다. 교사가 이러한 보살 정신에 눈을 뜨게 될 때에 비로소 언제나 학생과 같은 차원에 설수가 있는 것이며 같은 자격인으로서 겸허하게 절대자에게로 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도의 自利利他圓滿, 自覺學他覺行窮滿의 도인 것이다.

 이것은 “쉬프랑거”가 말하는 교사란 학생을 위하여 봉사하고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불교에서는 교사가 학생의 희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서로 손에 손을 잡고 더불어 절대의 세계에로 나아가는 모습인 것이며 더불어 생을 얻게 되는 세계인 것이다. 불교는 부정을 통한 긍정이요, 혹은 가치의 전환이라고 하여도 좋다. 즉 일단 교육자로서 부정된 자기가 그 비운을 인연으로 절대자의 시계에 눈을 뜨고 그대로인 체 자신을 허용하면서 생을 얻게 되는 기쁨의 세계로 날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는 교사라고 하는 단순한 직업 의식에서 오는 것이 아님은 물론 의무적인 봉사의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경지라 할 것이다. 이것이 한증 더 높은 心地에 안주하게 되는 날에는 제도받는 기쁨에서 모든 것이 보은의 행위가 되며 자발적으로 기꺼이 자기의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相으로 되어 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교육정신으로서 가장 순수한 최고의 교육적 행위 라 할 수 있을것이리라. 이러한 신념에 사는 교사의 감화도 단순한 지식의 전달 이상의 무엇인가를 학생의 마음속에 깊이 심어 놓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