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을 위한 불교이해] 업과 윤회

2009-04-21     불광회 교학부

生死事大
죽음의 문제는 누구나가 거쳐야 할 필연적 현실이다. 거기에는 아무도 대결할 장사가 없다. 죽음 앞에는 권력도 만고 영웅도 호걸도 목숨을 깎아 지며 번 돈으로도 어쩔 수 없다.
육체적 현상만을 보고 있는 한, 그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범부가 의식하는 죽음이란 육체의 멸뿐이다. 그리고 생에 대하여도 아는 바 없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말과 같이 짙은 안개에서 출발하여 안개속을 걷다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이런 인생을 “知中者”라고 했다. 고기의 머리도 꼬리도 보지 못하고 등판만 본다는 뜻이다. 실로는 중간토막마저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지만...
불교에서는 “生死事大”라 하여 生과 死를 함께 중대시한다. 인생에 있어 生死는 각기 한끝이다. 그래서 사람은 살았다 가는 죽어 없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로는 살고만 있는 것이다. 열반은 不死를 의미하고 왕생은 無生의 生이다. 죽는다는 것이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생 생활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생활로의 출발일 뿐이다. 결국 살고 있는 것이다. 잠시라도 아주 죽어서 푹 쉴 겨를이란 없다. 중생이 그 형태를 달리하고 처소 환경을 달리하여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 죽음이란 결국 낡은 옷을 새옷으로 갈아 입고 새 일터, 새 학교에 전직하거나 새로 입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왜 교육과 관계시키느냐 하면 인생은 실로 靈的 향상을 위한 끊임없는 수업이기 때문이다. 生으로 입학하고 死로 졸업하며 대개 재입학이 허락되지 않는 그런 교육과정인 것이다.

生死를 左右하는 것
대개 말에서 말이 나고 소가 소를 낳는다. 이것은 유전법칙이다. 인간도 유전일까. 물론 그렇다고 대답하여야 몰상식은 면할 것이다.
헌데 겉보기 물질적 관찰에서는 유전인 듯이 보이고 실지 그렇게 나타나지만 실로는 因果法이다. 受生의 근본요인은 인과다. 인과는 인격의 고하로 좌우된다. 비록 本性을 몰각하여 중생을 감작하고 있을망정 그 나름대로 자성의 청정공덕을 얼마만큼 그 인격위에 보존하고 있는가에 따라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이 되지 못하고 말이 말로 태어날 수 없는 법칙이 또 있다. 이것을 자업자득이라 한다. 자기나름이라는 뜻이다. 心性의 청정, 인격의 고결, 덕성의 도야 여하에 따라 제각기의 소득을 수확한다. 고급 인간이 되든지 下等濁漢이 되든지 또는 송아지가 되든지... 이것은 전생의 생이고 윤회의 생이다.
물질에 따라서 불멸의 법칙이 있듯이 생명에는 初生 再生으로 生을 반복하는 業力不滅의 이치가 있다. 그러기에 업력이 존속하는 한 중생 생존은 영원하다 할 것이다.

유전의 지배자
이와같이 전전생생하는 중생살이 근원은 인간이 참된 자기 면목의 몰각 - 즉 자기 상실에 있는 것이지만 이런 자기 상실 상태를 무명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중생이 무명 생활에서 벗어날 방법을 가르치신다.
인생에게 무명 흑막을 내리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이 업력이다. 업을 착각적 자아의지에서 일어나는 창조적 행위로써 身口意의 세 방면에서 행한 행위이다. 그것은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다. 이것을 三業이라 한느데 이 업에 따라 현세 후세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준다. 이것을 업보라 한다. 이 업의 힘이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다. 이 업에 따라 전생 상속하는 중생의 생에 좋거나 혹은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이 유전인자를 선택하는 업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유전은 업의 결과이며 업력이 지배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양친의 유전으로 하여 손해를 봤다고 하자. 양친을 원망하여야할 것인가. 또는 빈궁한 집에 태어나서 고생고생, 교육은 고사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컸다고 하자, 부모를 원망하고 부모에게 피해 보상을 청구할 수 있을까. 천지를 돌아봐도 호소할 곳이란 없다. 자업자득이기 때문이다.
자기 업력이 자기 업식에 걸맞는 유전인자 - 인연관계를 선택한 것이다. 호소할 곳 없다. 원망할 곳 없다. 술 한잔 못마셨다고 청춘 보상을 요구할 곳이란 없는 것이다.
억울하거든 無明을 타파하라.
업력의 뿌리를 청정고결 아름답게 장엄하라. 그러면 그대의 운명의 나무는 제절로 아름다운 꽃을 만발할 것이다.

業力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생명의 가지가지 양태는 단순히 유전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유전이라면 체질도 병도 정신작용도 부모에게서 받았고 또한 부모의 손에서 키워지는 동안 여러 습관도 결점도 영향 받는다. 그래서 눈이 먼 모 가수의 호소(영화)처럼 “어머니 왜 나를 나셨나요”하고 눈물지을 수도 있다. 우주를 神이 만들었다고 한다면 인류 불행의 책임을 신에 묻고 그를 심판하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말한 것처럼 그것은 아니다. 모두가 자업이다. 우주도 개서오 모두를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책임을 전가할 곳이란 없다. 유전은 부모에게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유전을 받을 원인은 자기에게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天刑的인 고질병이라도 부모에게 불평할 수 없다. 모두가 자기 책임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業力設의 입장이다.
업에 의한 현상도 몇가지를 분류할 수 있다. 자기가 단독으로 짓는 즉 개체를 완성시키는 업 이것을 別報 또는 滿業이라 하고 역사나 문명 또는 우주와 같이 중생들이 공동으로 짓는 것을 共業 또는 總報라 한다. 혼자 짓던 여럿이 같이 짓던 어쨌든 자기 운명은 자기가 짓는 것이다. 따라서 책임도 자기가 져야만 한다. 철저한 자기 책임 이것이 불교다.

果報를 받는 시기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 데도 차별이 있다. 행위를 한 현생에서 당장 과보를 받는 것, 즉 선악간의 행위에 현찰로 지불을 받는 격인 것을 順現業이라 하고 금생에 지은 업을 금생에 과보를 받지 않고 다음 생에 받는 것은 順生業이라 한다. 이것은 연수표 지불이다. 그리고 三生 이후에 과보를 받는 것이 順後業이다. 이것을 三時業이라 한다.
또한 과보의 내용이 결정되어 있는 것을 定業, 그렇지 않은 것을 不定業이라 한다. 이와같이 과볼르 받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건대 그것은 행위의 성질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라 하겠다. 즉 단독행위로서 타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아니한 행위는 順現業이고 그것이 중한 업일 때는 현생뿐만 아닌 다생에 까지 과보가 미칠 것이다. 그리고 생대가 있는 업은 상대와의 인연관계상 다음 생 또는 그후 생으로 과보가 미루어진다. 그러나 비록 다음 생이나 그 다음 생으로 과보가 미루어졌다 하더라도 행위자의 행위시의 意業에 따fms 과보는 모두 현생부터 받게 되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의업은 생각으로 범한 행위이므로 생각 내용대로 생각 당시부터 받는 것은 당연하다. 위에서 業을 身業, 語業, 意業으로 나눈다 하였지만 원칙적으로 생각을 떠난 행위란 예외에 속할만치 모두가 意思的 業行임으로 비록 본격적 업보가 順生, 順後의 부정업이라 하더라도 意業만은 독립적으로 현생에서부터 당장 받게 되는 것이다.

業力이 갖는 의의
앞에서 중생의 원인은 迷이고 또한 업력이라 했다. 업력의 착각행으로 하여 무명을 더욱 증장시킨다. 이것은 업력이 본성을 착각하여 妄緣을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할 것이 있다. 착각행을 하고 망연을 취하는 업의 주체자는 무엇이냐는 말이다. 이것이 生命本具의 힘이다. 이것은 생명본원인 佛性의 힘이다. 업력이란 다만 망연으로 인하여 발현한 것 뿐이다. 망연을 따라 妄行妄業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이 망각적 촉발일망정 이것은 불성이라는 무한력에 근거한 막중한 힘이다. 그러므로 이를 선용함으로서 위력적 힘을 나타낼 수 있다. 앞서 업이 창조적 힘을 가진다 한 것은 이 말이다. 대개 범부의 인격 향상이나 능력 개발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업력의 활용인 것이다. 어떤 것이 업력의 창조적 활용일까. 그것은 自性功德의 긍정과 신념, 그리고 지속적인 행의 반복이다. 이것이 업력이 佛性을 근거하여 현실적 위력을 나투고 창조적 결실을 가져오게 하는 기본방식이라 하겠다. 업력의 선용은 실로 인간 聖化, 세계 개혁과 관련하여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다. 특히 업력의 개발 선용과 사회구조와의 관계의 문제는 세계와 인류의 평화 번영과 관련하여 새로운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다른 기뢰로 미루기로 한다.
業力과 自己創造
위에서 보아온 바에 의하더라도 불교에서는 조물주나 창조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명백해졌다. 그러면 무엇이 만드느냐를 다시 한번 거론해 보겠다. 이 현상 세계에서는 우선 인연을 들어야겠다. 인과 연이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인이 주고 그에 따르는 것이 연이다.
모두가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다. 조물주가 따로 없다. 있다면 업력이 조물주다. 한때 인천에 계신 “韶天(소천)”老師는 조물주 개조론을 들고 나온 일이 있었는데 조물주는 바로 業行을 말하는 것이었다.
모두는 자기 창조다. 자기가 자기를 만들기 때문에 오늘의 자기는 과거의 자기가 만들었고 오늘의 자기가 오늘의 자기를 만들기도 한지만 즉시 미래의 자기도 만든다. 그러므로 전생 일을 아고자 한면 금생의 받는 것이 그것이요, 미래사를 알고자 하면 금생의 짓는 것이 그것이다 하는 말이 있게 된다. 그래서 내가 무엇이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어떤 행동을 했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자기 행동이 자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나의 선을 남이 빼앗아 가지도 못한다. 우리의 생각은 기계처럼 간혹 착오나 오차를 일으켜 善因에 惡果를 결부시키거나 惡因에 善果를 불러오는 일이란 없다. 善人善果 惡因惡果다. 이래서 우리는 자기가 자기를 만드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다음에 우주 전체를 자기가 만든다는 것은 어찌된 말인가?
이것은 자기 환경을 자기가 만든다는 말이다. 이것도 남이 만들어 주지 않는다. 공동의 환경은 공동의자기 즉 여럿이 함께 만든다. 개별적 자기를 만드는 것을 別業이라 한다 하였다지만 이것은 우리들 각자가 따로따로 특별한 업을 짓고 이 別業感에 따라 개별적으로 특성을 나툰다. 그런데 여기서는 공동으로 업을 짓고 공동의 우주를 만든다. 이 공동의 업은 우리가 현실 사회에서 공동세계를 의식하고 무의식적 연계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를 운용해 나가듯이 공동의 업을 공동으로 짓는 것이다. 이것을 共業感이라 한다. 따로 따로 짓는 것은 별업감, 공동으로 짓는 것은 공업감이지만 어느 쪽이나 자기가 자기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자기 개체나 우주를 만드는 것을 조물주가 아니고 바로 우리다.
이 점을 보면 우리는 이 땅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깊이에서 공동으로 작업하고 공동의 관계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땅은 우리가 주인이다.

業力과 輪回
인도 고대 사상이나 기독교 구약에 나오는 바를 보더라도 몇가지의 창조설을 볼 수 있다. 목공이 집짓듯이 하는 공예적 창조설, 원인(신)이 있어 이것을 점점 분화하는 창조 이것은 일종의 진화설로서 진화적 창조설이다. 그리고 또한 종류는 생식적 창조설로서 어미가 자손을 번식하듯이 하는 자기 확대설이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 모두를 부인한 것은 이미 본 바이다. 영원한 업력이 別業共業으로 창조한다. 이러는 동안 우주는 成, 住, 壞, 空의 과정의 광정을 반복하여 몇 번이고 이루어지고는 다시 허물어진다. 실로 끝없는 업력의 활동이다. 이 업의 활동 광정에서 중생은 제나름대로 共業과 別業에 따라 자기 세계를 구성하며 생을 반복하고 존속한다. 이것이 윤회이다.
업의 원인자인 業識의 正, 淨, 淸의 정도에 따라 업력은 曲, 穢(예), 濁의 정도를 나루어 그에 상부하는 세계를 이루는 것이다. 이래서 하늘, 인간계, 아귀, 축생계, 지옥계를 보게 된다.
이 모두는 중생의 業感 경계다. 지옥, 아귀, 축생의 경계를 三惡途라 한다. 고통이 극단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天界에 오는 것을 막는 자 없다. 문턱이 높은 것도 아니다. 또한 三惡途에서 글어 당기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天界보다 고통 많은 악도에 많이 떨어진다고 한다. 이것은 업식의 상태가 결정하는 것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업식이 邪曲하고 거칠고 탁할수록 그에게는 그런 악도를 제것으로 당긴다. 제가 뛰어 들어가는 것이다. 자업자득이다.

윤회를 방향지우는 要因
바르고 맑고 밝은 마음 상태 이것이 그의 업력이 방향을 결정한다. 이것은 비단 윤회계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자기 전부를 결정한다. 업력은 세력이다.
실현력이다. 無色의 힘이다. 이 힘에 무엇을 이루도록 과업을 주느냐에 따라 현실은 달라진다. 바르고 맑고 밝은 그리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마음 자세가 우리와 그 환경에 명암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업력의 선용이다. 인격 개조도 세계변혁도 여기에서 있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윤회설에 대하여 수긍하기를 어려워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존심이 그렇게 만들거나 육체나 현실 집착이 그렇게 시킨다. 육체는 실로는 겉껍질이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업식이다. 그의 내부 상태가 그의 겉표현을 결정하고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겉모양이 설사 인간이라도 마음 상태가 금수같은 상태를 치닫고 있다면 그는 금일 금수행을 유감없이 행할 것이고 그의 몸은 조만간 금수의 형색을 갖추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의 마음이 보살심으로 충만하고 보살의 자비행으로 그가 행동할 때 그의 마음은 이미 보살이고 그의 오늘은 바로 佛國淨土를 향하는 과정이 될 것도 너무나 명백하다.
다만 그가 그 형상마져 一變시키는데는 불가불 형상을 바꾸는 절차를 거칠 것이 남았을 뿐이다. 이와같이 중생은 그의 마음 상태와 행동으로 부단히 자기와 자기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의 業行이 쉬지 않으므로 그의 輪回行脚(윤회행각)로 쉴 날이 없다. 이래서 流轉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