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연구] 4.인간은 죽으면 그만인가

연재/

2009-04-21     광덕 스님

6) 자아와 <에-텔체>와의 관계
인간 생명의 본체이며 자아의 출발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현대 심령학은 아직 그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물질적인 육체나 초물질적인 에-텔체도 그 모두는 자아가 운용하는 기관이지 결코 자아 자체는 아닌 것이다. 생명 현상을 대상적 입장에서 파악하고자 한느 이 물음에는 영원히 해답을 얻지 못할 것으로 본다. 문제는 생명의 주체적 파악에서 해답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7) 현세게와 영계와의 관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체는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은 육체 구석구석에 침투하여 일체를 이루고 있으나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의 생명 핵심과 함께 육체에서 벗어나 그 이후는 영의 세계에 살게 된다. 여기서 현계와 영계와의 관계를 잠깐 살핀다면 현계는 마음과 물질의 세계라 할 수 있겠고 영계는 마음과 형상과 빛깔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유체가 육체에 침투하여 일체를 이루고 있듯이 영계도 또한 우리의 현계에 침투되어 있다. 영계의 상태는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육체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것처럼 영계도 영계 거주자에게는 보이는 것이며 또한 영시능력을 가진 사람은 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죽음에 이르러 인간 영혼은 육체에서 벗어나 영계로 옳긴다. 영혼은 옹색하고 둔중한 육체어서 벗어나 보다 맑고 경쾌한 의식을 얻게 된다.
주의할 것은 영이 옮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평화 청정을 우루지 않고는 육체적 파괴나 존속의 거부만으로 생명의 안정과 행복은 얻을 수 없는 것임을 또한 말해 주기도 한다.
이상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인간 구성요소들이 어떻게 변화하며 우리의 자아 실현과 상관하고 있는가를 좀 더 자세히 살펴 보고자 한다.

제5장 죽음과 저승사이


앞에서 죽음이 단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自我의 한 활동 형식이라는 사실을 몇가지 측면에서 살펴왔다. 그리고 인간은 육체 이외에 <에-텔>체를 바탕으로 하는 영체를 가지고 있어 육체는 허물어져도 에-첼체는 여전히 존속하며 그 에-텔체로 유체, 영체, 심체, 등 여러 층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말하였다.
헌데 거듭 말하지만 이런 인간 영체를 구성하고 있는 일종의 물체인 에-텔체가 실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 自性을 망각한 데서 벌어진 迷의 경계(착각경계)의 한 현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육체가 있는 듯 하지만 실로는 허망했던 것처럼 영체도 하나의 중생들의 착각 현상이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생각 바로 섰을 때 즉 自性을 깨쳤을 때 육체니, 영체니, 세계니, 물질이니, 법칙이니, 원리이니 하는 것은 모두가 그 자성을 상실하고 허망한 거짓임이 노출되고 마는 것이다.
이 자성을 깨친 자리를 本分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본분에서는 일찍이 유체도 영체도 심체도 아예 虛 假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글을 읽으시는 형제는 이점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앞세 에-텔체를 대체로 유체, 영체 등 四종으로 나누어 보았지만 실로는 그렇게 나누어지는 것도 아니며 또한 에-텔체릐 층면이 한낱 三 ,四층이 아니고 중생이 가지는 의식, 심성의 정도에 따라 실로 말할 수 없이 많은 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 두어야겠다. 중생들 심성의 차별만큼이나 차등은 많다. 이 점은 뒤에서 차차 자세하게 밝힐 예정이다. 前回에서는 그런 무한 차별을 대체로 三종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던 것이다.
다음에는 육체의 죽음 이후 영혼이 영계에 이르기까지의 사정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1) 육체 죽음 이후의 유체
이에 대하여는 이미 몇몇 보고 자료에서 밝혀진 바 있다. 대체로 유체는 죽은 자의 後頭部에서 빠져 나와 처음에는 구름이나 개스처럼 몽롱한 형상을 이루고 있다가 그것이 점점 엉겨서 일정한 형상을 이루고 그 형상이 마침내는 죽은 자와 똑같은 형상이 되어 시체의 위쪽에 떠 있다는 것이 심령연구자의 보고다. 이점은 여러 보고가 대체로 일치한다.
이런 유체의 형상은 물론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우리의 육안이라는 인식 기관으로는 극히 조잡한 물질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는데 그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정신통일 수련을 쌓았거나 영적 투시력을 가진 사람은 볼 수 있다고 한다.
시체에서 빠져나온 개스 모양의 유체는 한동안 명주실 모양의 가는 줄로 육체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이 육체로는 목숨의 줄이다. 이 줄이 연결되어 있는 한 육체는 죽지 않는다.
마침내 소생한다. 그러나 이 줄이 끊겼을 때 그때는 할 수 없다. 혼이 빠져 나간 것이다.
육체는 생명의 통일의식을 상실하고 급격한 화학변화를 거쳐 와해한다. 이렇게 되면 화장터로 가거나 땅속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보면 죽음 현상을 나투는 데는 두 단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유체가 육체에서 빠져 나갔기 때문에 호흡작용이나 감각, 생리작용이 정지된 상태, 이것은 앞에서 (본고 연재 제2회) 미국의 <빌쓰에>박사의 소생 체험담이 생생히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겉보기에는 죽었어도 유체와 연결하는 줄이 끊기지 않고 있을 때이고 또 하나는 이 줄이 아주 끊겼을 때다. 정말 죽은 때다.

2) 살아날 죽음
육체가 죽음을 보이고 있다가 다시 살아난 죽음의 경우 - 이 때에는 대개 幽界 즉 저승을 체험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 체험이나 기억이 사실이냐 허구냐에 대하여는 분명히는 말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왜냐하면 유계는 우리의 육체나 감각의 기준이 되는 세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곳이므로 그곳의 체험은 일단 우리의 시간 공간적 인식구조로 번역되어 의식하고 또한 기억에 보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가 허구는 아니다. 일단은 유계의 한 단면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다음 두, 세가지 예를 들어 참고하고자 한다.

3) 감전사에서 살아난 사람
1945년 10월 한국전력(당시는 경성전기)의 전공이 서울 체신청 구내 전기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부주의로 작업중인 전공 두 사람이 감전되어 전주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한 사람은 현장에서 숨졌고 한 사람은 10여시간만에 소생하였다. 이것은 소생한 김씨의 진술이다.
김씨는 작업중 어떤 충격과 함께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그에게 남아있는 기억은 같이 일하던 동료가 지르는 “아이구! 아이구!하는 소리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얼마를 지냈는지 그는 어떤 길을 걷고 있었다. 푸른 벌판, 꽃이 여기 저기 피어있는 길이었다. 그 사이로 난 길을 친구(동료 전공)와 함께 걷고 있었다. 기분은 상쾌하다. 어렸을적에 소풍을 떠나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얼마를 걸었는지 이윽고 어떤 관문에 다다랐다.
마치 벌판길에 세워진 서울 남대문과 흡사하였다. 수문장인 듯한 사람이 입구에서 “패스보드”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씨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그래서 못들어 가고 문안을 기웃기웃 하면서 그 안을 드려다 보았다. 그런데 함께 갔던 친구는 “푸리.패스다.”라고 하면서 평소 하던 버릇대로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울리며 문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김씨도 그뒤를 따르려 하니 수문장이 가로 막아선다. 그리고 하는 말이 “당신이 올곳이 아니요, 돌아가시요”한다. 김씨는 다소 불만스럽기도 했지만 하는 수 없이 돌아왔다. 얼마인가를 오니 앞이 큰 개울이었다. 거기에는 좁은 다리 한 개가 걸려 있었다. 김씨는 조심조심 그 다리위로 발을 옮겨 놓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다리를 꽝 구르는 것이 아닌가? 김씨는 그만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순간 그는 의식이 돌아왔다. 직장 책임자며 동료들이며 희사들에게 둘러쌓여 병상에 누워있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그곳은 경전병원이다.

4) 저승에서 만난 장인
1957년 가을, 부산 범일동 시장안에 이씨라는 분이 있었다. 염색공장에서 염색한 견직물을 시장까지 운반하는일을 하고 있었다. 한데 이 사람이 두달 동안 안보이더니 얼마만에 죽었다 살아난 사람으로 다시 등장하였다.
이씨는 과로의 탓이었는지 열이 나며 앓기 시작했다. 참을 만치 참다가 하는 수 없이 병원에도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별 효과없이 날짜만 갔다. 그러다가 그는 끝장이 났다. 죽은 것이다. 이씨는 고향이 창원이다. 부산으로 이사한지 3년 이었다. 그때 나이는 40세. 가족 친지가 모여 울면서 장례 준비를 했다. 그런데 죽은지 2일이 되던 날 그는 눈을 떴다. 천지가 모여 염을 하려는 판에 몸을 일으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가족도 모두 놀란 것을 말할 것도 없다. 유령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정말 살아난 것이다. 그의 소생담은 이렇다.
그는 극단으로 괴로워 정신없이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죽은 것이다.
그에게는 세 사람의 장정이 나타났다. 직감으로 이 사람들이 나를 데리려 온 것이로구나했다. 그를 따라 나섰다. 문 밖으로 나왔는데 다시 정신이 들어서 보니 그곳은 으리으리한 궁전 내부가 아닌가. 이씨는그곳에 꿇어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하는 소리에 머리를 들어 앞을 보니 전면에 위엄이 넘치는 대왕이 앉아 있고 그 좌우로 역시 준엄한 차림의 대왕들이 즐비하게 앉아 있었다. 이씨는 이곳이 염라청 이로구나, 그리고 중앙에 앉은 어른이 염라대왕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 중 왼편에 앉은 한 분을 보니 자기 할아버지였다. 다시 보아도 틀림 없었다. 할아버지가 대왕이나 염라판관이 된 것이다. 그는 조부님에게 달려가서 공손히 절을 했다. 조부님은 이씨에게 먼저 꾸지람부터 시작하였다.
“너는 고향 선산을 버리고 나와서 이제 한 것이 무엇이냐? 무슨 일을 했느냐? 돈 번다더니 무슨 돈을 벌었느냐?”
생전과 같은 엄한 할아버지였지만 역시 염라판관이 되어도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였다.
“너는 못올 곳에 왔다.” 하시며 옆에 앉은 판관을 가리킨다.
“ 이 어른이 너의장인이시다. 인사드려라.” 지옥에서 만난 지장보살이었다. 이씨는 얼른 일어나 절을 올렸다. 장인이라 하지만 이씨는 장인 얼굴을 모른다. 이씨 장인은 지금의 부인과 결혼하기 전에 돌아가셨던 것이다. 명부에서 처음 만난 장인이다. 조부님은 장인과 의논하더니, “넌 돌아가거라. 나가서 부모 선산에 찾아가 효성하라. 성실하게 일하고 잘 살아라.”
역시 할아버지다. 엄하시면서도 자상하시게 훈계하신다. 이씨는 두 분에게 인사 드리고 역시 사자를 따라 명부를 나왔다. 친척이 모여 몀을 하려는 판에 이씨는 눈을 뜨고 부스스 일어난 것이다. 가족들은 슬피 울다가 놀라고 놀래다가 좋아서 웃고 웃었다.
이래서 상가집은 경사난 잔치집으로 돼버렸다.

5) 효자 살아나다.
1909년 전북 진안에 한 절(아마도 고림사인 듯, 필자는 아직 이 절에 가서 고증하지는 못했다) 에서는 유난히 지성 다한 기도가 계속되고 있었다.
읍내 한 부인의 외아들이 중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백약이 무효였다. 병자의 모친은 20에 혼자 되어 아들 하나 믿고 살아온 청상과부.
집에는 전래의 재산이 있었기에 온갖 약을 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들의 명이 명각에 이르게 되자 모친은 토지를 팔아 절에 헌공하고 부처님께 매달렸다.
“내 아들 살려주세요”기도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아들은 숨을 거뒀다. 집안에서는 곡성이 터져 나왔다. 절에서는 쉬지 않고 기도 정근이 계속 되었다. 죽은지 3일만에 아들은 살아났다. 당시 아들은 30세. 홀어머니에게서 자랐으므로 효성은 지극했다. 결코 어머님 앞에서 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죽은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도저히 어머님 앞에서 죽을 순 없었다. 그는 고통과 신음속에서도 이것만을 생각했다. 정신이 들어보니 그 곳은 명부였다. 명부사자에게 인도되어 온 것이다. 그는 염라대왕에게 엎드려 간청하였다.
“대왕님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우리 어머님을 앞에 두고 제가 죽을 수 없습니다. 제가 죽기 싫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어머님을 보아 나를 살려 주십시오. 대왕님”
그는 애걸 복걸 하였다. 염라대왕도 난처한 모양이었다.
“사정은 딱하구나. 그러나 부득이하다. 오게 되어 있으니 00사 부처님께서도 너를 살려주라고 분부가 계시구나!” 하더니 한참만에
“너 대신을 세울 수 있겠느냐!” 한다. 그는 됐다 싶어 “네, 저 대신 저의 처를 세우겠습니다.”
하고 선뜻 대답하였다. 염라대왕은 그의 처가 1년뒤에 들어오게 된다 하였다. 그는 이렇게 해서 염라청에서 풀려 나왔다.
의식을 회복하여 보니 그의 몸은 꽁꽁 묶여 염해 있었고 집안에는 곡성이 낭자하였다.
그는 부처님 은혜로 살아났다고만 말하고 대신 세웠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낼 수 없는 것이다. 과연 1년 뒤 그는 상처하였다.
그는 정성껏 부인을 제사했다. 어머님을 지성껏 공경했다. 부처님께도 매년 2백량씩 헌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1928년에 집안 면장을 하고 있었다.

6) 죽었어도 산사람이 있다.
이상에서 보아온 것처럼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죽음은 그의 靈線이라고도 할 유체와 육체를 잇는 줄이 끊기지 않은 죽음의 첫 단계인 때에 한한 일이다. 영혼은 이 동안에 영계의 일부를 여행하다가는 다시 육체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사람이 병이나 기타 사고로 의식을 잃고 호흡도 심장도 감각도 다 끊겼다 하여 죽은 것으로 속단해서는 안된다. 그 중에는 다시 살아날 가망이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며 영적 투시력이 있는 사람이면 이를 알아본다. 필자가 아는 모씨는 자기의 아들이 죽은지 이틀만에 화장해 버렸는데 죽은지 5일되는 날 꿈에 전화가 걸려와 수화기를 들어보니 죽은 아들의 목소리였다. “아버지 내옷이 없어졌어요”하더라는 것이다. 옷은 육체다. 그는 오랫동안 아들 환상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그러면 유체와 육체를 잇는 선은 대개 몇일이나 존속하는가. 이것은 일정하지가 않다. 즉시는 끊기는 경우도 있고 예외로 수일 이상 존속할 때도 있다. 이선이 존속하고 있는 동안은 육체의 통일을 유지한다. 즉 부패 분해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7) 유체(幽體)의 차별
영선이 끊긴 죽음 - 이것이 참으로 죽은 것이다. 이 때에 영혼은 유체의 옷을 입고 自我 의식이 활동한다. 이 유체의 영혼은 수일동안 시체 주변에 머물러 있기도 하고 또는 곧 영계를 향하여 떠나기도 한다. 그런데 때로는 영혼이 생전에 사랑하는 아들이나 가족이나 친지에게 자기의 죽음을 알리고 싶어 할 경우가 있다. 그런 생각이 절실한 염원으로 굳어있을 때 육체를 이탈한 영혼은 그의 유체를 그의 친지에게 나타나게 할때가 있다. 그것은 환상으로 혹은 꿈 속에서 그 몸을 나타낸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간혹 들을 수 있는 현상이다.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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