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강의실] 반야심경 강의 12

성전강좌실(聖典講座室)

2009-04-20     광덕 스님

  바라밀다에는 유(有)도 없다. 무(無)도 없다. 유무(有無)도 없고 진무(眞無)도 없다. 대립(對立)될 존재가 아닌 공(空)인 것이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대자유(大自由)가 여기에서 열린다. 바라밀다는 대해탈(大解脫)이며 자존(自存)이다. 여기에서 전도몽상을 여윈 정견(正見)이 바로 선다.

  이런 결과 보살이 반야에 의하여 바라밀다가 현저하면 그때에 비로소 무엇이 덮혔다가 걷히는 것도 아니며 구속되었다 해방되는 것도 아니며 속박 부자유에서 해탈되는 것이 아니며 번뇌로 있다가 보리를 이루는 것도 아니며 중생으로 있다가 해탈자재 구족한 부처님이 되는 것도 아니다. 본래로 덮히지 않았으며 속박된 바가 없으며 중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었다는 말인가. 본래 불(佛)이라는 말인가. 마음이라는 말인가. 아니다.

  ④ 지혜가 자비다.
  오늘날 많은 불자들은 눈 앞에 벌어지는 중생고와 사회불안과 모순 비리(非理)등에 대하여 불자는 마땅히 중생구호 사회정화 사회정의의 구현에 앞장서야 할 것을 강조한다. 당연한 말이다. 중생구호야말로 보살의 생업인 것이다. 그러면 중생구호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광대한 자비행의 전개가 그것이다. 무엇이 광대한 자비행인가.
  여기에 이르면 자비를 행하자면 보살이 자비심의 충족을 위하여 하는 일이 아니며, 진실로 중생을 위하는 것일진대 불가불 지혜없이는 중생을 참되게 이(利)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혜없는 자비행은 자신의 보살심 충족이 될 뿐 실로는 중생에게 해로운 결과를 안겨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보살심의 동력은 무한한 것이다. 이 무한력은 지혜의 통찰 없이는 발동될 수 없다. 자타대립의 상태에서 우러나는 자비심이란 감상적인 자비거나 일시적 즉흥적 자비거나 자기만족적인 무분별한 자비가 되기 쉽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유조건의 유한 자비가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자비가 반야의 조명이 없기 때문이다. 참된 자비는 반야바라밀에서 나온다. 반야없는 자비란 있을 수 없다. 반야에서 보살의 자비(慈悲)는 흘러나오는 것이다. 실로 반야와 자비는 일물양면(一物兩面)이다.   반야에서 대비(大悲)는 생(生)하고 보살의 대비는 무한한 위력을 동반한다. 그것은 노보살의 자비가 곧 바라밀다의 발현(發顯)이기 때문이다.
  실로 경 말씀과 같이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해서 마음이 걸림이 없다> 보살의 대비력(大悲力)을 구사하여 보살의 대비력(大悲力)을 구현한다는 자비는 병수(倂修)하는 것임을 명심(銘心)하자.

  ⑤ 대안락(大安樂)은 어떻게 얻는가?  
  길을 걷는 것과 흡사하다. 사방 전후 좌우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을 걷고 있다. 언제 어떤 고난이 닥쳐올 지 알 수 없다. 생명에 대한, 혹은 재산에 대한 고난인지 알 길 없다. 뿐만 아니라 죽음이라는 범부로서는 생명의 종말을 의미하는 위험은 명백하게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며 그것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 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길을 헐떡이면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근본적인 인생 불안과 공포가 깃들어 있다. 이 공포에서 벗어 날 방법은 없을까? 여기에 경은 명백하게 해답을 주고 있다.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가 없다>하고 있다.
  마음이 걸림이 없다 함은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하여는 이미 말하였다. 그것은 반야에 의하여 마음이 본래로 걸림이 없고 덮임이 없음을 확인하고 확신하며, 걸림없고 청정심이 되는 것이라 했다. 이것이야 말로 공포에서 벗어나 대안락을 얻는 방법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말하여야 하겠다.
  하나는 마음이 본래로 덮임이 없고 걸림이 없는 청정심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영원한 청정심임을 아는 것이다. 여기에는 공포가 있을 수 없다. 고(苦)란 아예 이름조차 없는 대자재—즉 대안락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라밀다의 전공덕(全功德)이 전면(全面)으로 노현(露顯)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앎에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지어먹은 믿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사유와 연구에서 도달되는 경계도 아니다. 오직 깨침이 있을 뿐이다. 앎 없이 알 뿐이다. 의심없이 자긍(自肯)할 뿐이다. 실로 자기진면목(自己眞面目) 자기본심지(自己本心地)를 요달(了達)한 장부한(丈夫漢)이 수용하는 경계인 것이다. 다음에는 마음에서 어둠, 한계, 변멸, 고통 등 소극적인 관념을 소탕하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마음에서 일체 비본성적(非本性的)인 상념(想念)을 몰아내고 반대로 본성덕성인 긍정과 안녕, 지혜와 자비의 대조화심을 마음에 충전(充塡)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에 어둠이 덮인 것이 아니고 밝음으로 충만되었을 때 이것도 역시 마음에 덮인 것이기는 하나 이것은 긍정적이며 광명적인 상념(想念)이 덮인 것이므로 우리에는 역시 공포․불안 등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암흑(暗黑)이 부지하지 못하게 되어 불안․공포는 자취가 없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본성의 법칙과 본성 공덕 운영의 원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도리를 통하여 우리는 대안락․대해탈을 즉시에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⑥ 심청정(心淸淨)이 정견(正見)을 낳는다
  바라밀다에는 유(有)도 없다. 유무(有無)도 없고 진무(眞無)도 없다. 공(空)인 것이다. 대립(對立)될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전일(全一), 전성(全性) 무대립(無對立)의 경계(境界)다.
  그러므로 일체(一切)에 걸림이 없다. 대자유(大自由)가 여기서 열리는 것이다. 바라밀다는 대해탈(大解脫)이며 대자유(大自由)며 자존(自存)이다. 여기서 정견(正見)이 바로 선다. 무엇이 정견(正見)일까? 그 보다도 무엇이 사견(邪見)일까를 먼저 보자. 유무견(有無見)에 사로잡힌 견해(見解)가 사견(邪見)이다. 한계적(限界的) 존재성(存在性)에 근거한 소견(所見)이 사견이다. 이 사견(邪見)으로 인하여 어떤 판단을 한다. 이 사견에 의한 판단이 전도견(顚倒見)이며 허망(虛妄)한 생각이다. 바로 전도몽상(顚倒夢想)이다.
  반야에서 일체(一切) 존재적(存在的) 유무(有無)를 여지없이 분쇄했을 때 정견(正見)은 스스로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반야바라밀다에 의하여 마음이 걸림이 없게 되므로 전도몽상을 멀리 여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생 전도(顚倒)의 모양을 약간 살피기로 한다.
  대개 범부(凡夫)는 네 가지로 전도견을 갖는다. 범부들이 그들 미(迷)의 세계의 참모습을 모르기 때문에 중생 세계가 무상(無常)한 것을 모르고, 영원(永遠)한 것처럼 상(常)을 집착하며, 또한 고(苦)인 것을 모르고 낙(樂)인줄 알고 집착하며, 또한 무아(無我)인 것을 모르고 아(我)를 집착하며, 부정(不淨)인 줄 모르고 정(淨)이라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을 유위(有爲)의 사전도(四顚倒)라고 한다.
  또 한가지의 사전도(四顚倒)가 있다. 이것은 유위(有爲)를 집착하는 전도(顚倒)가 아니라 무위(無爲)를 집착하는 사(四)전도다. 유위(有爲)의 사(四)전도는 범부들이 잘못보고 집착하는 것이지만 무위(無爲)의 사(四)전도는 성문(聲聞)․연각(緣覺)의 전도견인 것이다. 이들은 유위의 전도에 대하여는 명백(明白)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다만 깨달음의 경계를 마치 일체유무현상(一切有無現像)이 없고 다시 아무 것도 없는—이런 것인 양 생각하고 집착한다. 이것이 잘못이다.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이는 공(空)을 잘못 안 것임에 공(空)에의 집착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세계 즉 열반경계-<바라밀다>는 영원(常)하며 낙(樂)이며 열반 자체로, 존재하며(我), 이것은 정무구(淨無垢)(淨)한 줄 모르고 반대(反對)의 견해(見解)를 갖는 것이다. 즉 무․무아(無我)․부정(不淨)이 진리실상(眞理實相)이라면 우리는 영원의 비관(悲觀)과 절망(絶望)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하등 생(生)의 긍정(肯定)과 존립(存立)의 기초를 상실한다. 여기서는 오직 염세(厭世)와 퇴영(退嬰)밖에 아무 것도 없다. 긍정(肯定)․번영(繁榮)․환희(歡喜)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은 망견(妄見)일 것이다.
  이런 견해는 유무(有無)의 사(四)전도와 같이 유해하다. 오히려 해독(害毒)이 더 크다. 이런 사상은 퇴폐사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도견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이런 견해의 잔재는 없는 가 살펴야 할 것이다.

  ⑦ 열반(涅槃)에 이르다.
  경에는 「전도된 허망한 생각을 멀리 떠나 열반을 얻는다」(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하였다. 열반은 nirvăna 멸도(滅度) 적(寂) 이계(離繫) 해탈완전의 뜻이다. 원적(圓寂)이라고 번역된다.
  원래는 불을 끈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이 꺼져 없어져서 깨달음의 지혜, 즉 보리(菩提)가 완성된 경지를 말한다. 이것이야 말로 불교의 궁극적 실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대개 열반에 대하여 두가지 입장이 있다. 그것은 번뇌를 없이 한 회신멸지(灰身滅智)의 상태, 즉 모두를 절무(絶無)로 돌리는 입장이 그 하나인데 이것은 소승적(小乘的) 입장(立場)이다.
   그러나 열반을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대승적(大乘的) 견해다. 원래 열반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사덕(四德)이 구족(具足)한 것인데 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공무(空無)의 잔재(殘滓), 즉 유성(有性)의 잔적(殘跡)이다. 열반에는 이와 같은 사덕(四德)과 팔미(八味)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팔미(八味)라 함은 상(常) 항(恒) 안(安) 청정(淸淨) 불로(不老) 불사(不死) 무구(無垢) 쾌락(快樂)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열반과 그 덕미(德味)는 닦아서 더해지거나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성본래(自性本來)가 이런 것이므로 본래청정열반 또는 성정열반(性淨涅槃)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만인(萬人) 자성(自性)의 본래(本來)상태다.
  경에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 했다. 이는 「번뇌를 없이하여 마침내 열반에 든다」는 열반에 이르는 과정을 말한 것이 아니다. 또한 열반을 구경했다는 것도 아니다. 이는 구극(究極)열반이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생사(生死)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반야에 의하여 번뇌장(煩惱障)이나 소지장(所知障)을 벗어나서 생사의 미(迷)경계를 벗어났으므로 생사(生死)에 머물지 않는다 하는 것이며 본연대비심(本然大悲心)을 일으켜 중생 속에 들어가 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에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다. 「보살은 지혜를 가짐으로 생사에도 머물지 않으며 자비를 씀으로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하고, 또한 「뛰어난 지혜를 가진 보살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항상 중생에게 이롭게 하여 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경의 말씀은 모두 이를 말하는 것이다. 열반을 불교도의 구극의 실천목표라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