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극복하는 법

지상강연 3

2007-03-27     관리자

우리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을 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이것이 덜하거나 없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도 마음이 괴롭고 불안하고 불편할 때 그것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가만히 관찰해보세요. 보면 사라집니다. 물론 고통이 다시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또 가만히 보세요. 그러면 또 사라집니다. 그렇게 하기를 반복하면 나중에는 아예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수행 초기에 보니 어떤 생각은 잠시 머무르고 어떤 생각은 오래 있어서, 우 자나카 스님께 “어떤 생각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어떤 생각은 길게 있다가 사라집니다.”라고 하자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잠시 머무는 생각이 있고 길게 머무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은 전광석화와 같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길게 머문다고 하는 생각의 경우, 당신이 그러한 생각을 반복적으로 계속하는 것이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 지도를 안 받았으면 저도 그 생각을 깨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관찰해보니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생각 속에 살고 있는데 수행은 막 흩어지는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면, 몸은 그냥 있을 뿐인데 의도가 몸을 움직입니다. 여러분도 수행을 하시면 알겠지만 의도만 있어도 몸이 움직여져요. 예를 들면 절을 해야지 하면 손이 그냥 쑥 올라가요. 또 걸을 때도 걸어야지 하면 발이 그냥 나와요. 의도가 몸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수행을 통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계를 지키라, 그리고 적당히 먹어라
미얀마 찬매 센터에서 한 달간의 비구생활을 마치고 우 자나카 스님께 가서 “한국에 가서 이 수행을 계속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니까 “팩스로 보내라. 그러면 지도해주겠다.”며 “오계를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오계는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고, 남이 주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술 먹지 않는 것입니다.
“어기면 어떻게 합니까?” 하자 스님께서는 “다시 지키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오계를 다 지키는 것은 쉽지 않아요. 그러나 제가 그나마 이 정도라도 수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계를 지켰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오계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아시겠지만 육계(六戒)에 대해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전에 보면 전륜성왕은 일곱 가지 보배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 수레바퀴 보배가 나타나 계속 굴러가면 다른 나라 왕들이 와서 항복을 해요. 저절로 항복하면서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자 전륜성왕이 여섯 가지를 지키라고 이야기하는데, 오계에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한 것이 “적당히 먹어라.”입니다.
『대전기경』에 석가모니부처님을 포함한 일곱 부처님의 가르침이 게송으로 나와 있습니다. “모든 악은 행하지 말고, 모든 선은 행하며 마음을 맑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말씀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남을 해치지 말고 계를 잘 지키면서 음식에서 적당함을 찾고 선정을 닦아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오계를 지키고, 음식을 적당히 먹어야 합니다. 먹을 때 제대로 먹어도 수행이 많이 될 수 있습니다. 몸에 대한 집착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계에 적절히 먹는 계를 하나 추가했으면 합니다.

어떻게 마음을 챙길 것인가
미얀마 찬매 센터를 나오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위빠사나 수행을 해오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눈을 뜨는 구나’ 하고 느끼면서 뜹니다. 하루 종일 계속 관찰을 놓치지 않고 순간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려고 노력합니다. 우 자나카 스님이 팩스를 통해 지도해주겠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아 스승의 지도 없이 수행을 했기 때문에, 제 자신을 스승으로 삼고 마음을 열고 제 스스로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수행자들이 수행센터에서 전문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법문한 것을 풀어쓴 책에서 도움 받으며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명상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명상의 핵심은 집중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집중했기 때문에 집중도 할 수 있었고 집중했을 때 알 수 있는 것도 알게 된 겁니다.
명상 중 가장 집중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좌선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좌선을 할 때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또 무엇인가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다리가 저리면 저린 대로 100% 집중을 합니다. 100% 집중하면 집중하는 것도 알면서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 수 있습니다. 좌선을 할 때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집중하여 관찰했기 때문에 고요한 상태에도 도달하고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의 세세한 현상도 알게 되고 사물의 본질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하루종일 마음챙김의 가능성을 봤습니다. ‘아! 무엇을 하든 100% 집중하면 되겠구나. 그러면 내가 집중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도 알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은 순간순간 무엇을 하든 간에 100% 집중하면 좌선상태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수행을 계속해가던 중에, 마침 우 자나카 스님이 한국에 오셨어요. 스님께 하루종일 마음챙김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운전할 때, 돈 셀 때, 또 하나는 책 볼 때는 마음챙김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영어로 대화를 하였기 때문에 언어적인 한계가 있어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름대로 의심이 풀렸어요. 순간순간 하는 일에 집중함으로써 하루종일 마음챙김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 뒤부터 순간순간에 집중하면서 마음챙김을 하고 있는데,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하면서 마음챙김을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보통 몰두하면 마음챙김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을 챙기면서 몰두하면 둘 다가 가능합니다.

감각의 문을 잘 지키라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을 볼 때 거기에 집중을 하면 그때 올라오는 생각이나 감정이 정확히 보입니다. 순수하게 보거나 듣고 있는 것과 그럴 때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번뇌를 놓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에서 안 좋은 것이 일어나면 그것이 시작될 때 알아차리고 그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수행이 번뇌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에 대해 먼저 믿음을 일으키고, 그 믿음을 근거로 계를 지키고, 그 다음에 감각의 문을 잘 단속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감각의 문을 단속하지 않으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 물밀듯이 밀려 올 것이며, 그러면 고통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감각의 문, 그러니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또 혀로 음식을 맛보고, 몸으로 닿는 느낌을 잘 지키지 않으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 물밀듯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감각의 문을 잘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보거나 들을 때, 전체적인 상(相)도 취하지 말고 부분적인 상도 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전체적인 상을 취한다는 것은 볼 때 저건 사람이다, 남자다 여자다 하는 것이고, 부분적인 상을 취한다는 것은 옷을 잘 입었다, 못 입었다, 멋있다 등으로 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든지 듣든지 전체적인 상도 취하지 않고 부분적인 상도 취하지 않으려면, 이것은 제 나름대로 생각한 것인데, 100% 보거나 들어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100% 보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처리해요. 컵을 볼 때 ‘아 컵이 있구나. 예쁜 컵이구나, 혹은 미운 컵이구나’ 하고 자신의 개념이나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것을 가지고 처리해버리지, 앞에 있는 컵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컵에 대해 판단하거나 생각을 하는 동안에는 보고 있지 않는 겁니다. 오로지 보는 것만이 있을 때 100%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100%로 보면 남자다 여자다 하는 것도 없어지고, 좋고 싫고도 사라지고, 일체의 판단도 사라집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예를 들어 이 컵을 100%로 보면 아주 귀한 물체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컵이 여기 있기까지의 과정이 소중히 보입니다. 이렇게 100%를 보게 되면 과거와 미래의 영향에서 벗어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현재 있는 존재와 만납니다. 과거와 미래의 투사로서 사물을 대하지 않고 현재 눈앞에 있는 사물의 본질을 보게 됩니다. 사실 우리의 고통은 과거와 미래가 더해질 때 더 커지게 됩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를 경험할 때 현재에서 느껴야 할 고통만 있고 그 고통은 크지 않고 견딜 만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를 극복하는 길 세 가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를 극복하는 길은 세 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는 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알면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납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이 없어지는 것은 별로 신경이 안 쓰입니다. 이사를 갈 때, 먼저 살 던 집이 정이 조금 들긴 했지만 별 신경이 안 쓰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차에 누가 흠집을 내놓았을 때 기분은 나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에 대해서 내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가 많이 옅어질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현재에 계속 집중하면 죽음은 없습니다. 사실 죽음은 우리의 생각 속에 있고 미래에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개를 두 마리 키우는데 둘 다 열 살쯤 되었어요. 5년이나 10년 후에는 죽겠죠. 개들이 죽는 순간이 상상이 되는데 그 놈들이 그럴 거예요. 죽는 날 죽기 조금 전에 ‘아! 몸 컨디션이 안 좋네.’ 그러다가 뚝 끝날 거예요. 그것은 개들의 머릿속에 죽음에 대한 생각이 없고 오로지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인과의 법칙을 철저히 깨달아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가 많이 옅어집니다. 당연히 올 것이 온 것으로 알면 두려움이나 아쉬움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때가 아닌데 억울하게 혼자만 빨리 죽는 것 같을 때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의 이치대로 모든 것이 진행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 죽음을 두려움이나 미련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법칙대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도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