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여성불교] 루스 데니슨

서양의 여성 불교

2009-04-16     진우기

미국 여성 불교계의 대모

83세의 루스 데니슨(Ruth Denison 1922~)은 미국 여성 불교계의 대모와도 같으며 늘 괴짜 법사로 알려져 왔다. 1960년대 초 미얀마에서 위빠사나의 두 시조 중 하나인 우바킨에게 배워 인가 받은 4명의 서양인 중 하나로서 서구에서 위빠사나를 가르치는 여성법사 제1세대이며 미대륙에서 여성만의 여성 불교 수련회를 처음으로 개최한 사람이다.

넘치는 에너지와 전통을 벗어난 창의적인 방편으로 이름이 나있는 그녀는 음악 리듬 챈트 소리, 춤 등을 명상의 보조수단으로 사용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으며 매우 여성적이기도 한 그녀는 그러나 미국의 동쪽이나 유럽에서 가르칠 땐 매우 형식적이고 정통적인 정식 교사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미국 땅에 본토인 불교 스승이 거의 전무할 때부터 가르침을 시작한 그녀에게 불교를 배우고 법사나 지도자가 된 여성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작고한 아야 케마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고, 여성 불교를 개척하는 샌디 바우처도 그녀를 통해 불교와 자기 자신을 배웠다. 그녀가 지도하는 7일 수련회에 처음 참석했던 체험을 바우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불교센터 담마 딘나

“모두가 지켜야 하는 묵언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것이 고통스러웠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 생각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다만 나의 삶을 체험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때로는 가슴 속에 슬픔이 한 아름 고여 더운 눈물이 얼굴에 흘러내리기도 했다. 때로는 너무 힘든 일을 완수하려고 애쓰는 어린아이를 지켜보는 것처럼 커다란 가슴속의 상처가 욱신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드넓은 평화로움이 함께 했고 난 웃을 수 있었다. 침묵이 내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죠수아트리 시에 위치한 그녀의 불교센터 담마 딘나는 오랫동안 그녀가 키워온 수행센터이다. 담마 딘나는 본래 붓다 시대에 높은 경지에 오른 여성 스승의 이름이다. 사방이 텅 빈 모하비 사막 한가운데 작열하는 태양을 받으며 서있는 이곳은 마음을 비우고 수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데니슨은 이렇게 말한다. “사막은 이런 인식에 특히나 도움이 됩니다. 열린 공간, 광대한 메사(고도가 높은 평원) 저 끝 지평선에 산들이 보이고 그 산봉우리엔 6월 까지도 눈이 덮여 있지요. 너무나 메마르고 너무나 벗어버린 너무나 진실한 그 곳, 아무 것도 감추지 않은 곳, 모든 것이 본래 모습 그대로 자신을 보여주는 곳.”

현재 담마 딘나는 17.5에이커의 넓은 땅에 큰 건물이 4동 있고 작은 건물도 여러 채 달려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전의 재래식 화장실에 더하여 수세식 화장실도 건설되었다. 하지만 물 절약을 위해 여전히 재래식 화장실만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 규모는 35명의 수행자가 편안히 거주할만하다.

데니슨의 제자 중 현재 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12~15명 정도이다. 이곳에는 작지만 모든 시설을 갖춘 독거용 집이 6채 있어 장기 수행자에게 싼 값에 빌려준다. 최근 이곳을 차지한 거주민들은 전 교수, 피자회사 중역, 조각가, 작품이 잘 안되는 음악가였다. 이 곳에서는 겨울마다 30일간 장기 수련회를 한다. 지난 번 수련회의 경우 30일 계속 참여한 사람이 30명, 그리고 단기간만 참여한 사람이 70명이었다.

우바킨과의 만남

데니슨은 이전에 프러시아라 불리던 현재 동독의 작은 마을에서 1922년에 태어났다. 이미 어렸을때 그녀는 성자와 천사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체험을 하였다.

이차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그녀는 전쟁 말기에 러시아가 서쪽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베를린으로 피난을 가야했다. 마차를 타고 가던 난민들이 영하의 날씨에 수도 없이 얼어죽는 속에서 용케 피난을 했지만 베를린도 러시아군이 점령하자 다시 고향마을로 돌아간 그녀는 이미 그곳을 점령했던 러시아군에 붙잡혀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그 곳에선 매일 동포들이 질병과 학대로 파리처럼 죽어나갔다.

이런 죽음과 절망의 환경에서 데니슨은 어린 시절 성자들의 방문을 받던 일을 떠올리고 기도의 의미를 체득하였다. 기도는 어떤 집중의 대상을 가지고 신뢰를 키워가는 일이다. 기도자는 밖에서 도움이 온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당시 그녀는 그 도움이 내부에서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젊은 여성이었기에 데니슨은 반복되는 겁탈을 당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점령군에 대한 증오가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이 조국이 부른 집단의 업을 받는 한 개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일을 가져올 원인을 개인적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결과를 나누어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갖은 고생 끝에 미국으로 이주한 그녀는 이전에 베단타교의 수사였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이들의 할리우드 집은 인도사상가와 불교계인사들이 오며가며 들르고 머무는 집이 되었다. 그러다가 명성을 좀 더 잘 알아야겠다는 소망에 부부는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떠났다. 바로 이 때 그녀는 우바킨의 제자가 되어 1969년 전법을 받게 되고 이어서 일본에 들러 야마다 노사와 야스타니 노사에게 2년간 참선도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깨어있음 즉 정념의 바른 가르침이 선불교에서 잊혀진 것 같아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좋은 스승은 좋은 친구처럼

몸에 관한 집중과 비전통적인 수련방식에 대해 그녀는 명상을 오랫동안 가르칠수록 명상자가 겪는 어려움이 가슴에 다가왔고 그들이 하루아침에 조용히 앉아 자신의 삶의 과정과 몸-마음의 감각에 온 주의를 기울일 만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생각해낸 방편들이라고 말했다. 서있을 때도 걸을 때도 달릴 때도 누울 때도 풀밭에서 몸을 굴릴 때도 춤을 출 때도 웃을 때도 벌레처럼 길 때도 명상을 하도록 수련을 시킨 것이다.

그렇게 깨어있음을 개발하기 위해 다양한 감각을 사용하도록 해보니 수행자들은 좌복에 앉아 명상할 때만이 아니라 삶의 상황에서도 수행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배우게 되었다. 수련회가 끝나면 수행자들은 수행을 어떻게 집으로 가지고 가야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광범위한 범위에서 깨어있음을 개발해놓으면 그것은 서서히 자연스런 상태가 되고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되어 잘 잃어버리지도 않게 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몸과 마음의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좀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루스 데니슨은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는 법사이다. 그녀는 좋은 스승은 좋은 친구처럼 배경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나’라는 것과 ‘아상’을 줄이는 것이지 늘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스승이라는 인물에 매료되어 모든 관심이 거기로 모이지요. 스승의 인물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요? 나는 수련을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의 마음을 열어 자신이라는 인물을 놓아보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도록 돕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