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의 수호자, 신중이야기1-사천왕(四天王)

불교 문화 산책-72

2009-04-15     관리자

장독 위엔 아직 지난 눈이 남아있지만, 논둑 햇살 좋은 곳에는 냉이와 쑥이 서로의 키 재기로 분주한 계절이다. 생명의 기지개는 죽어 있는 법당의 기둥에까지 전해지는지, 기지개 소리로 아우성이다.

사천왕의 기원과 수용

사천왕(四天王:Catvaro maha-rajanah)은 수미산 중턱에 머물면서 네 방위를 수호하는 신중이다. 일반적으로 형상이 유사한 인도 재래의 신인 야차나 크샤트리아 출신 장수를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아함』『증일아함』등 원시경전에 이미 사천왕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금광명경』에는 「사천왕품」을 별도로 두어 사천왕신앙을 체계화하였다.

사천왕신앙의 핵심은 참회와 멸죄하여, 사천왕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통일신라 호국불교 성립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삼국유사』권2「기이」제2 문호왕법민조에는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려는 소식이 알려지자 명랑법사가 “낭산 남쪽에 신유림이 있는데 그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라고 하여 사천왕사를 창건한 기록이 전한다.

신유림은 예부터 신성시 되던 곳으로, 선덕여왕(신라27대)이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여 도리천인 낭산 남쪽 기슭에 장사지냈는데, 여왕 사후 왕릉 밑에 사천왕사를 세우니 여왕의 예견에 감탄했다고 전한다.

다양한 사천왕의 모습

사천왕은 방위신으로서 악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의 역할이 강하지만, 탱화, 각종 공예품 등 그 표현대상이 다양한 특징은 보인다. 기본적인 도상은 방위별로 동방지국천(비파), 서방 광목천(용과 여의주), 남방 증장천(칼), 북방 다문천(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진 1은 탑 내부에 봉안된 사리기로 갑옷을 입고 있는 서역인 모습의 사천왕을 표현했다. 경주 괘릉 석인상을 비롯하여 이 시기 제작된 조각상은 이국적인 풍모를 특징으로 하는데, 당시 빈번하게 경주를 드나들던 아라비아 상인들을 모델로 제작하였을 것이다.

사진 2는 본존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하단 좌우로 시왕, 사천왕, 도명존자를 섬세한 필법으로 표현하였다. 앞서 보아왔던 무장 형태가 아닌 문관복을 착용한 예외적인 사천왕의 모습이다.

원원사는 명랑법사가 세운 사천왕사, 금광사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전기까지 밀교의 중심이 되었던 곳으로, 조선 후기까지 명맥이 이어져 왔다. 주목되는 점은 명랑법사가 밀교계 승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세운 사찰이 모두 사천왕과 관련 깊은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불교의 한 단면을 알려주는 예라 하겠다.

고려~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사천왕은 사찰 입구를 지키는 천왕문에만 제한적으로 봉안 된다. 보통 일주문과 불이문 중간에 위치하는데 별도로 사천왕을 봉안하지 않은 경우에는 영광 불갑사의 예와 같이 대문에 그림으로만 표현하였다.

조선 인조 때 세워진 법주사 천왕문은 정면 5칸의 예외적으로 큰 규모인데, 평지가람의 특성상 시각적으로 왜소해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한 대목장의 배려를 읽을 수 있다. 내부에는 중앙 출입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악귀를 밟고 앉아 있는 역동적인 자세의 사천왕을 화려한 오방색으로 채색하여 봉안하였다.

헛된 마음은 빈 가슴을 더욱 비우게 한다. 산사를 찾을 때는 빈 몸, 빈 가슴으로 가야 한다. 힘들게 지고 간 마음은 결국 가슴을 공허하게 할 뿐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