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의 의미

불교의 근본사상(13)/대승불교편

2009-04-15     관리자

ꊱ 불교수행의 길

  불교수행의 궁극의 세계에 도달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이 열반증득의 길이다. 열반성취 그것은 불교수행의 최상이며 지상목표이다. 그러면 그 열반이란 무엇인가. 번뇌의 소멸이다. 그러므로 열반이란 욕망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한다. 잡아함경 18에서는 「열반이란 탐욕을 영원히 없애고 성냄이 영원히 사라지고 어리석음도 영원히 사라지고 일체의 모든 번뇌가 영원히 소멸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 잡아함경의 의미로 본다면 탐·진·치 3독이 마음속에서 완전히 소멸된 상태 즉 청정한 마음이 자리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였다. 무욕의 상태 청정의 심성 해맑은 지혜가 샘솟는 무구한 마음자리의 광명이 곧 열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반열반경 33에서는 열반의 의미를 지닌 여러 가지 이름으로서 無生 無出 無作 無爲 歸依 窟宅 解脫 光明 燈明 彼岸 無畏 無退 安處 寂靜 無相 無二 一行 淸淨 無闇 無礙 無諍 無漏 廣大 甘露 吉祥 등 25종이나 된다. 이러한 명칭은 모두가 대자연적인 자유로움과 본체론적인 실상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열반은 청정한 생명의 실상을 의미한다. 열반을 잘못 아는 사람들은 <사라진다> <꺼진다> <없어진다> 등으로 이해하여 죽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열반은 죽음이 아니다. 중아함경 56에서는 열반 그것은 병이 없는 것이며 늙지 않는 것이며 근심이 없는 것이며 어렵지 않는 것이며 죽지 않는 것이며 또한 더 위없는 안온함이라고 하였다. 중아함경이 표현한대로 하면 불명의 생명과 무한한 평화를 지닌 것이 열반이 된다. 무수한 생명의 실상이며 무량한 광명의 현실이다. 이것은 깨달음의 영원성을 의미하고 깨달음의 본질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열반을 증득하고 수용하려고 사람들은 불교를 신앙하고 수행의 질을 닦는 것이다. 그러면 무병 무사 하는 열반은 어떻게 구할 것인가 마음을 비우는 길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 등 일체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것이다. 3독의 씨알이 완전하게 소진되어버린 상태 청정한 마음 바탕으로 새롭게 형성되는 찰라 열반은 찾아오는 것이다. 열반이 찾아오는 시간은 찰라지만 번뇌가 차지하는 시간은 영원하다. 완전하게 청정하지 아니하면 열반은 안주(安住)할 수 없으므로 열반은 오는 듯 사라지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청정 순화되지 아니하면 열반은 우리 마음에 자리하지 않는다.
  우리들 인간은 순수한 마음을 항상 오장(五障) 오개(五蓋)로 뒤덮고 있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장애가 한발 짝도 옮기지 않는 한 순수한 마음으로 변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이 다섯 가지 장애는 왜 떠나지 않는가. 이것은 마음의 그림자를 먹고 사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이 꿈은 밤낮으로 마음의 뒷자리에 앉아서 욕망과 애정을 키우는 작업을 쉬지 않는다. 이 허망한 꿈을 소멸시키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허욕에 뒤엉킨 마음을 달래는 수행의 길인 것이다. 수행의 힘으로 번뇌가 멸진된 상태를 아라한(阿羅漢)이라고 한다.

ꊲ 아라한과와 열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열반을 얻은 상태 마음의 일대변혁이 일어난 것을 아라한이라고 한다. 아집·아만이 사라지고 완전한 행위가 성취된 것을 아라한 이라고 한다. 아만·아집은 3독으로 형성되는 번뇌이며 괴로움이다. 그러나 인간은 3독이 많으면 많을수록 경제적 부유가 정신적 평정을 누릴 것이라고 착각하였다. 무욕이 행복의 길 청빈이 편안의 길이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욕망이 없으면 생의 의욕을 상실하는 것이며 청빈은 굶주림의 길이라고 계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욕과 청빈이 행복과 편안을 안겨주는 것은 사실인 것이다. 아라한이 증득한 것은 무소유(無所有)의 진리인 것이다. 우리는 아라한이 증득한 열반이 무엇인가 살펴보자.
  八楞伽經에서 부처님이 대혜에게 설명하신 「열반이란 가짐도 아니요 버림도 아니요 이곳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요 단절도 아니요 영원도 아니요 한뜻도 아니요 여러 가지 뜻도 아님이니 그러므로 이름 하여 열반이라 한다. 성문의 열반은 자상(自相)과 동상(同相)을 관찰하여 모든 법을 깨친 까닭으로 성문열반이라 하고 벽지불의 열반은 소란을 즐기지 아니하고 모든 경계의 무상(無常) 무락(無樂) 무아(無我) 무정(無淨)을 보고 전도된 모습을 내지 아니하므로 성문과 벽지불을 구경이 아닌 곳에서 열반의 생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므로 열반은 현 실태에서 가능한 열반과 이상적인 세계에서 이룩되는 열반이 있다. 전자를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무영열반(無餘涅槃)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아함경에서는 「비구들이여! 두 가지의 열반계가 있으니 무엇인가? 유여(有餘)열반계와 무여(無餘)열반계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한 「응공자」인 비구가 있어 이미 누(漏)가 다 하고 범행에 주하며 할 일을 이미 판단하고 무거운 집을 벗고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유결(有結)을 다하고 바른 지혜에 의하여 해탈하였다 하자. 그러면 그의 5근(根)은 안립(安立)하여 상(傷)함이 없으므로 기쁨 기쁘지 않음을 경험하고 즐거움과 고통을 느낀다. 그는 탐심 진심 치심을 멸한 자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유여열반계」라 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여열반계란 무엇인가? 여기 한 「응공자」인 비구가 있어 이미 누(漏)가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섰으며 할 바의 일을 이미 판단하여 무거운 짐을 벗고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유결이 다 하고 바른 지혜에 의하여 해탈하였다 하자. 비구들이여 그는 지각(知覺)하는 모든 것은 기뻐하지 않고 청량하여 적정(寂靜)하니라.
  비구들이여 이를 「무여 열반계」라 한다.」
  아라한을 증득하였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열반을 성취한 것이다.
  잡아함경 26권에서는 「탐욕을 떠난 자는 마음이 해탈한 것이며 무명을 떠난 사람은 지혜가 해탈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열반의 의미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의 해탈(慧解脫)을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할 수 있는 일체의 사유·번민·애정·애정·애욕·원증 등의 심리적 작용이 순일한 바탕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일심으로 정립되지 아니한 마음은 일체의 모든 일심으로 정립되지 아니한 마음은 일체의 모든 사상(事象)을 투영하여 번뇌로서 행동을 일삼게 된다. 이러한 번뇌작용이 인간의 실생활에 청정한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해탈을 열반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한 것이다. 또한 지혜의 해탈 이것은 바른 앎 바른 견해를 일깨는 선험적 밝음을 지혜라도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은 지각작용에 의한 대상의 구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밑바닥까지 환히 들여다보는 지혜의 눈은 아직 갖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 안다고 하는 것도 편견적 지해(知解)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편견적 요별의식(了別意識)은 깨달음의 길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의 현물적 존재만을 파악하는 분별적인 지식인 것이다. 이러한 분별적인 지식은 본체를 정견(正見)하는 반야지(般若智)가 생출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혜해탈(慧解脫)이라고 하는 분별지·요별지 등의 지말적인 지식을 초월하여 관조 발현하는 지혜가 나타나야 함을 말한다.
  부처님이 열반을 증득하였거나 아라한이 열반을 증득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증득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무상정등정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열반이란 해탈이며 해탈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뜻으로 부처님께서 성도의 사자후를 외칠 때 「나는 일체를 이긴 사람이며 나는 일체를 아는 것이며 또한 일체 법에 물들지 않는 것이며 또한 일체 법에 물들지 않는 것이며 모든 것을 버렸고 애욕을 다한 해탈을 성취한 것이다.」고 한 것이다.
  열반의 논리는 해탈의 본체를 뜻하는 것이다. 열반 거기에는 티끌보다 작은 걸림이 있으면 열반은 부정된다.
  그러므로 열반은 마음과 지혜의 해탈을 의미한다고 하엿다.

ꊳ 열반의 논리

  이와 같이 열반이 해탈의 논리를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유일무이한 자각적 본질인 연기(緣起)에서부터 기인하지 아니할 수 없다. 상대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무아(無我)의 실상에 안립할 수 있는 것은 연기의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대적이고 하는 것은 무한수의 대상이 연관할 수 있다. 개체적 존재의 무한성은 모두가 상대성의 존재로 현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수한 상대를 서로 어긋나지 않고 또한 괴로움을 주지 않고 번거롭지 않고 바르게 존재하게 하는 연기의 진리를 증득하며 마음이 자유롭고 지혜가 해탈한 그것이 열반인 것이다. 이러한 열반을 증득하면 반열반에 들더라도 그것은 바른 열반이라고 말씀하겠다. 즉 「어느 때에 불타께서는 묘당(妙幢) 보살과 및 모든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반열반에 사리(舍利)가 있다 함은 이 비밀한 뜻을 설한 것이니 이와 같은 의취를 1심으로 들을 지니라.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알지니라. 열 가지 법이 있어서 여래·응공·정등각자의 이취(異趣)를 알아 구경 대열반이 있음을 설하노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1) 제불 여래가 구경으로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所知障)을 다 끊었으므로 열반이라 하고 (2) 제불 여래는 능히 유정(有情)의 무성(無性)과 법의 무성을 알았으므로 열반이요 (3) 능히 신의(身儀)와 법의(法依)를 전(轉)하므로 열반이요 (4) 모든 유정에서 뜻대로 교화의 인연을 쉬므로 열반이요 (5) 진실하여 차별사이 없는 평등 법신을 증득하였으므로 열반이여 (6) 생사와 열반에 두 가지의 성질이 없음을 요달했으므로 열반이요 (7) 일체법에서 그 근본을 요달하여 청정함을 깨달았으므로 열반이요 (8) 일체 법이 생(生)도 없고 멸도 없음에서 수행을 잘하므로 열반이요 (9) 진여(眞如)법계 실제평등에서 바른 지혜를 얻었으므로 열반이요 (10) 모든 법성과 및 열반성에서 차별이 없음을 얻었으므로 열반이니라.」
  이와 같이 열반의 무한한 포괄성은 어디에 비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교설을 함축성 있게 법수항목으로 해의할 때도 삼법인·사법인 만이 法印이라고 한 것은 중요한 것이다. 다른 법수는 그 개념에 부합한 의미를 부여하였지만 一切行無常·一切法無我· 涅槃寂靜이라고 하는가 하면 一切行無常·一切行苦·一切行無我·滅盡爲涅槃이라 하였다. 불교최고 수행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무상을 절감하는 것 그 무상은 무아임으로 기인한 것을 알고 본래의 마음· 본래의 현상은 무구의 작위(作爲) 누구의 지시도 아닌 법이자연(法而自然)인 것이다 스스로 연기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우주의 본질을 실상으로 관조하고 철견하는 그 자리가 열반으로 구원이다. 그 구원과 해탈은 연기법의 진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法印인 涅槃이 모든 것을 멸진·소명하는 寂靜의 세계임을 확신 하는 데서부터 마음과 지혜가 해탈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