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논단] 상담과 포교

2009-04-14     이영자

  1, 상담(相談)과 자기실현(自己實現)

  인간인 우리가 살아가는데 궁극목적은 자기실현(自己實現)(Self-realization)이다. 자기완성(自己完成), 자기발견(自己發見), 참사람(眞人), 참나(眞我)의 실현(實現)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위스의 정신분석의(精神分析醫)인 융(C.G. Jung)과 미국의 상담심리학자(相談心理學者) 로저스(C.R. Rogers)같은 이들은, 이 자기실현(自己實現)을 우리 인간의 최고 목표임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서양학자들이다. 비록 이 목적을 참으로 달성한 사람이 인류사상 그렇게 많은 숫자는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성실하게 정진할 때, 필연코 어느 날인가는 성취할 수 있는 길임에 틀림없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상담(相談 Coenseling)의 목적(目的)은 이 <참자기>의 실현에 있다. 그러나 흔히 오늘의 상담은 사회적응문제에 중점을 두는 일이 지배적이다. 정신과의(精神科醫), 심리학자, 사회봉사가 그 외의 많은 카운슬러들은 어떻게 그 사람이 속하고 있는 사회에 잘 적응하는 생활을 원조(援助)해 줄까하는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카운슬링의 정의를 내릴 때, 가령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에 잘 적응을 못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를 가진 그 개인을 전문적(專門的)인 훈련(訓練)을 받은 조력자(助力者 Counselor)가 면접(面接)(상담(相談))을 통하여, 특히 말 즉 언어(言語)수단(手段)을 가지고 심리적(心理的) 영향(影響)을 끼치면서, 그 적응문제(適應問題)를 도와주는 과정(科程)(관계(關係))이라고 규정한다. 가령 또 어떤 고혈압(高血壓)환자인 직장인(職長人)이 있으면, 카운슬러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내적생활(內的生活)에 잘 들어맞도록 조력(助力)해 준다. 그 결과로 고혈압(高血壓)이 악화(惡化)될 필연성(必然性)이 없어지고 그는 자기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또 가령 언제나 경제적(經濟的) 곤란(困難)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自己)를 시정(是正)하기 위하여 자기 속에 있는 혹은 그의 과거의 경력이 곤궁(困窮)으로 몰아넣은 무슨 원인이 있는가를 알아내야 한다. 여기서는 어떤 사회(社會)가 원인(原因)이 된다고 하지 않는다. 원인(原因)을 사회(社會)에 돌리는 것은 진실(眞實)한 문제(問題)를 은폐하려는 것이 된다. 결국 원인은 자기개인(自己個人)에게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것을 제거(除去)해야 하고 카운슬러는 그것을 돕는 조력자(助力者)로서 전문적(專門的) 기술방법(技術方法)이 필요(必要)하기 때문에 그는 기술자(Technician)다.
  그러나 또한 인간(人間)의 보다 깊은 자기통찰(自己洞察)에 까지 이끌고 가고, 그 개인(個人)의 문제내용(問題內容)이 항상 특색(特色)있는 본질적(本質的) 문제(問題)일 수 있으므로 예술가(藝術家 Artist)라고도 한다.

  2, 상담(相談)과 종교교육(宗敎敎育)

  종교교육(宗敎敎育)이란 특정종교(特定宗敎)의 교파(敎派)에서 개인(個人)이나 단체(單體)가 그 신앙(信仰)이나 교리(敎理), 그리고 가치관(價値觀)을 포교(布敎)하고 보급(普及)하기 위한 방법(方法)으로서 유아(幼兒), 아동(兒童), 청년(靑年), 성인(成人)들에게 실시함을 말한다. 본래 목적이 포교(布敎)이므로, 그 종교(宗敎)에 귀의(歸依), 회심(回心)(入信), 혹은 종교적(宗敎的) 정조(情操 sentiment)가 성장(成長)하기를 기대(期待)함은 물론이다.
  한 종교(宗敎)에 국집(局執)하여 다른 종교(宗敎)를 비난, 공격하고 편견을 조장(助長)하지 않는 한(限), 종교교육(宗敎敎育)은 성장(成長)하는 개인(個人)에게 불안정(不安定)한 자아(自我)의 내면적(內面的) 통합(統合), 조화(調和), 안정(安定)을 얻는 방향(方向)으로 이끄는 바람직한 것이다. 종교심리학자(宗敎心理學者) 올포오트(G.W.Allport)는 이 종교교육의 효과(效果)를 그 가르치는 내용(內容)보다 가르치는 사람의 성실(誠實)한 태도(態度)를 보다 중요시(重要視)한다.
  인성(人性 personality)의 형성(形成)에 미치는 교육적(敎育的) 기능(機能)이란 관점(觀點)에서 보면, 종교교육은 상담(相談)의 목표와 실천(實踐)의 방향(方向)과 공통(共通)된 과제(課題)를 가진다. 물론 이 교육(敎育)이 개인(個人)에게 미치는 것과 상담(相談)이 주는 것은, 둘 사이에 근본적(根本的)인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가지 모두 개인(個人)의 인성(人性)에 있어 통합성(統合性)이나, 깊은 수준에의 자기이해(自己理解), 그리고 자기실현(自己實現)을 원망(願望)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리고 한 개인(個人)이 종교교육(宗敎敎育) 혹은 종교체험(宗敎體驗)을 통하여 체득(體得)하는 지도자(地高者)에의 신뢰관계(信賴關係)가 다른 사람과 새로운 관계(關係)를 맺는데 기초(基礎)가 되는 것처럼, 상담(相談)을 통하여 카운슬러와의 사이에 맺어지는 신뢰관계(信賴關係)가 개인(個人)이 다른 사람과 새로운 관계(關係)를 만드는데 커다란 역할(役割)을 한다.
  실존주의적(實存主義的) 입장(立場)에 있는 상담자(相談者)의 사상적(思想的) 기초(基礎)가 되어주는 부우버(Martin Baber)의 만남의 철학(哲學)은 이 관계(關係)의 의미(意味)를 더욱 심화(深化) 시킨다. 그에 의하면 『나와 너의 만남』이란, 인간(人間)과 세계(世界)의 관계(關係)에는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의 두개의 관계(關係)가 있는데 전자(前者)에만 <만남>이 가능(可能)하고 인생(人生)의 의미(意味)가 있다고 한다. <나와 너>는 나의 전존재(全存在)를 넣어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관계(關係)이다. 나와 그것은 나의 일부(一部)가 대상(對象)을 경험(經驗)하고 이용(利用)하는 관계(關係)이다.
  <나>, <너>, <그것>이라는 대상(對象)의 성질(性質)에 의해 정하여지는게 아니고, 그 대상(對象)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나>가 전존재(全存在)가 되어 <너>라고 부르는 것이 <만남>인 것이다. 이 관계(關係)는 상호적(相互的)이고, <내가 너>를 살림과 동시에 <나>가 또한 <너>에 의해 살려진다. 이 철학(哲學)은 불교(佛敎)의 연기설(緣起說)인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이며 또한 이사(理事), 사사무애(事事無?)의 연기(緣起)와 일치(一致)하지는 않으나 비교(比較)될 수는 있다.
  상담(相談)에서의 신뢰관계(信賴關係), 종교교육(宗敎敎育)에서의 신뢰관계(信賴關係)는 어느면(面)에서 불교(佛敎)의 중생(衆生)과 불(佛)과 심(心)의 상호관계(相互關係)와도 회통(會通)시킬 수 있다고 생각된다.

  3, 목회상담(牧會相談)과 상담불교(相談佛敎)

  기독교 교리(敎理)에서는 상담(相談)이 목사(牧師)의 전체업무(全體業務)의 일부분(一部分)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는 인간(人間)의 본성(本性)에 대한 견해(見解)가 다르기 때문에 실제적 카운슬링 활동(活動)을 스스로 제약(制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회(牧會)카운슬링이란 목회활동(牧會活動)으로서의 설교(說敎)의 보조수단(補助手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카운슬링에 대한 열의(熱意)는 강렬(强烈)하다. 어느 종교(宗敎)보다 기독교는 적극적(積極的)인 관심(關心)을 표시(表示)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에 주목(注目)해야 하리라 믿는다.
  상담활동(相談活動)이란 자기(自己)의 길을 스스로 발견(發見)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인데 반(反)하여, 목회(牧會)카운슬링이란, 길잃은 양을 인도하는 임무(任務)와 책임(責任)에서 비롯되고 있다.
  열의(熱意)있는 목회상담활동(牧會相談活動)이란 이런 데서 연유하는 듯하다. 그러나 카운슬링과 그 목적(目的)이 유사(類似)한 불교(佛敎)는 보조수단(補助手段)으로서 이 활동(活動)을 전개(展開)시켜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지혜(智慧)있는 보살(菩薩)의 서원(誓願)과 자비방편(慈悲方便)으로서 그 주요(主要)한 포교방법(布敎方法)으로 과감하게 도입(導入)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점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고, 이미 불교계(佛敎界) 일우(一隅)에서 일고있는 자각(自覺)인 줄 믿고 싶다.
  불타(佛陀) 정각후(正覺後), 오비구(五比丘)에게 설법(說法)을 시작한 그 포교선언후(布敎宣言後) 49년간(年間)의 포교활동(布敎活動)은 각자(覺者)로서 베푼 자비정신(慈悲精神)에서 나온 상담활동(相談活動)이라고 믿고 싶다.
  이 불타(佛陀)의 설법양식(說法樣式)은 응기설법(應機說法)이다. 다시 말하면, 응병여약(應病與藥)으로서 병(病)에 따라 약(藥)을 지어주는 것이고, 결국 스스로 그 능력(能力)과 상황(狀況)에 따라 받아드리는 것이다.
  이는 상담활동(相談活動)에 그대로 귀일(歸一)된다고 생각한다.
  이 자비정신(慈悲精神)은 대승보살(大乘菩薩)의 서원(誓願)과도 상통(相通)한다. 즉(卽)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라는 우리 모두의 사명의식(使命意識)에 관련된다.
  더불어 서원(誓願)과 동시(同時)에 실천(實踐)하여야 할 과제(課題)는 자기실현(自己實現)을 위한 번뇌(煩惱)끊기를 원(願)하는 정진자(精進者)여야 한다. 부단한 정진(精進)이 이어질 때, 그 마음은 안정(安定)을 찾고 적정(寂靜)의 세계(世界)가 전개(展開)된다.

  4, 상담불교(相談佛敎)의 실천(實踐)

  상담불교(相談佛敎) 혹은 불교(佛敎)카운슬링 등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상담(相談)의 실천(實踐)은 어느 정도(程度) 이루어지고 있을까. 그 현재(現在)와 미래(未來)의 전망(展望)을 그려보고져 한다. 이 상담불교(相談佛敎)는 특(特)히 그 실천문제(實踐問題)는 아직도 한국불교계(韓國佛敎界)에는 미지수적(未知數的)인 과제(課題)로서 우리에게 제기(提起)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상담활동(相談活動)과 포교(布敎)와 관련된 사례(事例)는 현재(現在)로서는 자료(資料)로서 제시(提示)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다만 학교상담실(學校相談室)을 찾는 내담학생(來談學生)들의 현황(現況)을 참고(參考)로 하여보면, 경제문제(經濟問題), 가족관계(家族關係), 우정(友情)(異性), 신앙문제(信仰問題) 그리고 학교(學校)에의 적응(適應), 그리고 학사(學事), 병역(兵役) 등 다양(多樣)하다.
  신청서(申請書)에 보이는 영역(領域)은 학사(學事)같은 것이 가장 많은 숫자로 나타나지만, 실제 내용(內容)에 있어서는 지졸(至拙)히 중요한 가치관(價値觀)이든가, 신앙(信仰)등의 문제로 이행(移行)된다.
  그 이유(理由)는 여러가지로 분석(分析)될 수 있겠으나, 우선 상담실(相談室)에 출입(出入)함으로써 문제시(問題視) 당(當)하는 주위의 눈을 두려워하는데서 오는 현상이다. 일종(一種)의 자기방어기제(自己防禦機制)라고 보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카운슬러와 신뢰관계(信賴關係)가 성립(成立)된 후에는 자기(自己)의 내부(內部) 깊숙한 곳에 숨겨진 문제들이 하나씩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問題點)은 우리 학교(學校)에서 뿐 아니라 일반(一般) 상담실(相談室)에도 있을 수 있는 예(例)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면(面)에서 관찰할 때 많은 고민(苦憫)하는 개인(個人)에게 상담의욕(相談意欲)을 환기시킬 수 있도록 보다 많은 상담실(相談室)이 그 형식(形式)에 관계(關係)없이 개설(開設)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오늘 우리 사회(社會)를 풍미하고 있는 유사종교(類似宗敎)나 신흥종교(新興宗敎)의 세력이 해마다 그 수가 감소되기보다는 오히려 증가(增加)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기성교단(旣成敎團)의 문(門)이 보다 건실한 신앙신도(信仰信徒)에게 개방(開放)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함은 잘못된 생각일까.
  현재 우리나라에서 상담실(相談室)을 설치(設置)하고 상담활동(相談活動)을 전개(展開)하는 사원(寺院)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調査)해 본 일은 없으나 아직도 아마 미개척분야(未開拓分野)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불교(佛敎)는 그 교리자체(敎理自體)가 본래(本來)대로 상담적(相談的)인 형식내용이다.
  또한 현대(現代)는 역시 현대인(現代人)이 살고 있는 시대(時代)이다. 현대인에게 맞는 의상(衣裳)이 필요하다.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변화(變化)하여 그 시대적(時代的) 구분(區分)마저 짓기 곤란한 급격한 사회(社會)변동 속에서, 일어나는 의식구조(意識構造)의, 그리고 상황(狀況)의 변화(變化)때문에 그대로 가치관(價値觀)이 전도(顚倒)된 현상(現象)이다. 이에 따른 인간(人間)의 불안(不安)은 측정(測定)할 수 없을 정도로 고조(高潮)되고 또한 이에 적응(適應)해 가기란 심각한 어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불교계(佛敎界)는, 사원중심(寺院中心)으로 우선 상담실(相談室)을 개설(開設)하여야 할 긴급(緊急)한 과제(課題)를 하루 빨리 해결(解決)하여야 하리라고 믿는다.
  심리학적(心理學的)인 기술습득(技術習得)의 전문가(專門家)는 보다 바람직하지만, 불교교리(佛敎敎理)의 면(面)에 서서 하는 상담활동(相談活動)도 불가능(不可能)하지 않다고 본다. 결국 말을 강가에 끌고는 가지만 물을 마시는 것은 그 말이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