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스님과 일천(一千) 성인의 수행처 ㅡ천성산 내원사 계곡

바라밀 국토를 찾아서/양산군 지역

2009-04-11     관리자
▲ 내원사 계곡. 기암괴석과 수량이 많은 계곡물이 어울러져 절경을 이룬다

양산을 가면 으레 들르게 되는 곳이 통도사다. 영취산 기슭에 자리잡은 적멸보궁 통도사는 굳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 나라 이 겨레 불자들에게는 가장 존엄한 성지이고, 가장 가까이서 부처님께 예경올릴 수 있는 불보종찰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근래에는 우리 불교의 최고 어른이 종정 스님까지 주석하시게 되었으니 통도사의 영화(榮華)는 영산회상에 우담발화의 꽃비가 내리는 듯하다.

 통도사는 또한 수많은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절 안의 모든 건축물들이 고색창연한 모습 그대로, 사람의 작은 손때도 허용치 않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고 있다. 적멸보궁, 개산조당, 대광명전, 극락전, 명부전, 영산전, 약사전, 응진전, 용화전 등 부속암자를 제외한 상, 중, 하로전(上, 中, 下爐殿)의 전각만도 여남은은 더 되는데 이 전각들마다 공양시간이 되면 각각 독경소리가 울려나온다. 관광객의 소음이 끊이지 않는 이곳임을 고려해볼 때 이 장면은 웬만한 절 아침예불 소리에 비할 만큼 장엄하다.

▲ 통도사 금강계단
▲ 적멸보궁 계단 소맷돌. 화사한 연화문양이 신라인의 미소를 보는 듯하다

 하지만 통도사의 건축물들은 우리나라 거의 모든 절집들이 그랬듯이 임진왜란 당시 전소되었다가 영, 정조 연간에 다시 지어진 것들이다. 그보다 전 시대인 고려나 신라인들의 불심의 향기를 맡으려면 석조물들을 눈여겨 보면 된다. 금강계단의 석종형 부도와 여러 장식들, 그리고 3층 석탑과 배례석, 봉발탑, 석등 같은 것들이 고려 선종 때의 중수로 집중적으로 지어졌던 흔적이다. 여기에 적멸보궁의 기단부를 빙둘러서 연화문이 돌출되어 새겨졌고 층계의 소맷돌에도 뛰어난 솜씨의 연꽃문양이 보이는데 기단부 자체가 창건 당시의 것으로 여겨지니 이 연화문도 또한 창건 당시인 신라의 것으로 여겨진다. 

통도사는 산내의 암자들도 찾아 가볼만한 곳이 많다. 경봉 스님이 주석했던 극락암에서는 현판 글씨들이 눈여겨 볼 만하고, 그림으로 유명한 수안 스님의 축서암, 산내 암자 중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관음암 등도 가볼 만하다.

▲ 통도사 국장생석표. 이두문으로 고려 선종 당시의 통도사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통도사는 고려시대에 제일 번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 선종 당시에 통도사의 경계를 나라에서 정해주어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세우기도 했다. 이 국장생석표는 부산으로 가는 국도변에 세워져 있는데 동리마다 입구에 서있는 장승은 아직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나라에서 세워준 국장생은 이곳 통도사를 포함하여 두세 군데밖에 남아있지 않다.

 아직은 동장군이 물러가지 않은 탓에 바다가 가까운 이곳 양산은 바람이 쌀쌀했다. 통도사를 찾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어서 통도사는 말타고 산 보듯 지나치고 부산 가는 국도를 따라 십리 가량 내려오니 경부고속도로 훌쩍 넘어가는 좁은 고가도로가 보였다. 고가도로를 지나면 여기서부터가 원효 스님에 얽힌 재미있는 얘기가 「송고승전(宋高僧傳)」을 통해 전해온다.

 원효 스님이 이곳 양산의 척판암이라는 곳에서 수행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중국하늘을 바라보니 당나라 태화사(일설에는 산동성 법운사라고도 함)의 천여 명의 신도들이 산이 무너져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원효 스님은 판자에 효척판구중(曉擲板求衆) 이라고 써서 그곳으로 날려 보냈는데 판자는 날아가서 떨어지지 않고 법당 위를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그곳 대중들은 이상하게 여기고 모두 구경하러 밖으로 나오자 이윽고 사태에 산이 무너져서 법당을 덮쳐버렸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 인연으로 당나라 승려 천 명이 신라로 찾아와 원효 스님을 스승으로 삼고 제자가 되었는데 이들 천여 명이 한꺼번에 마땅히 머무를 곳이 없었다. 그러자 원효 스님은 수도처를 찾아 지금의 내원사 계곡으로 들어가다가 마침 마중 나온 산신을 만난다. 산신은 원효 스님을 안내하다가 지금의 산령각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계곡 안에 대둔사를 창건하고 내원암을 비롯한 89개의 암자를 세워 천 명의 중국 승려가 머물게 하고 천성산 상봉에서 화엄경을 강설하여 천 명의 승려를 모두 오도케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산이름도 천 명의 성인이 탄생했다 해서 천성산(千聖山)으로 바뀌고 화엄경을 설했던 자리를 화엄벌이라고 부른다. 또한 화엄벌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산은 원효산이요 그 산에 자리한 암자가 원효암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당시의 신라인들의 문화적 자부심과 원효 스님에 대한 긍지가 무르녹아 있는 일화라 하겠다.

 

▲ 천성산 내원사 전경. 비구니 스님의 수행처로 이름 높다

 

▲ 원효 스님을 인도한 산신이 없어진 자리에 산령각이 세워져 있다
▲ 원래 대둔사가 있던 자리에 최근 세워진 노적암

내원사는 창건 당시 상, 중, 하 내원암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뒤에 상, 중 내원암은 없어지고 하 내원암만 남아 현재의 내원사가 되었다. 또한 당시의 대둔사 자리에는 근래에 노적암이 새로 세워졌다. 89개의 암자 중에서 현재는 안적암, 원효암, 조계암, 성불암 등 열 개 남짓한 암자만이 남아 있다.

 내원사를 오르는 계곡은 협곡이다. 도무지 그 끝을 알 수가 없는 산굽이를 돌고 나면 턱 막힌 산이 또 가로 막는다. 산을 비껴 다시 오르는 길이 6km, 남녘의 가뭄 소식을 익히 듣고 갔지만 이 내원사 계곡에서는 흐르는 물소리가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절경에 가려 작게 얼굴만 드리민 하늘이 유난히도 좁아보인다. 여름이 아니라도 탁족(擢足) 하고픈 충동을 느낄 만치 계곡은 아름다웠다.

 백곰바위, 촛대바위라 불리는 기암괴석을 지나서 골짜기 끝나는 곳에 이르면 새로 불사해서 단정해보이는 내원사 지붕이 곱게 빗은 머리칼 같은 자태로 나타난다. 창건 당시의 하내원암이었던 곳에 조선시대 의천, 요운, 해령, 유성 스님들이 중간 중간 중수하였고, 구한말에는 혜월 스님께서 많은 선수행자를 배출하였다는 내원사. 그뒤 1955년에 수덕사의 수옥(守玉) 스님께서 한국전쟁 통에 소실된 건축들을 다시일으켜 세워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삼으면서 오늘의 청정한 비구니 선방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내원에는 속인의 수다를 범접도 못하게 하는 정적이 감돌고 비구니 스님들 특유의 깔끔이 대나무 울 엮은 솜씨에서, 가즈런한 흰고무신에서 조심스레 느껴진다. 이 내원사에는 전쟁통에 전소하는 바람에 그 전통에 값하는 문화유산은 없다. 하지만, 제작연대(1091년)와 제작자 그리고 사찰명 등이 명문(銘文)으로 새겨진 쇠북이 하나 있어서 서운함을 달랜다. 이 쇠북은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북 측면에 새겨진 명문 30자로 인하여 사료적인 가치가 뛰어나다.

 내원사 입구 주차장에서 오른 쪽으로 차가 다닐 만한 길을 따라가면 내원사를 찾기에 힘들지 않다. 또 그 바로 입구에 원효 스님을 안내했다는 산신을 모신 산령각이 있다.

 주차장에서 내원사 쪽의 차 길을 놔두고 직진하는 등산로가 있다. 안적암, 조계암 등의 산내암자로 오르는 길이다. 이길은 억지로 차로 가게 된다면 노적암까지만 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 승용차로는 어림도 없고 찦차도 내를 건너고 호박돌길을 지나면서 겨우겨우 가는 길이다. 안적암은 노적암에서는 산길 3km를 더 올라가야 한단다. 해가 지기를 두 시간 남짓 남겨두고 올라가 무조건 재워달라고 할 양으로 객기를 부려 보았지만 어둑어둑해지도록 안적암은 시야에 나와주지도 않았다. 안적암의 대웅전은 조선 초기의 양식을 아주 잘 보여주는 걸작이라는 얘기를 기왕 들었기에 덦이 아쉬운 하산행이었다.

 양산은 같은 시대 전혀 다른 기품을 보였던 두 큰스님의 유적이 있는 곳이다. 그 하나가 자장 율사의 통도사라고 한다면, 또 하나인 원효 대사의 행적은 내원사 계곡, 어느 한 절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 여기저기에 묻혀 있다. 한 분이 우리 불교의 계율을 정초(定礎)한 대율사라고 한다면 또 한 분은 무애행으로 저잣거리를 떠돌아다니며 민중 속의 불교를 뿌리내린 분이시다. 하지만 뉘라 이 두 분 스님의 행적을 서로 동떨어졌다고 할 것인가. 통도사의 정치(定置)와 내원사 계곡의 천연(天然)은 따로 떨어뜨릴 수 없는 양산이란 이름 하나로 남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