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보는 숭산 스님 행적 1

김나미가 만난 사람

2009-04-10     관리자

 

숭산 스님과 다이아나


앞으로 누가 대를 이어나갈 지는 미지수이나 현대 한국 불교사에서 숭산 스님만큼 해외에 한국 불교의 존재를 알린 스님도 없다. 종파를 크게 가르지 않는 미국 불교계에서 살펴보니 스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크게 미국인들에게 다가왔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대외적으로 관음선종 본사인 프로비던스 홍법원을 중심으로 동부와 동유럽 활동이 알려져 있지만 버클리를 중심으로 큰 바람을 일고 왔던 캘리포니아에서의 스님의 행적은 별로 소개되지 않았다.


버클리 무문선원

숭산 스님이 미국에 처음 발을 디딘 해는 1972년, 북가주에 오신 것은 1976년이었다. 북가주에서 스님은 히피들을 포함 당시 새 문화의 흐름을 따르던 대중들을 매료 시켰다. 스님이 당시 히피 문화가 크게 일었던 버클리에 나타나자 스님 앞으로, 뒤로, 곁으로 파란 눈의 추종자들이 모여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미국인 여성 불자의 헌신으로 버클리에 무문선원이 탄생했다.


  버클리 대학 북문 앞, 신학대학 언덕에 위치한 4층짜리 가정집이 첫 무문선원이었다. 그리고 이 집은 16년간 숭산 스님의 북가주 활동의 근거지이자 오시면 묶던 숙소이자 법회장소이기도 했다.


  다이아나 클라크(Diana Clark)할머니는 올해 74세, 삼십여 년 전 자신의 가정집을 스님의 법회장소로 내놓아 북가주에 무문선원을 탄생케 한 장본인이다.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태생으로 스님을 만날 당시 아이 셋을 둔 주부였으나, 스님을 만나 수행하며 스님을 시봉했고 대학원에 들어가 심리학을 전공했다. 그 배경으로 74세인 현재도 임상사회복지사이자 심리치료사로 활동 중이다.

  다이아나는 숭산 스님을 그림자처럼 따랐던 긴 세월을 모아 1987년 스님의 환갑 기념으로 그간의 모든 행적에 관한 사진과 기록을 담은 『60년 간의 only doing it』이라는 책을 편집 출간했다.


  30여 년에 걸친 캘리포니아에서 스님의 행적을 낱낱이 알고 있는 유일한 증인이기도한 다이아나에게 처음 어떻게 스님을 만났고, 버클리에 무문선원이 서기가지, 또 관음선종 문중의 교육담당을 맡았던 만큼 스님의 가르침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스님을 따라 한국 화계사에서 대중 생활도 했고 수덕사 견성암 에서 혼자 정진하기도 했다. 그 시절에 불교와 한국 문화 한글을 배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여전히 한국식으로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김치를 좋아하고, 입에선 자주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아침엔 사홍서원 과 함께 여전히 108배를 한다.

  

  그녀는 불교가 있는 한국문화 속에 살게 해 주신 스님과 한국에서의 몇몇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다며 간직했던 추억을 꺼내온다.


세상의 빛 숭산 스님과의 만남

다이아나는 처음 남편인 에즈라를 통해 숭산 스님을 만났다. 응급실 의사였던 남편이 30여 명의 의사들이 모여 몸과 마음을 다루는 총채적인 건강 워크샵에 갔다가 스님을 만났다


여기서 숭산 스님의 법문과 위이어 수련대회도 열렸고 그 끝에 참가자 전원 모두 오계를 받았는데 그대의 참가자들 법명이 모두 진으로 시작해 ‘진 가족(Jin family)’이라고 부른다

  남편의 부름으로 숭산 스님을 만난 다이아나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머리를 땅에 내리는 절이라는 점을 그 때 깨달았고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때처럼 108배를 한다.


  무엇보다도 다이아나에게 소중한 것은 스님의 가르침을 만나 당시 파국으로 치닫던 결혼생활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부부가 스님을 만난 다음 결혼에 새로운 방향이 생기자 용맹정진을 하며 참선으로 결혼생활을 다시 시작하자는 용기를 얻었다 한다.

  “워크샵에 갔던 남편에게 전화가 왔어요. 빨리 와서 굉장한 스님을 만나라고 하기에 당장 가서 스님을 만났지요. 그 날로부터 내 인생에 스님이 함께 하게 되었지요. 스님을 만나기 나의 영적인 스승은 목사님이셨는데 새로운 스승으로 스님을 만난 거예요. 사람의 인연이란 게 참 묘하죠.”


  이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스님은 다이아나에게는 없어서는 안되는 스승이었고 다이아나는 스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법회 담당 보좌관이자, 스님 이동에 있어 교통을 책임지는 운전수이자, 많은 편지의 회신을 맡은 비서이자, 해외여행 스케줄을 짜고 동행하는 총 책임자였다.


  “제가 스님의 해외에 관한 모든 행정을 맡았어요. 스님은 저를 매니저라고 불렀는데 1978년 4월에 스님의 첫 유럽방문을 실행에 옮기고 1884년까지 다녔지요. 당시만 해도 동유럽이 철의 장막 안에 있었는데 우리는 폴란드에 들어가 법회를 했고 폴란드 추종자들의 열기에 자주 갔지요.

  어떤 때는 우리의 용맹정진에 참가하려고 체코 사람들이 몰래 국경을 넘어 오기도 했어요. 당시 동유럽엔 음식이 귀한 때였는데도 당시 사람들이 암시장에서 음식을 구해와 나눠 먹으며 용맹정진을 좋아 했지요. 그들은 스님의 에너지를 좋아했어요. 그 때는 제가 흥법원의 교육담당이었는데 유럽, 중국, 남미까지 스님과 동행했습니다.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법회를 하고 선원을 열어 저도 일년간 거기서 살았습니다.“


  다이아나는 당시 10대 아이 셋을 둔 몸이었는데도 숭산 스님이 이 세상의 빛이란 것을 알았기에 다른 것을 다 접고 스님만을 따르기로 했었다 한다.

  스님이 이 세상을 향해 주는 게 있기에 당신은 참여만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아름다운 할머니, 숭산 스님과 함께 했던 30년 전이 여전히 오늘 같기만 한가 보다.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숭산 스님은 47년 마곡사에서 출가 득도, 49년 수덕사에서 고봉 선사를 법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화계사 주지, 불교 신문사 초대 사장, 조계종 비상종회의장, 조계종 원로의원, 화계사 조실 등을 역임하셨다. 특히 전 세계에 한국 불교를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치셨다. 한창 때는 1년에 지구를 두 바퀴나 돌기도 했으며, 2004년 세수 77세, 법랍 57 세로 입적하시기 전까지도 1년에 서너 차례씩 미국, 홍콩, 말레이시아, 유럽 등지의 해외선원을 순방하셨다. 살아 계실 때 달라이라마, 틱낫한 스님 등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3대 생불(生佛)중의 한 분으로 추앙받았다. 저서로는 ‘큰 스님과의 대화’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온 세상은 한 송이 꽃’ ‘천강에 비친 달’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