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산행

빛의샘 / 마음을 비운다는 것

2009-04-07     관리자

겨우내 신었던 닳은 털신에는 묵직한 진흙덩이가 묻어오르고 있었다.

응달진 산자락엔 아직도 하얀 잔설이 한여름의 이끼처럼 모여있다.

세상의 봄타령이 지난 한참 후에야 이곳 속리산엔 봄이 오고 햇살 바른 툇마루나 흙담밑 양지 고른 곳에 한동안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봄을 기다리기에 성급한 나는 사놓은지 한참되는 등산화를 내어 신고 산을 오른다.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오라고 하는 이도 없는 산을 오른다. 봄이 오면...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의 행렬속에서 가끔씩 나누는 인사의 반가움과 코끝은 스치는 진한 봄내음의 짜릿한 전율이 좋아서인지 모른다. 어쩌면 일상의 생활에서 잠시 벗어난 듯한 자유로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봄이면 나는 산을 오르고 그리고 그 감격과 여유를 즐긴다.

언제이던가.

보름달이 너무 좋아 도반과 둘이 문장대를 향해 밤길을 나섰다. 거뭇거뭇 나무그림자와 보들달의 교교함이 어우러지고 간간이 들려오는 밤새의 처량한 울음과 나무들 위로 스치는 바람소리, 그리고 우리들 발밑으로 깨어져 나오는 낙엽소리가 달밤 산행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온 달빛을 다 감싸안은 문장대에서 우리는 40대의 중년 부부를 만났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하산을 함께 했다. 불교신자인 남편과 기독교신자인 부인이라며 옅은 웃음으로 자기들을 소개한 부부는 우리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 부부는 비록 종교관은 다르지만 종교보다 더 돈독한 믿음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부부간의 믿음이지요. 우린 절대 서로 믿어주길 바라지 않아요. 그냥 믿을 뿐이에요. 이해해 주길 바라지도 않아요. 우리는 이미 이해하니까요. 결혼을 한 지 20년이 됐지만 우린 각자의 종교생활을 충실히 해왔어요. 그리고 그 가르침대로 열심히 살려고 애쓰고 있구요."

두 손을 꼭잡은 부부가 나에게 달빛에 실어 건네준 말이었다.

그들에겐 세상의 잡다한 욕심이 없었다. 휴일이면 틀림없이 함께 산을 오른다는 그들. 산에 올라 마음에 쌓인 먼지들을 툴툴 털어버리고 나면 세상이 온통 아름다워 보인다는 말이 나에게 와서 모두 흡수되고 있었다.

우리는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욱 더 많은 것을 상대방에게서 바라게 된다며 이해하기보단 이해해 주길 바라고, 용서하기보단 용서해 주길 바라며, 믿기보다는 믿어주길 바라는 우리의 이기심이 인간의 평화를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나는 그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불가에서 흔히 쓰는 '마음을 버린다'는 말도 이들처럼 가장 순수한 인간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순수인간성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태초의 청결한 마음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닦아내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바라는 마음보다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나?'하는 마음으로 우리 병들어가는 인간의 순수성을 회복할 때가 된 것 같다.

새벽예불 시간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부부를 보며 저들의 발원은 어떠한 발원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진지하게 합장을 한 모습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졌다.

저들의 발원은 저들만의 발원이 아니라 곧 우리 전체의 발원으로 승화될 수 있기를 나도 함께 합장발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