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연구] 2. 인간은 죽으면 그만인가

심령연구 / 연재 제2회

2009-04-03     관리자

이 글을 쓰는 것은 영계(靈界)를 규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일부 인사들의 흥미를 끌자는 것은 더욱이 아니다. 독자 여러분이「인간은 육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자는 것 뿐이다.

제3장 죽음과 그 전후 

   인간이 과연 육체 뿐인가. 그렇다면 육체적 죽음 다음에는 아무 의론이 나올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의 주변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허다한 사실들이 마치 현실적 사실처럼 벌어지고 있음은 어찌 할 것인가. 인간의 육체적 구조 외에 또 하나의 인간 구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인간의 육체 이외의 또 하나의 인간 구조에 관하여는 잠시 뒤로 미루겠다. 그보다 죽음을 전후한 인간 사정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 증언을 듣기로 한다.

     [1] 영혼의 포피(包被)와 사진
   사람의 죽음의 순간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는 사진과 영혼의 공술(供述)을 참고할 수 있다. 그 중 사진에 대하여 생각나는 것은 우선「프랑스」의「Baraduc」박사의 경우가 있다. 박사는 1907년 4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19세로 죽었다. 아들「안드레」는 박사와 함께 심령연구에 참여하여 깊은 애정으로 묶인 사이였다. 안드레가 죽은 후 박사와 대화를 하였다. 하지만 이는 환시(幻視)나 환청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험증으로써는 가치를 둘 수 없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바로 사진이다.
   박사는 안드레가 숨을 거둔 지 9시간 만에 시체를 담은 관을 사진 찍었다. 그랬더니 관에서는 형상이 희미한 안개 같은 덩어리가 사면팔방으로 발산하여 관에 접근하고 있는 사람에게 충돌하고 있는 모양이 나타났다. 이 사진에 흥미를 가진 박사는 그 후 그의 처가 죽었을 때 결정적 실험을 하였다.
   박사는 처가 죽자 미리 준비해둔 사진기로 10분 또는 한 시간 간격으로 수차 사진을 찍었다. 그랬더니 시체에서는 처음 세 개의 빛나는 가스덩어리 모양이 시체 위에 떠있었고 거기에 가는 끈 모양의 빛이 있어 사방으로 방사되고 있었다. 이 빛은 점점 확대되어 가스 모양의 광구(光球)가 응집하여 죽은 이의 머리 위를 덮는 듯 하더니 마침내는 하나로 뭉쳐진 가스 모양의 광구는 반짝이는 영선(靈線)에 쌓여 시체 위에 떠있었다. 얼마 후 이 가스구(球)는 없어졌지만 박사는 수일 후 영력자(靈力者)의 힘을 빌어 자동서기(自動書記)로 부인과 통신할 수 있었다. 그에 의하면 저 번쩍이던 가스구는 박사 부인의 영혼의 포피(包被)이고 영혼은 그 속에서 살아 활동하다가 점차 포피를 둘러싸고 있는 영선이 끊어져서 유체(幽體)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체는 생전의 모습과 똑같다고 한다. 이점은 영안(靈眼)이 있는 자의 실견담(實見談)도 있어 그 이론적 근거는 차치하고라도 하나의 사실로써 일단은 긍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이에 대하여는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2] 죽는 찰나의 정황
   사후 영혼의 공술이나 혹은 죽는 순간의 사진으로 미루어 보아 사자(死者)의 영혼은 죽는 순간부터 점점 그 육체에서 빠져 나와 어떤 가스 모양의 실체를 갖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죽음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영적 투시력을 가진 자의 진술이 더욱 실감을 더해 주고 있다.
   다음은 1910년에 죽은 미국의 한 영매(靈媒)의 진술을 소개하기로 한다. 그는 생전에 높은 의학지식과 교양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한번은 60세 가량의 노파가 죽는 현장에서 투시하였다. 그에 의하면 환자의 머리 주위에 밝은 분위기가 모여 들더니 그것이 가스 모양이 되어 머리가 생기고 그 모양이 점점 뚜렷해졌다. 그러다가 가스 모양의 형상이 응결하면서 빛나는 분위기는 사라져갔다. 그때 그의 투시력으로 심령현상을 관찰하니 그 실내에 있는 사람들은 육안에 비치는 대로 임종의 고통과 비탄을 보았지만 실로는 이것이 오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들 고통이나 비통은 모두가 영적 이지체(理智體)가 육체에서 벗어나는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에서 벗어난 이지체, 즉 영혼은 시체의 목 부분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래서 그는 죽음이란 영혼의 재생에 불과하며 영혼은 죽음을 통하여 하급에서 상급으로 향상하는 것이라 믿고 있다. 그의 진술을 좀 더 인용해 보겠다.

  「실제로 영혼이 타계에 태어난다는 것은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과 흡사하다. 탯줄에 해당하는 영선(靈線)조차도 완비하고 있는 것이다.
   영선은 잠시 영체와 육체를 연락하고 있는 듯 하였다. 그때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영육(靈肉)을 이어온 영선이 끊기자 영적 유동체의 극소 부분이 육체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되돌아간 영적 유동체는 아마도 시체의 각부에 침투하여 잠시 동안 시체의 부패와 분해를 방지하자는 듯이 생각된다.
   한편 시체에서 벗어난 유동질(流動質)로 새로이 만들어진 유기체의 모양은 대체로 육체의 모양과 비슷하였다. 이 영혼체의 내면적 심리상태가 어떤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으나 그 태도에서 느끼는 것은 시체 주위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상심하는 것 같지 않았고 오히려 의외인 듯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이 사실의 진상에 대하여 무지한 것을 불쌍히 여기는 듯이 보였다.」

  
    이상 영력자의 투시를 반드시 신빙성이 있다고는 말할 수는 없어도 위의 기술과 같은 정평있는 투시가의 증언을 결코 무가치하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대개의 관찰소견이 대체로 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3] 죽었다 소생한 자의 체험
   위에서는 죽음 전후 상황에 대하여 밖에서 사진을 찍거나 영력자의 투시에서 나타난 영혼의 외모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여기서는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소생한 자의 체험을 보기로 한다. 죽었다 소생한 체험은 여러 가지가 있다. 사고로 급사하거나 혹은 전염병으로 잠시 앓다 죽었거나 어떤 사연으로든지 죽었다가 다시 소생한 자의 증언을 분류해 보면 대체로 두 가지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는 육체를 이탈할 때 즉 숨을 거둘 때 혼 자신은 큰 고통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을 수 없는 격심한 고통은 혼수상태에 빠지게 됨으로 이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점은 전기쇼크사(感電死)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격심한 고통을 동반한 중병사의 경우에도 대체로 같다. 그리고 소생의 과정이 대체로 비슷하다. 저승에서 일단 거부되어 되돌아 오거나 소원이 이뤄져 다시 회송하는 경우다. 이들은 대개가 일단 저승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패턴을 갖기 마련인데 이점은 동서고금의 기록이 일치한다.(이점은 소생자에 한한 말이다.)
   이하는 미국 의사「일쓰에」박사의 경험담이다.

  「나의 의식은 쇠퇴하고 음성은 약해져 일반적으로 무거운 것을 느꼈다. 손과 발을 펼쳐 보려고 있는 힘을 다해 보았으나 결국 두 손을 가슴 위에 가져오고는 그만 무의식에 빠졌다.
   그때 간병하고 있던「레인스」박사가 나의 얼굴을 보고 실낱 같은 호흡이 남아 있는 듯하여 전신을 바늘로 찔러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고 한다. 사실 나는 그때 무의식 상태에서 아무런 사고력도 감각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존재 의식에 돌아왔다. 나는 그때 아직도 육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육체와 나와는 아무 관계 없는 듯이 생각되었다.
   나는 혼이 육체에서 떠나는 상태를 주의 깊게 보려고 생각하였다. 그때 나의 내부에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어떤 힘이 나의 전(全) 자아를 뒤흔들었다. 그 모양은 마치 육체의 바구니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리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이 동요가 있은 다음에 나의 두 발바닥의 엄지 발가락과 뒤꿈치 사이에서 몇 줄기 가느다란 실이 짜릿짜릿 떨리는 것을 느꼈고 어쩌면 소리조차 들리는 듯하였다. 그리고는 그것이 발에서 머리 쪽을 향하여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의식하였다. 허벅지까지 빠져 나왔을 때 나는「이젠 궁둥이 아래는 죽은 것이로구나.」하고 중얼거렸다. 배와 가슴을 빠져나올 때의 기억은 없다. 그러나 머리에 집중했을 때의 기억은 명확하다. 나는 두개골의 봉합선에서 빠져 나왔다. 그때 내 머리맡에는 두 사람의 부인이 나를 간호하고 있었다. 여인의 무릎과 병상 사이에는 내가 지나갈 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나는 막 육체에서 빠져 나온 참에 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어서 부인들의 앞을 지나가기가 부끄러웠다. 그때 나는 마치 고무 풍선이 아직 손에 쥐어져 흔들흔들 하듯이 나의 육체와 얼마간 결부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육체에서 벗어나 방으로 나왔다. 그때는 이미 나의 모양은 보통 때와 같았고 몸은 파란 불꽃처럼 투명했었다. 몸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문 쪽으로 슬그머니 피해 갔다. 문 쪽에 와있었을 때 나는 어느 틈에 옷을 입고 있었다. 이만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다 생각하고 돌아섰다. 그때 나의 왼팔 팔꿈치가 문 쪽에 서있던 한 사람의 팔과 충돌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사람은 하등의 저항도 없이 내 팔을 통과하는 것이 아닌가. 중단된 나의 팔도 아무런 고통 없이 마치 공기로 만들어진 것처럼 다음 순간에는 융합되어 원형에 돌아가 있는 것이다. 나는 당황해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아무런 촉감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나의 병상을 쳐다보며 그곳에 머물렀다.
   병상을 보니 나의 시체는 내가 노력한 것처럼 두 발을 바르게 폈고 두 손은 가슴 위에 얹혀 있고 얼굴빛은 몹시도 푸르렀다. 수일 동안 거울을 보지 않은 나는 시체 얼굴의 푸른 것을 보고 크게 놀라기는 하였으나 시체 자세가 반듯한 것에는 만족스러웠다. 나는 시체 주의에 앉거나 서있는 몇 사람을 보았다. 두 사람의 부인은 나의 시체 좌측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나의 처와 나의 동생이었다. 나는 죽지 않은—영생이 확실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싶었다. 그래서 모두의 한복판에 서서 바른 손으로 거수경례를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아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와 별안간 큰 소리로 웃었다.「이만하면 들리겠지!」생각했지만 저들은 여전히 시체에만 눈을 던지고 나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가 육안으로 보기 때문에 심령은 못 봄으로 시체가 나인지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진상을 잘못 안 탓이다. 시체는 이미 내가 아니다. 나는 여기 있다. 이전보다도 사뭇 생생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밖으로 걸어 나왔다.
   주위를 돌아보니 나는 이때만큼 사물을 분명히 본 일은 일찍이 없었다. 빨간 황토도 비 끝에 고인 물도 모두가 선명하다. 나는 긴 여행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그리운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나의 몸은 커보였고 만족스러웠다. 옷도 호사스럽지는 않았지만 깨끗하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입속말로「기분 좋다」고 말했다. 수 분 전만 해도 큰 병을 앓고 있던 나다. 그런데 이것이, 내가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죽음이라는 변화일까. 이제 만사는 끝났다. 이젠 병도 사망도 없는 것이다. 나는 기쁨에 넘쳐 뛸 듯 하며 내 모습과 옷에 눈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나는 나의 윗옷 등쪽에 가느다란 선이 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이상하다. 제 등뒤가 보이다니∙∙∙∙∙∙」하고 온 몸을 훑어 보았다. 그리고 얼굴에 손을 대어 두 눈을 확인했다. 모두가 제대로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육안이 아직도 볼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시체를 돌아 보았다. 그랬더니 시체는 반쯤 열려 있는 문 사이로 바로 보이는데 나의 어깨에서 거미줄 같은 가는 실이 빠져 나와 시체의 목덜미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옳거니! 이래서 나는 아직도 나의 육안을 쓸 수 있는 것이로구나∙∙∙∙∙∙.」하고 결론을 내리고는 길을 걸었는데 몇 걸음 못 가서 곧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어느덧 정신을 챙겨보니 나의 몸은 누군가의 손에 부축되어 허공에 가볍게 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밀고 있었다. 나는 어딘지 길을 걷고 있었다. 얼마 있자니 고독하고 쓸쓸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무서운 운명을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나에게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두려워 마라, 너는 이미 구원받았느니라.」하는 듯한 느낌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듣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상을 직감적으로 의식했다.
   이 사실에 나는 그 진부를 의심하면서 신비한 생각에 싸여갔다. 나는 회의와 공포에 사로잡혀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자애(慈愛)와 유화(柔和)의— 잊을 수 없는 표정을 한 한 얼굴이 보이면서 나의 믿음은 굳어져 갔다. 나는 의식도 노력도 없이 두 눈을 떴다. 나는 나의 두 손과 자리를 보았다.— 다시 육체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의식하고는 놀라고 실망했다.「어떻게 된 일이냐, 또 죽어야 하는가.」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대단히 쇠약하여 간호인이 말리는 것도 불구하고 이 타계의 경험을 말했다.」


참고문헌
곡구아춘(谷口雅春) 저(著) —「인간은 죽어도 안 죽는다」
카아린튼 저(著) —「심령연구에 있어서의 문제점」
세부라유 박사 저(著) —「심령계의 실증」


     [4] 착한 수행인의 죽음의 경우
   이상에서는 죽음을 체험한 자가 소생하여 죽음의 전후를 말해준 것을 들어 보았다. 다음에는 죽어서 영계에 머물러 있는 영혼의 진술을 듣기로 한다.
   영혼의 주인공은「도전(島田)」이라 하는 일본인 부인인데 1961년 2월 53세로 죽었다. 생전에 사후 영혼으로서 존속하는 것을 믿고 선행을 쌓았으며 또한 정신통일을 하면서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수행을 오랫동안 열심히 쌓은 분이다. 그가 생전에 친분이 깊었던 한 영(靈)능력이 있는 분에게 전해온 소식의 일단을 추려서 적어본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대개 죽음에는 얼마간이고 고통이 동반한다. 그러나 수행을 쌓아 생에 집착력이 적은 사람은 전연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더욱이 육체가 인간의 전부가 아니고 착하고 깊은 본성이 참 자기이며 보살행이 자기 본분행임을 의심 없이 믿고 수행한 사람이라면 죽음은 그에게 보람있는 신천지의 전개가 된다는 것이다. 착한 성령이 그를 보호하고 인도한다. 죽음에 대하여 추호의 공포도 불안도 고통도 없게 된다.
   그렇다고 고통 없이 죽거나 광명을 놓고 죽거나 아니면 그 밖에 신기한 상서를 남기고 죽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참 수행인의 죽음의 특징은 아니다. 동시에 반대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버둥거리고 죽었다고 해서 그것이 또한 반드시 결정적으로 수행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일단은 알아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죽음의 형상이나 사후의 경계라는 것은, 현상경계가 허망하듯이 본분 도리에서 볼 때는 실로 허망한 것이어서 이것을 들어 결정적인 수행력의 표적을 삼는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다.
   수행이 높으신 스님들의 죽음의 형상을 보면, 거꾸로 서서 죽기도 하고 짐을 지고 가다 죽기도 하고 법상에서 설법하고「이만 가노라.」 하직인사를 하고 가기도 하고 똥을 싸서 온 방안에 매닥질을 하고 죽기도 하고 집이 떠나가도록 고함을 지르고 죽기도 하며 또는 사방에 하직통보를 내어 사람들을 모아 놓고는 평상시처럼 활동하다가 소리없이 앉아서 죽기도 한다.
   그 분들은 참으로 죽지 않는 한 물건을 잡아서 생사를 마음대로 희롱하기 때문인 것이다. 세간적 상식에 순응하는 형상을 보이기도 하고 또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조사스님들이 자재하게 생사를 수용하고 구사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그 형상에 속지 않는 눈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