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승리를 위한 서장(序章)

불교인의 산아조절론(1)

2009-04-03     관리자

I. 머리말
II. 생명의 땅
  [1]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
  [2] 생명의 땅을 황폐하게 하는 것들
  [3] 몇 가지 반성
III. 인간구조
  [4] 육체의 또 하나 구조
  [5] 이래서 인간은 운다
  [6] 이 땅은 인간천국  
  [7] 천인(天人)을 맞이하자
IV. 영인(靈人)
  [8] 영(靈)이란 무엇일까?
  [9] 인간은 인간복을 입은 영이다
  [10] 저속령(低俗靈)의 수생(受生)을 봉쇄하자
V. 수생(受生)
  [11] 영아(靈我)가 수생하는 과정
  [12] 영이 이 땅에 오는 채널
  [13] 사회적 각성의 중요성
VI. 인격
  [14] 고급령(高級靈)을 수생케 하는 방법
  [15] 애정과 감각
VII. 산아조절론
  [16] 오늘날 산아제한을 점검한다
VIII. 맺는말


       I. 머리말

   오늘날 우리에게 무시무시한 말로 들리는∙∙∙∙∙∙. 식량기근, 환경파괴, 자원고갈, 전쟁위기 등등 문제들, 이 모두가 인구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리고 인구폭발은 그 위력이 어떤 핵폭(核爆)보다 강력하여 인류에게 빈곤과 불행을 안겨 주는 최대의 포외(怖畏)로 돌려지고 그 억제책에 그야말로 부심(腐心)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우리가 이 지상에 생존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어떤 죄로 느끼게 되고, 어쩌면 사람 수효를 줄이는 것이 도덕이게끔 될 날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으로 소름 끼칠 일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인간은 육괴수(肉塊數)로만 보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이 통용하고 거기서 인간을 물질시함으로써 인간에게서 참으로 인간적인 모든 고귀한 것을 앗아간 것이다. 이제 인간은 감각과 물질지상 앞에 인간 체온은 식어갔고, 심성은 황폐했고, 이것은 다시 퇴폐의 범람을 부채질하고 있다. 무치(無恥) 부(不)도덕의 만성화는 무(無)도덕의 시기를 가져올 것이다.
   무도덕과 퇴폐의 파고(波高) 속에 인간은 매몰되고 인간 행복은 순간순간 파국을 가져온다.
   이 지경에 이르면 인간 문명이 물질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패배한 것이다. 인간이 완전히 패배하고 있다. 슬픈 일이다.
   인간승리를 위하여 우리는 자신의 발 밑을 돌이켜 보고 인간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살펴야 하겠다. 그리고 나서 인구 문제를 논의해야 마땅할 일이다.
   여기서 필자는 불자로서 인간의 본적을 증언한다.
   유물독단의 귀도 생명의 꽃이기 때문에 필자의 목소리가 실은 그 화심(花心)을 향한 자장가임을 알겠기 때문이다.


       II. 생명의 땅

     [1]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
   오늘날 과학의 발달은 우리에게 많은 편리와 풍요를 제공하고 가히 고도 문명을 자긍(自肯)하게 한다.
   그렇다고 인류세계가 반드시 전도양양 하다고 낙관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식자간에는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많은 우려와 함께 부정적 견해의 입장에 서는 이가 적지 않다. 자원고갈, 환경파괴, 인구폭발, 전쟁 등을 그 주된 이유로 든다.
   그것만이 아니다. 미래는 차치하고라도 지금 당장 풍요 속의 인간이 그만큼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도덕적 타락」「공허한 인간상」「퇴폐만연(頹廢蔓延)」「방황하는 지성」그 모두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그러나 필자는 인간의 미래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입장에 선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도덕적 퇴락, 인간 비속화(卑俗化) 긍정, 물질가치 치중, 물질과 기계와 돈과 조직사회 속에 종속된 인간 아닌 군상(群像)— 그 속에서 자주와 창조와 생의 환희를 잃어가는 인간 표정에 대하여 심한 우려를 금할 길 없다. 한마디로 생명이 서야 할 땅의 황폐화를 걱정한다.

     [2] 생명의 땅을 황폐화하는 것들
   무엇이 생(生)의 토양을 황폐하게 하는가? 세 가지 입장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물질 위주의 가치관이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은 우리 사회를 거대한 산업사회로 바뀌게 했다. 인간은 누구나 그 속— 산업질서 속의 인간이 돼 버렸다. 여기서는 오직 적응과 능률과 생산성만이 가치의 척도다. 그러므로 이런 사회에서는 개성과 자유와 도덕성이라는 것도 생산성의 척도에서 평가되고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생산형으로 정형화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인간의 산업형화로의 전락, 이 전락의 정성화(定性化), 가치화— 바로 여기에 비극이 있다. 무한의 창조자인 인간이 그의 성능을 위축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현상에의 집착이다. 우리 인간의 인식은 커다란 제약하의 것. 시간, 공간의 범주 안의 것으로 인식은 한정된다. 엄밀히 말하면 한정이 아니라 변질되어 인식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의 인식이 일정한 범주 안에 한정된 것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실상의 여실한 파악이 아닌 변질된 인식이라는 사실에는 등한하다. 사실 우리는 진리의 원상(元相) 즉 참된 현실—현존(現存)은 인식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가상(假象)—현상(現象)만을 인식한다는 점이다. 가상은 실상이 아니며 현상은 진상(眞相)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에는「일체현상은 몽환과 같고 포말(泡沫)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하여 그 현존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런데도 범부현실—오늘날의 우리 주변에서는 물질적인 것, 현상적인 것만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볼 수 있는 것[가시(可視)], 보일 수 있는 것[가시(可示)], 인식적인 것밖에 없는 것으로 확신한다. 그 가시(可視)의 범위가 부단히 깨어지며 확대되는 데도 이 확신은 변하지 않는다. 만일 가시적(可視的)인 것 밖에 또 다시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당장 미신으로 몰아 세운다. 이야말로 엄청난 미신이다. 현상은 허가(虛假)요, 실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존인가. 겸허하게 찾아드는 것이 구도자의 자세요, 진리행자(眞理行者)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헌데도 그와는 반대다. 현상적인 것, 인식적인 것, 외에는 모두 배격되고 존재가 부정된다. 이러니 어찌 현상을 넘어선 진상(眞相)을 파악할 것이며 보다 인간적인, 보다 도덕적인 진리현상에 도달할 것인가?
   셋째로 외향적인 감각추구를 들겠다. 안락과 풍요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생각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결코 고난 예찬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안락과 풍요를 오용함으로써 우리의 인간성이 황폐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공허한 안락과 풍요는 즉시 물질과 영합한다. 그리하여 감각적 향락의 추구로 생의 의의를 찾으려 한다. 여기서 인간은 정신의 왕좌에서 타락의 구렁으로 추방된다.
   아름다운 소리, 자극적인 맛, 부드러운 촉감, 황홀한 향기, 환상적인 형상, 화려한 빛깔∙∙∙∙∙∙. 이 모두가 인간 감성을 내면 지향에서 외면 지향으로 구동하게 한다. 여기서 인간은 자기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고요와 깊이와는 멀어진다. 그래서 자극과 변화로 자기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황량한 인간이 등장하게 된다.
   이상에서 인간 생명의 토양을 황폐화하는 것을 현상과 물질과 감각에의 집착이 그 원인임을 말하였거니와 일언이 폐지하면「미혹」이 한마디에 그친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참모습을 미혹하여 착각을 일으켜 참 자기가 아닌 환각소생인 현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리하여 인간 관념의 유물화가 진행하는 것이라 하겠다.

     [3] 몇 가지 반성
   사람이란 별다른 욕망이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현실적인 고(苦)의 회피와 안녕을 바란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희망과 안락과 개성의 발휘 등 이른바 행복의 추구로 발전한다. 오늘날 문물의 발달도 역시 행복 추구가 재래(齎來)한 바다. 그 결과가 어떠한가, 과연 소망대로 행복한가.
   외계의 정복, 물량의 획득, 새로운 물질의 생산, 풍요 등, 결코 그것만으로는 행복하지 않음을 보아왔다. 물질의 대량소비, 관능의 충족, 물질의 지상가치—이러한 풍조가 지배하는 사회와 제도 속에서 생명의 윤택은 커녕 도리어 메말라감을 보아오는 것이다. 그 결과「히피」니「전위」니「스트리킹」으로 광란은 벌어진다.
   기실 유물적인 조직과 사회의 획일과 힘의 굴레 속에서 또한 물질과 감각의 결박 속에서 인간의 혼은 울고 있는 것이다. 그의 생명은 울부짖고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폭발적인 광란은 발작한다.
   오늘날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무(無)도덕」과「광란」은 실로 그 근원이 깊은 곳에 있음을 본다. 생명의 혼이 서야 할 땅을 잃고「나의 땅을 달라」는 절규를 듣는 것이다. 여기에는 애절한 생명의 목소리가 숨겨 있다. 어찌「퇴폐」니「무도덕」이니 하여 억압 일변도로만 처리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스트리킹」을 변호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개 행복이란「생명의 안전감」이다. 생명이 제자리를 얻었을 때 오는 감정이다. 그것은 욕망의 대량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고통에서는 안락을 결핍에서는 충족을, 억압에서는 자유를, 구속에서는 파괴를, 혼란에서는 질서를, 불안에서는 평화를, 끊임 없이 추구하면서 그를 통하여 존재의 독자성과 주체성과 자율성과 창조성과 원만구족성을 실현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절대의 무한과 자재에로 향상을 기도하는 것이다. 이곳이 생명의 나라이며 인간「혼(魂)」의 주처인 까닭이다. 행복도 여기에 이르면 마지막이다.

     [4] 육체의 또 하나의 구조
   먼저 여기에서 말해 둘 것이 있다. 그것은 행복 조건을 누리고 행복에서 행복을 행복하는 주체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본고는 이와 같은 생명자체를 논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다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왔으므로 한 말 하면 그것은 불성 또는 영성(靈性이라 할 절대생명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영원과 자재 무한과 원만을 근본 속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경에는 현상 인간을 분석하면서 육체, 감각, 의식, 가치, 정신 등 겹겹으로 쌓인 인간 내부에는「불성」이 안주하여 이 불성이 모든 존재와 행복과 성공덕(聖功德)의 근원임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불성 이외에는 모두를 버리라고 했고 실로는 없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현상에 눈이 고착된 우리들에게는 불성과 성공덕밖에는 없는 것이라는 말씀에 대하여, 곧잘 현상은 있고 현상 그 너머에 영성이 있거니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흔히들 육체의 배후에는 잠재의식이, 그 배후 깊이에는 우주의식이, 그리고 불가사의한 초의식이 존재한다고 한다.
   어떻든 인간을 단순한 육체이거나 물질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순한 물질시(視) 육체시(視)하거나 물질지상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여건하에서는 인간생명은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