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나한이 머무시는 성지

바라밀 국토를 찾아서

2009-04-03     관리자

 누구나 답사길에 자주 나서다 보면 절 어귀에서부터 조바심을 칠때가 한두번이 아닐것이다. 큰 절 작은 암자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불사들이 오히려 지금까지 그 사찰이 유지해 왔던 품격을 지키지 못하고 어설퍼진 경우가 자주 눈에 뜨이기 때문이다. 

엄정하면서도 고풍스런 분위기나 온화하고 다소곳한 느낌을 주는 절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새롭게 대형화된 절들이 늘어나는 추세를 탓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 새로운 모습이 그 사찰 주변의 들과 산과 계곡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찰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 견해이자 걱정거리다.

하기야 이러한 잘못이 어디 불교신도나 스님들만의 탓이랴. 국민학교 때부터 선생님들은 상감청자가 세계적인 보물이라고 주입식으로 가르쳐 왔지만 우리들은 상감청자가 왜 세계적인 보물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들어본 일이 없었다. 들어본 일이 없으니 박물관에 가서 상감청자를 보아도 그저 무덤덤할 뿐 감동이 일지 않으니 어떻게 마음속에서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과 이해와 자긍심이 싹트겠는가?

불교에서의 공업(共業 : 모두 함께 짓는 업)이 바로 이것이라면 이러한 기초 위에서 새로운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는 불사가 어찌 물과 우유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길 기대하겠는가. 문화의 축적이 새로운 문화를 낳는다면 일제시대 이후에 단절된 우리 문화의 맥을 다시 잇는 책임도 우리모두에게 있다고 하겠다.

송광사는 완주군에 속해 있지만 전주시와 가깝기 때문에 시내버스를 이용해도 참예할 수 있는 사찰이다.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는 국도를 타고가다가 송광사 입구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하면 벌써 OO가든, XX냉면, △△오리탕 등 수많은 유흥음식점들이 도로 양쪽으로 즐비하여 이렇게 저잣거리같이 시끄러운 곳에 무슨 고찰이 있으랴 싶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복잡한 음식점 골목 같은 이 길을 3km쯤 들어가면 바로 시내버스 종점, 개울 건너쪽으로 벌써 송광사의 연륜을 말해주는 해묵은 일주문이 바라다 보인다. 송광사의 창건주는 보조 체징(普照 體澄) 스님이다. 신라 말기에 제일 먼저 중국에 유학하여 선종을 들여온 도의(道義)스님은 교종이 뿌리내린 경주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언양 석남사를 창건한 후 강원도 양양 진전사에서 40여 년을 은거하다 입적하셨고 그의 법은 염거(廉居)스님이었다. 염거 스님의 제자가 바로 보조 스님이니 구산선문 중에서 제일 먼저 문을 연 가지산 보림사의 창건주이다.

다만 보림사의 창건은 860년이고 송광사의 창건은 867년이니 보조 스님이 가지산으로 가는 도중에 이 자리에 절터를 잡아 놓은 뒤 보림사를 개창한 후 송광사를 창건한 것인지, 아니면 보조 스님의 제자들이 스님의 명을 받들어 이 절을 창건한 후 보조 스님의 창건으로 기록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뒤 어떤 연유로 폐허화된 것을 고려때 보조 지눌 스님이 이 곳을 지나다가 영천(靈泉)의 물을 마신 뒤, 뒷날 이 샘으로 인하여 큰 절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샘 주위에 돌을 쌓아 두었다.

그래도 아직 인연이 성숙하지 않았는지 중창을 이루지 못하다가 조선시대 광해군15년(1623년)에 대웅전을 중창하였음이 작년에 주지로 부임하신 지원 스님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지원 스님은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 복장에서 「불상조성회양기」를, 명부전의 지장보살 복장에서 사리6과를 발견하였고 그에 의하여 법당과 불상의 조성 연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독자들도 알다시피 임진왜란 이전에는 국가정책에 의한 불교탄압으로 도성 안의 사찰은 전부 철거되고 승려의 사대문 안출입도 금지되어 불교계는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없었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보여준 스님들의 활약은 불교의 위상을 다시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후 앞날을 대비하여 북한산성, 남한산성, 부산의 동래산성, 송광사 인근의 위봉산성 등을 축성할 때 그 실질적인 건축과 수비의 책임을 스님들이 담당함에 따라 불교계를 대하는 정부나 유학자의 입장은 매우 우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타버린 법당들을 복구하는데 오히려 국가에서 지원하거나 유교의 선비들이 동참하는 경우도 많게 되었다.

이리하여 다시 활력을 되찾은 불교계는 임진왜란 이전에 폐사된 터에도 다시 법당을 세우는 불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송광사도 임진왜란 이전에 폐사가 되었는지, 아니면 암자격의 작은 사찰로 근근히 유지해오고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1636년에 세워진 중창비문에 여러스님들이 벽암 각성(碧巖 覺性:1575~1660년)대사를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송광사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로서 법당에 모셔진 좌불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토불(土佛)이다. 이 불상들은 광해군 15년(1622년)에 조성하기 시작하여 인조 15년(1641년)에 완성하였으니 무료 20여년이 걸린 부처님들이다. 1641년은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태종에게 항복한 병자호란이 끝난 지도 5년째 되는해이니 앞서 말한 「불상조성회양기」에는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무사귀국을 비는 내용이 실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을 모셨으면 문수.보현보살을 좌우에 모셔야 하건만 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보셨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아마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수없이 희생당한 백성들의 극락왕생과 오랜 전쟁으로 병고에 시달리는 중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한 스님들의 발원으로 이렇게 형식을 벗어난 부처님 세 분을 모셔진 것이 아닌가 한다.

대웅전은 1623년에 중창할 때 부여 무량사와 마찬가지로 2층, 35칸의 큰 건물 이었으나 1857년에 제봉 스님이 중수하면서 이층을 헐고 칸수를 줄여 15칸의 법당이 되었기 때문에 세 분 부처님이 계시기에는 너무 비좁은 느낌이다.

그러나 이 부처님들은 ‘땀 흘리는 부처님’으로 더욱 유명하다.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몸에서 많은 땀을 흘리시는데 그 때마다 찍어 놓은 사진이 대웅전 오른쪽 벽에 연도별로 걸려있다. 이런 이적을 본 사람은 소원 중의 한 가지는 꼭 이룬다고 해서 많은 신도가 찾아온다.

나한전은 1656년에 중건한 건물로 석가모니불과 16나한 500성중을 모셨다. 특히 500나한은 천정까지 선반을 매고 벽의 삼면에 모셨는데 모습과 크기와 표정이 각기 달라서 자기와 닮은 나한님을 찾아보는 즐거움도 있다.

십자각은 1856년에 제봉 스님이 복원한 건물이지만 십자형태의 2층 누각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본 유례가 없는 건물이다. 대웅전의 벽화도 바로 이때 그려진 것으로 조선 말기 벽화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송광사에는 특히 진묵 대사의 기록이 남아있어 대사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이설을 일축하고 있으니 1636년에 세운 개창비 뒷면의 ‘대선사 진묵당(大腺師 震默當)’이라는 글은 너무나도 선연하다.

아직은 전통 깊은 사찰로 잘 알려지지 않은 송광사, 그러나 그런 대접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산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