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빵껍질

보리수그늘

2009-04-02     관리자

날을 두고 비가 오지 않았던 까닭에 뜰 앞의 화단은 물론, 파를 제법 많이 심었던 앞마당마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영양질이 풍부한 땅도 아닌데  비마저 오지 않으니 어린 파끝이 노랗게 타 들어갔다. 이틀에 한번 호수로 목만 축여 주었으나 나아지지 않고 마찬가지더니, 며칠 새로 비가 차츰 뿌리니 언제 그랬냐는 듯 파의 몸집이 제법 굵어져 갔다.

 나는 흔히 비 온 뒤에는 이때다 싶어 화단의 잡초를 뽑아준다. 언제는 비가 안와서 자라지 못하는 어린식물이 안스러워 보였는데, 비가 오니 정작으로 같이 살아야 할 잡초는 무작정 색출하기에 바쁘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묘하다. 아마도 그것은, 파는 먹어야 하므로 그래서 잡초는 파에서 부터 이탈해 주어야 하는 속물이었던가? 

 나는 정독도서관에 자주 들러 공부를 하는데 마침 그 날은 비가 부수수 오고 해서 신록이 더 초록빛으로 빛나는 날이었다. 도시락을 먹으려고 탁자를 닦으며 뚜껑을 여는 순간 깜짝 놀랐다. 대학생 같아 보였는데 식빵을 알맹이만 빼먹고 껍질은 모두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만 보아도 빵 봉지의 삼분의 일을 차지했으니 당연히 눈에 띄었다. 순간 얼마전에 강원도 인재군 현리 현등사에 갔을 때, 불도 없는 그 절의 스님 한 분이 말씀한 것이 생각났다. [ 스님 무엇을 드시고 싶으세요]하고 물었더니 [두부]라고 하셨다. 산이 무척 높지는 않지만 마을과 많이 떨어져서 식량공급이 어려운 모양이다. 더구나 신도까지도 없었다. 운악산을 올라가는 곳곳의 쓰레기통은 먹다남은 쓰레기, 고급 깡통들이 넘쳐 있었다.

 요즈음의 우리들 중에는 쌀이나 밀이 귀한 줄 모른다. 최근 신문에 의하면 이십년 상환조건으로 일본에서 쌀을 수입한 것을 현물로 갚느냐, 현금으로 갚느냐 논란이 많은 것으로 안다. 쌀이 부족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수입해야만 한다. 그리고 식사전에는 항상 먹기전에 [ 이 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하는 한 선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하고 먹은 적은 없으나, 수저를 들기 전에 잠시 숙연해지고 나서 먹는데, 전혀 남기지 않고 정량을 깨끗하고 맛있게 먹는데 주력을 해왔다.현리 현등사 얘기를 아버님께 말씀드렸더니 거기가 어디냐고 하시며 두부 한 판 사가지고 올라가신다나, 아침마다 10km를 자전거로 통근하시는 아버님께서 운악산도 자전거로 올라가시려는지, 마음이 참으로 짜릿하였다.

 멀지않은 과거 일제시대를 돌이켜 보더라도 어디 일본군 앞에서 마음대로 쌀을 소유할 수 있었던가, 우리 어머니집은 다행히도 농토가 많았는데, 해마다 추수할 때는 모두 압수 내지 강매를 당하므로 쌀 가마를 뒷동산에 묻고 밤마다 조금씩 가져다 몰래 쪄서 밥을 해먹었다고 한다.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항거할 때도 맛있는 사식을 누가 감옥안에 사들여보내면 먹지않고 그냥 내보냈다는 그분들을 기억해낸다. 전쟁과 흉작으로 먹을 것이 없는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은 과거에 중국인이 먹다 토해 놓은 것도 핥아 먹었다. 6.25사변 직전에 큰 언니를 낳고 먹을 것이 없어, 할아버지가 뜯어온 명아주, 깻잎 이파리죽을 쑤어서 먹었다는 것. 어린 것의 생명을 위해서 넘어가지 않는 까실한 잎새죽을 먹어야 했다는 그 때를 생각해 본다. 시대가 바뀌긴 했지만 지금도 만약, 전쟁 내지 예측 못한 기근 천재지변이 난다면 그렇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집은 깻잎을 먹지 않는다. 큰언니와 12살 아래인 나는 그 뼈아픔을 공감 못한다.  

 도시락을 먹고 돌아온 후 도서실에 앉아 그 빵 봉지를 생각한다. 세월이 바뀐 것 뿐이겠지만, 그러나 검약과 성실한 자 만이 최후의 승리자다.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키워야겠다.

 우리의 역사를 더듬어 보건대 잠시도 평안한 적이 별로 없었다. 힘만 기르면 반드시 침략해오는 오랑캐와 강대국의 압력은 그칠 새가 없었다. 어제의 그 역사가 지금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있을 때 아껴야 하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다 우리의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