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문화의 본질적 특성(9)

인도문화 소개

2009-04-02     관리자

   3[다]

 평상 생활 속에서 인도 문화는 세 가지 기본 덕을 강조해 왔다. 「브리하드 아란야까 우파니샤드」에 그것을 예시하는 우화가 있다. 사람의 선조인 쁘라쟈빠띠(Prajapati)에게 윤리적 행동에 대한 가르침을 요청하여 세 주요 피조물이 접근하였다고 한다. 각각에게 그는「다」(Da)음절로 대답해 주었는데 그것들은 각각 다마(Dama), 다나(Dana), 다야(Daya), 즉 절제, 보시(布施), 자비였다. 이것들이 인도에서 사람들이 존경하는 덕성이며 이들 덕성의 이해가 인도 문화의 평가에 기본이 된다. 다마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문자 그대로 절제를 뜻한다. 그것은 인간의 내적 자제이며, 까마(Kama), 끄로드하(Krodha), 로브하(Lobha), 모하(Moha), 즉 정욕, 분심, 탐욕, 어리석음에 대한 지배이다. 결국 다마를 이루는 것은 자신의 정욕을 통제하고 욕망을 규제하며 충동을 자제하는 수련이다. 그러면 다나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희사, 즉 자비심에서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다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마하브하라따」에서 금무늬를 가진 몽구스가 가장 값진 시물을 아낌 없이 브라흐만에게 바치는 유드히쉬트히라의 제사드리는 공회소에 들어가는 유명한 이야기로 가장 잘 예시되어 있다. 그곳에서 몽구스는 모든 왕이 시물이 가난한 사람이 시여하는 한 줌 보리만 같지 못하니 왜냐하면 하늘에서의 보상을 바라는 시여엔 아무 공덕도 없기 때문이라고 대담하게 선언했다. 그러므로 다나란 바른 의미에서 풍요로부터 주어지는 희사가 아니라 희생을 수반하는 무엇이며, 남과 나누는 귀하고 가치 있는 무엇이다. 쁘라쟈빠띠가 강조하는 세 번째 덕성을 다야 즉 비심이다. 그 서사시 속에서 왕 유드히쉬트히라가 그를 따르는 길 잃은 개를 버리고서 까지 하늘에 오르기를 거부하는 것보다 더 감동적이고 대중적인 이야기는 없다. 만일 그가 자비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에겐 천국조차도 무의미한 것이었다.
불교의 자타카 이야기(Jataka, 전생담)도 그 순수한 전통에 있어서 또한 이 위대한 덕성을 강조한다.

  아힘사(Ahimsa)

 아힘사 사상은 이 다야 사상으로부터 생긴다. 아힘사에 대한 해석이 많지만, 쟈이나교도는 모든 생명을 성스로운 것으로 생각하여 해충이나 독벌레조차 죽이기를 금지하는 논리적 결론으로 이끌어 간다. 인도 문화 속에서 둘 다 참다운 흐름인 불교와 쟈이나교는 이런 면을 강조한다. 지난 수십년간 마하트마 간디는 이 주의에 확대된 의미를 주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어떤 의물에서 아힘사가 힌두 문화의 본질적 측면인가를 의미해 보는 것이다. 힌두 문화가 어떤 시기엔 평화롭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에 의해 쉽게 증명 될 수 있다. 힌두인의 많은 부분이 동물 공희를 믿었고 아직도 믿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두 위대한 서사시인 「라마야나」와 「마하브하라따」는 대규모의 살인이 그 주 특성인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인도 문화에선 어느 때고 아힘사를 전쟁과 폭력의 사용, 형법의 일부로서 사형을 가하는 것,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야생동물의 사냥 따위를 금지하는 주의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또한 동물계에 대한 일반적인 동정의 태도 속에서의 아힘사의 역할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 아힘사가 힌두 생활의 특색인가? 아힘사가 흰두인에 의해 요긴한 주의로 간주되는 것은 분심으로 부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방자한 상해를 일으키지 아니한다는 것에서이다. 물론 좀 도를 지나친 형태에서 아힘사가 종교적 교파에 의해 권장되긴 했지만, 그것은 다만 특수 집단의 믿음일 뿐이며 일반 인도 문화의 일부를 이룬 것은 아니다.

  자연과의 조화

 내가 강조하고 싶은 인도 문화의 마지막 한 측면은 자연과 더불어 이루고자 한 조화이다. 산이나, 강, 나무, 꽃은 인도의 생활 속에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히말라야로부터 사흐야드리(Sahyadri)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생활과 융화되지 않은 산맥은 없다. 히말라야는 데바빠뜨마(Devatama)이며, 「기따」속에 서 크리슈나는 그 자신이 산 가운데서 히말라야라고 선언했다.


빈드흐야(Vindhya)도 또한 성스러운 산이며, 아부(Abu)산과 암바 데비(Amba Devi)와 더불어 아라벨리(Aravelli)도 순례지이다. 사흐야드리엔 모든 곳에서 힌두인이 거룩하고 신성하게 여기는 많은 산들이 있다. 스리사일라(Srisaila), 띠루빠띠(Tirupati)언덕 안나말라이(Anamalai), 이 모두가 성지이다. 강을 보면 성스러운 것은 강가나 야무나(Yamuna)뿐 아니라, 나르마다(Narmada), 고다와리(Godanati), 까베리(Kaveri) 등도 그렇다 각 지방에서 그 강은 강가만큼 신성하다. 『강가는 목욕을 위한 곳이며, 뚱가는 마시기 위한 곳이다.』하는 격언이 뚱가브하드라(Tungabhadra)지역에 있다. 깜바르(Kambar)는 그의 「라마야나」의 한 구절에서 갠지스강이 그의 사랑하는 까베리만큼 성스럽다고 선언했다. 사실 어느 텍스트엔 모든 강이 성스런 강가의 한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나무나 꽃도 또한 그렇다. 사실 힌두 문화는 힌두 사원과 같이, 모든 자연을 그 우리 안에 넣는다. 힌두 문화의 기본적 성격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이다.

Ⅲ. 인도 문화의 미래

 <문화 : 지속적 성장>
 문화란 정적인 사회적 조화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생활 속에서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하고, 퇴보하는 것이다. 비록 대부분의 문화에 있어서 다른 것과 구별되게 하는 몇몇 기본적인 특성들이 있지만, 그들의 지배적인 관념들은 항상 눈에 뜨이지 않게 계속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동일한 문화를 다른 세대에서 조망할 때 성장 ‧ 변화 ‧ 쇠퇴의 증거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주요한 종교적 혹은 정치적 혁명을 통해 사회에 어떤 질적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에 있어선, 과거 문화의 지속성이 깨어지고,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새로운 문화가 대신 할 수도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적 문화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적 문화, 멕시코의 아즈텍 문화, 에이레의 전(前)영국적 문화들이 그 몇몇 예로서 인용될 수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 문화는 처음 그리스인과 로마인에 의해, 그 다음엔 기독교에 이해, 마지막으로는 회교에 의해 대치되었다.

 조로아스터 문화는 이란인이 아니라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정도로 인도에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화가 전적으로 대치된 곳을 제하곤, 보통은 그 문화에 개별성을 주는 어떤 특성들의 지속성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도에서의 모든 정치적 ‧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마우리아 인도의 문화와 오늘날의 문화 사이에, 비록 성장으로부터 일어나는 차이가 몇몇 본질적 특성에 있어서 보이겠지만,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은 조직 : 카스트>
 그러므로 모든 문화란 성장하는 사물과 같이 그 몸속에, 그것이 계속적으로 버리는 죽은 조직과 계속적으로 보태어지는 새로운 조직을 가지고 있다. 모든 생명 있는 문화에 있어서 죽은 조직의 폐기, 즉 그 타당성을 잃고 폐지된 관념들, 그리고 그 의미를 잃은 규칙들의 폐기란 자동적인 과정이며, 그를 통해 본래의 문화는 새로운 생각을 동화하고 새 규칙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아무리 자동적일지라도 모든 문화 속엔 언제나 그 속에 계속 동일화되어 있는 낡아 빠진 생각들과 퀘퀘 묵은 규칙들이 상당한 기저를 이루고 있다.

 인도의 불운이었던 바이지만 18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적어도 한 세기 동안 광대한 지역에 걸쳐, 그 사회가 무너지고 그 문화는 침체되어 생동력을 잃었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이다. 즉 비록 회교와 힌두교의 복합적인 문화가 중요한 정치권력의 중심지에서 모종의 계급들 사이에 발달했었지만, 모든 시대에서 인도 인구의 대부분을 구성했던 힌두 사회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방어와 싸움에 처할 때 모든 집단이 그러하듯, 관습에 대한 무절제와 모든 무의미한 사회적 규칙을 지지하면서 그들 자신의 사회생활을 굳게 고수했다는 것이다.

 서양의 충격과 기독교와의 싸움으로 비롯된 진보적 운동이 그 결과를 나타내기 전인 18세기 말에, 인도 문화를 비평하는 사람은 의당히 인도 문화를, 적어도 힌두인에 관한 한 카스트, 불가촉민, 대가족, 소녀의 조기 결혼, 과부에 대한 부덕의 강요, 금기 음식 따위로 구성된 것이라고 마땅히 특성 지을 것이다. 이것들의 대부분은 비록 당시 힌두 사회생활의 특성일지라도 다만 더 이전의 관습들의 잔해에 지나지 않으며, 이 시기에 효과적인 성장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가 폐지시키지 못했던 죽은 조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힌두 르네상스기에 많은 것이 폐기 되었다. 이젠 아무도 카스트가 힌두 문화의 본질적 국면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있으며 초기의 몇몇 지도자들이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는, 종족 문제에 관한 철학적 절충인 것이다.

 카스트란 이제 하나의 사회적 제도로서 인정되고 있으며 원래는 기따(Bhagavad Gita)에서 말한 것과 같이 덕(Guna)과 업(Karma)의 기초 위에서 집단에 대한 개념적인 분류로서 시작한 것인데, 시간의 추이 속에서 사회를 무한한 단편으로 분열하는,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사회적 통합의 이상을 폐기하는 도구가 되었다. 시회의 커다란 네 가지 구분인 사성계급(Chaturvarnya)의 정당성이 무엇이든 간에 사회를 모든 수평에서 작고 더욱 작은 집단으로 조각을 내어가며 인도에서 발달한 것 같은 카스트 조직이란 악질적인 파생물이었다.

 오랫동안 카스트는 인도인의 생활의 가장 뚜렷한 특색을 대표했고, 외국인들은 그것을 넓게는 인도 문화 그 자체와 동일시했다. 붇다로부터 아래로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들이 카스트를 고발했고, 그 종교적 합당성을 거부했지만, 비라 사이바(역주 : 시바신에 대한 힌두교의 일파)와 시크교와 같은 카스트를 반대하는 다수의 강력한 교파들이 나타났지만 그것은 최근까지도 힌두 생활의 주요한 특색이었다.

 힌두교의 우리 안에서 카스트 제도는 그 사회적 금기들이며, 배타며, 제한과 더불어 거의 난공불락의 제도로 존속했으며, 종교적 교리 뿐 아니라 사회 집단의 많은 부분의 자발적인 허가로 지지되었다. 그것이 오늘날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런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즉 힌두 사회는 다시 움직이고 있으며 그 문화는 이미 정적이기를 그침과 더불어 사회적 목적을 갖지 못한 것을 폐기하고, 그 대신 새로운 이념을 받아들이는 정상적인 과정을 이행하고 있다.

 또한 불가촉민에 향한 태도도 동일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전 인도에 걸쳐서 퍼져 있는 수백만의 억압받는 계급들은 기본적인 인권마저 거부당하면서 초기부터 힌두 사회가 건립되는 최하층의 기반을 공급했다. 그것은 마하트마께서 그것의 폐기를 민족운동의 근본적인 부분으로서 주장하기까지 오랜 동안 힌두 문화의 특성으로 여겨졌다. 문제를 이루는 것은 하라쟌(역주 : 불가촉민에 대한 간디의 새 명칭, 「신의 아들」이란 뜻)들에게 돌려지기 쉬운 무능력성이 아니다. 그것은 힌두생활과 끈질기게 동일시되었던 그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 그것의 구조를 위해 하나의 비카스트(Avarna)라는 기반을 가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역시 이젠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그것은 역사적 그리고 인종학적 전개에 속하는 사실이며, 그것의 법적 폐지는 어쨌든 인도 문화의 성격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계속) (전 인도 마이소르대학 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