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암 대 사

한국불교인물전

2009-04-02     관리자
 

1. 효자 스님


  조선 宣祖 39년(1606)가을, 속리산(俗離山)의 가섭굴(迦葉窟)에서 한 젊은 스님이 정성스레 망모(亡母)의 명복을 비는 천도재를 올리고 있었다.

  이미 세상의 부모 자식간이라는 인연을 떠나 입산수도하는 스님의 몸이면서도 속가에 남아 있던 그의 노모가 세상을 떠나자 산속의 암자에서 정성스레 그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 잇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32세 때의 벽암대사 각성(覺性)이었다.

  호를 벽암(碧巖)이라고 하는 각성스님은 선조 8년(1575) 12월에 충청북도 보은읍(報恩邑) 서쪽 마을의 김해 김씨(金海金氏) 집안에서 태어났었다.

  일찍이 관상사가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큰 스님(大沙門)이 될 것이오.」라고 하였으니, 그 어머니는 북두칠성에 기도하였고 또 꿈에 오래된 거울(古鏡)을 보고 임신하였다고 하는데, 그와 같은 일들이 이미 그의 출가를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아홉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네 살 때 설묵(雪黙)스님에게로 가서 머리를 깎았다. 그 뒤 서선대사의 제자였던 보정(寶晶)스님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는데, 마침 당대의 큰 스님이었던 부휴(浮休·善修)대사를 만나 그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부휴스님은 그의 인물됨을 아껴서 힘써 일깨워줄 생각을 하였고 그 또한 부휴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진심으로 배움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부휴스님을 따라 속리산과 덕유산(德裕山)과 가야산(伽倻山) 및 금강산 등으로 다니면서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정성을 다하여 스님에게 시봉하였다.

  벽암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18세였는데 그 때 스승 부휴스님을 대신하여 당시 의승대장(義僧大將) 사명(四溟)스님의 진두로 나아가서 문안을 드렸고, 그 이듬해 19세 때에는 역시 스승을 대신하여 싸움터로 나아가 명나라 구원병들과 함께 바다에서 왜적을 무찔러 명나라 장수들의 칭찬을 받았었다. 사명대사는 부휴스님에게 훌륭한 제자를 얻었다고 치하하였으며, 명나라 장부 이종성(李宗誠)이 벽암을 보고는 부휴스님에게 매우 칭찬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벽암의 인물됨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볼 수가 있겠으나 여기서 우리는 그만큼 그가 스승을 잘 모시고 정성껏 받들었다는 하나의 실례이기도 하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의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였으므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비록 출가는 하였으나 그는 스승을 친부모 모시듯 그렇게 정성스레 시봉하였던 것이다. 그가 26세가 되던 경자년(1600)에는 스승을 모시고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 있었는데, 그 때 마침 스승 부휴대사가 병을 앓게 되었으므로 강석(講席)을 스승으로부터 물려받게 되었다. 그는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스승의 간곡한 부탁으로 끝내 그 강석을 물려받아 강론(講論)을 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그는 학인(學人)들을 가르치며 학풍을 크게 떨쳤다. 그러다가 그의 32세 되는 병오(丙午)년(1606) 가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학인들과 하직을 하고 고향 땅의 속리산 가섭굴(迦葉窟)로 가서 홀로 세상의 모든 것을  끊고 오직 어머니의 명복을 위해 정성을 다하였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널리 알려진 벽암대사는 조선 인조(仁祖) 때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또 병자호란 때 의승군(義僧軍)을 모았던 도총섭(都摠攝)이요, 義僧將)으로서 서산, 사명(西山大師·四溟大師)과 더불어 손꼽히는 애국 고승(愛國高僧)이다. 그러한 충군애족(忠君愛族)하는 도총섭이요, 의승대장이었던 벽암대사는 어릴 때에도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었고, 출가하여 승려가 된 뒤에는 스승을 지성으로 모셨으며 또 홀로 계시던 노모가 별세하자 그토록 정성껏 재를 지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관상사가 예언했던 것처럼 대사문(大沙門)이었지만, 또한 출천의 효자이기도 하였다. 친부모에게 효자였기 때문에 스승(法師)에게도 그토록 지성스러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부휴대사를 정성스레 시봉하였던 것도 하나의 지극한 효성이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라 본다.


2. 精進과 慈悲行


  벽암대사는 스승을 따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익히고 닦았다. 그리고 불전(佛典)뿐 아니라 백가제서(百家諸書)도 두루 읽었고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난 재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뜻을 머물러두지 않았고 전연 그런 것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 지킬 것을 지키고 행할 바를 행하여 말없이 마음을 닦아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다. 그는 가야산 국수암(伽倻山 國壽庵)에 있을 때 결가부좌하고 앉아서 십여 일 동안을 정(定)에 들어 있었다. 마치 고목처럼 꼼짝 않고 있었으므로 날짐승이 그의 머리를 쪼고, 뱀이 그의 손가락을 물어도 전연 모를 지경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행이 청정하였던 그는 한번 공부에 입하면 먹는 것도 잊고 배고파하지 않았고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늘 법의를 입은 그대로 결가부좌하고 앉아서 조금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그처럼 그는 철저하게 공부하고 용맹정진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그와 같이 그가 계행이 청정하고 공부의 정도가 깊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호랑이가 그를 호위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한번은 몇 사람의 승려들과 함께 밤길을 가게 되었는데 어디서 큰 호랑이가 무섭게 소리치며 나타났다. 그래서 일행의 승려들이 모두 겁을 먹고 어쩔 바를 몰라 하였는데 벽암스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위해서 특별히 길을 인도하려고 하는 것이니 두려워하지를 마시오.」 하고 일행을 안심시켰다. 과연 호랑이는 이심여리를 따라 왔는데 절 문밖에 이르러 벽암이 호랑이를 향하여

  「멀리까지 함께 와서 너도 수고하였구나.」하고 사람에게 말하듯 하니 호랑이는 그의 주위를  세 바퀴나 돈 다음에 한 소리 외치고는 어디론가 달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는 또한 매우 자비로웠으므로 까마귀와 수리 등 날짐승들이 그의 손바닥에 내려앉아 먹이를 먹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면 그 새들을 쓰다듬어 주곤 하였다. 그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고 또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가 거처하는 절에 아침저녁 끼니때이면 밥을 얻으러 오는 가난한 사람들로 대문이 비좁았다는 것이다.

  그가 젊었을 때 어느 날, 함께 공부하던 한 승려가 몹쓸 전염병에 걸려서 죽었다. 그때 모든 승려들이 병에 전염될까 두려워하여 아무도 그 근처에 얼씬하지 않았는데 벽암 혼자서 시체의 옷을 갈아입히고는 메고 가서 묻어주었다. 그 때 마침 달도 없는 밤이라 멀리서 맹수의 울음소리가 사납게 들려왔으나 그는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담력을 보여주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겠으나 실은 그의 높고 깊은 자비심에서 우러나온 소행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나중에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도 지났고 국왕으로부터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호를 받았으며 당시 총림의 법주(法主)로 높이 숭앙을 받고 있었으나 사람을 대할 때에는 매우 공손하여 조금도 교만하거나 오만불손한 태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비행의 보살이요 대자대비의 화신이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3. 불멸의 가르침(碧巖의 三箴 및 遺訓)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벽암은 임진왜란 때 겨우 십팔 구세의 나이로 싸움터에 나아가 전공을 세웠으며, 인조 2년에는 조정의 명으로 팔도도총섭이 되어 남한산성 수축을 총지휘하여 삼 년 만에 완성시켰다. 그래서 왕은 법호(法號)와 의발(衣鉢) 및 술(內醞)을 내렸는데 그 때 그 술을 받은 벽암은 「계율을 지키는 산승(山僧)이라 그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성상(聖上)이 내리신 것이라 어찌 한 모금 마시지 않으랴」하였다는 것이다. 계행이 청정하였던 그도 국민의 한 사람이었기에 왕명을 따른 것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다. 국민의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그는 병자호란 떼에는 지리산에서 의승병(義僧兵)을 일으켜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북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도중에서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국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행군을 중지하였다.

  그 보다 앞서 광해군 4년에 못된 중의 모함을 입어 스승 부휴와 함께 옥에 갇힌 일이 있었는데, 그 때 하도 태연자약하고 몸가짐이 당당하였으므로 모두를 부휴를 큰 부처(大佛)라 하고 벽암을 작은 부처(小佛)라고 하였으며, 왕이 직접 국문하고는 그 인품과 언동에 감동하여 상품을 내리고 봉은사(奉恩寺)에 머물게 하여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는 구름처럼 모여드는 학인들을 가르칠 때 언제나 세 가지를 지키게 하였다. 즉 생각을 올바르게 하여 망령되지 않게 할 것(思不妄). 항상 떳떳하게 행동하여 얼굴을 부끄럽지 않게 할 것(面不愧). 자세를 바르고 당당하게 하여 허리를 비굴하게 굽히지 않아야 한다.(腰不屈)는 것이다. 이것을 벽암의 삼잠(三箴) 또는 삼계(三戒)라고 한다. 이 세 가지의 가르침이야말로 벽암대사의 참 면목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독특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당시 불교계에 있어서 이 세 가지의 교훈은 여러 모로 의의가 큰 가치성을 지녔다고 할 것이다. 승려들의 자각과 분발과 정진을 불러일으키고 채찍질하는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또 법을 묻는 승려가 있을 때에는 무자(無字)를 참구(參究)하도록 권하였다. 그는 교(敎)와 선(禪)을 모두 통달한 대선지식(大善知識)이었다.

  그는 현종(顯宗) 원년(1660) 정월 12일에 86세로서 입적하였는데, 그 전년에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후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또 그의 입적 직전에 제자들이 마지막 남길 말씀(臨終偈)을 청하니 그는 붓을 들어 「팔만대장경과 삼십 권의 염송(拈頌)만으로도 충분한데 따로 무슨 게송(偈頌)이 필요하겠는가.」라고 쓰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