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泰國)의 불교문화(佛敎文化)

부처님 나라 순례기

2009-04-02     관리자
 

  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2세기 경이다. 그리고 한 때 중국계 대승불교의 침투로 불교내의 분쟁이 있었고 정치세력과 격탁되어 타락의 양상을 나타낸 적도 있으나 장구한 시간을 통해 불교는 면면히 그 전통을 이어왔던 것이다. 우리는 태국의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지칭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대승불교 측에서 명명한 경멸적 표현이어서 그들은 본래의 상좌부(上座部 Theravada) 불교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불교와 그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편견 없는 인식이 요청되며 원시불교의 내용과 형식을 대승권의 불교보다 더 많이 보존하고 있음을 존중해야 하고 그 가치가 손상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태국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 거기에는 불교에 대항할 만한 기존문화(旣存文化)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교는 수정 없이 곧 태국의 풍토에 토착화될 수 있었고 단순한 농경문화(農耕文化)의 배경에서 불교는 학술과 건축과 미술 및 생활양식을 지배하는 이념이 되었다. 이러한 예는 중국의 경우와는 대조된다. 중국에는 불교가 전래됐을 당시 이미 그 자체의 토착신앙 및 도교(道敎)의 고도(高度)한 사상과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는 충돌과 변질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문화는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그 운반체(運搬體)가 된다. 이 점이 오늘날 대승불교에 방대한 사상체계를 주게 되고 철학적 특색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던 원인일 것이다. 반대로 태국의 경우처럼 기존문화의 결핍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공허한 형식으로 굳어지는 경화현상(硬化現像)을 면치 못하게 된다. 이것이 곧 오늘날 태국불교가 당면하고 있는 그 배타성과 폐쇄성이라 하겠다.

  헌법상 불교를 국교(國敎)로 하고 있는 나라는 태국뿐이다. 그럴 만큼 태국은 사원의 나라이고 승려의 나라이다. 불교문화재 말고 태국의 문화재란 전무(全無)하다. 국토의 대부분이 정글과 평야로 되어있는 이 단조로운 풍경에서 찬란한 사원들만이 군데군데 보석들처럼 박혀 있는 것이다. 사실은 관광자원일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정신적 원천을 이루고 있는 교육기관이자 사회적으로는 구빈원(救貧院)의 구실을 하고 있다. 누구나 남자라면 결혼 전에 한번은 출가를 하여 일정 기간 승려로서 수행하는 것을 관습으로 삼고 있다. 일단 수계(受戒)를 하면 그는 모든 계(戒)를 지켜야 한다. 예를 들면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고 몸에 쇠붙이를 지니지 못하며 시장이나 극장에 갈 수 없고 외박이 금지되고 가사(袈裟)가 여인에게 닿아서는 안 되며 음식을 저장해서는 안 되며 속인과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으며 받치지 않은 음식은 먹을 수 없다. 소변도 승려는 앉아서 보아야 하며 탁발 시에는 맨발로 걸어야 하고 음악 감상을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숨이 막힐 지경으로 형식이 생명을 억압하고 신선해야 할 종교적 영감을 질식케 하는 것이다. 내면에서 발산하는 광채 말고 어디에서 지혜의 광명을 구할 것인가. 생명의 본연을 부정하고 어디에서 보리(菩提)를 구할 것인가? 불교의 계율은 성자(聖者)의 길이고 생명의 질서를 구현하는 길일 것이다. 청정한 자에게 열리는 찬란한 자유의 길이고 무명(無明)한 자에게는 길을 알리는 방울소리일 것이다.

  종교의 사회적 본질이 율법 또는 계율이라면 태국 불교의 호법(護法) 및 전통의 유지는 계율을 존중했던 데에 연유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계율은 생명의 현실과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불교의 가르침은 생명의 거부나 세계 밖으로의 초월이 아니라 이미 개시(開示)되어 있는 진리의 발견이며 진아(眞我)로의 환원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없어져버린 형식은 그 자체로서 고립의 상징이 된다. 이것은 태국불교가 단단한 껍질을 깨뜨리고  세계로 뛰어넘어야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태국에서 승려는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승려의 인견 때문이 아니라 종교적 감정에서 눈에 보이는 불타의 상징으로 받아드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에는 물론 투표에도 참여할 수 없으며 극장에는 물론이지만 공원에도 입장할 수 없다. 그림을 그려도 안 되고 음악을 들어도 안 되다. 속인이 가사(袈裟)를 닿는 것도 삼가야 한다. 속인의 학교에서 공부할 수 없고 승려는 돈을 만져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승려에게는 오로지 내관(內觀)과 명상(瞑想)으로만 가야하는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까지 승려를 위한 교육기관이 있고 「국립승가 병원」이라는 의료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공공요금은 면제를 받는다. 엄격한 계율과 형식주의적 특색이 강한 반면에 승려는 언제라도 비구계를 반납하고 자유로이 환속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성의 타락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불연(佛緣)을 맺고 선업(善業)을 쌓은 업적으로서 평가되기 때문에 결혼에 있어서나 취직에 있어서 우선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넉넉하지 못한 가정의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사미계를 받고 출가를 하면 대학까지 학교과정을 마칠 수 있고 의료혜택과 생계가 보장되는 셈이다. 종신승려(終身僧侶)의 수효는 적다하더라도 승려의 수치(數値)만은 무려 30만을 헤아리게 된다. 이처럼 출가와 환속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제도적 보장이 불교가 곧 국민들의 생활윤리를 이루게 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반이 불교문화를 고수해 왔고 독립국으로서 오랫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태국불교는 심각한 고민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서양으로부터 밀려들어온 물질만능의 배금주의며 성도덕(性道德)의 붕괴며 지식의 폭발이며 공산주의 유혹 등에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태국의 불교는 불교의 팔리어(pali 語) 경원을 암송하는 일과 계율을 존중하는 것 말고는 사회문제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들에게 예불(禮佛)과 축복이라는 상호관계 말고는 종교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태국불교는 라오스, 캄보디아 및 베트남 등 인접 국가들의 공산화로 말미암아 가장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 점들을 불교의 역사적 및 사회적 사명을 다시 해석해야할 시대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