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교리강좌] 승가(僧伽)-화합 교단

알기 쉬운 교리강좌

2009-03-31     해주스님

  부처님의 모든 교설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방편이다. 성불을 위한 온갖 방편문은 우리 중생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부처님의 세계로 함께 가는 좋은 벗의 모임, 부처님 제자들의 화합된 단체를 승가(僧伽) 즉 교단(敎團)이라고 한다.

  불교 교단의 구성원은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의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는 사부중에다 사미  · 사미니 ·식차마나니를 더하여 칠중(七衆)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는 승가와 교단을 동일시 한 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승가(Sam gha)의 원래 의미는 출가 수행자의 통제된 집단, 다시 말해서 전문 승려의 집단인 승단(僧團)만을 가리키며, 승가를 승(僧)이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삼귀의를 할 때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귀의승(歸依僧·'하고 있는 것이다.

  출가 수행자의 집단에 대해서 귀의하고 신뢰하여 형성된 재가신자의 집단은 형태상 다른 면을 갖고 있으므로 출가와 재가는 일단 구별하여 생각되어 왔다. 이 재가신자의 집단을 나타내는 술어로서는 가나(gana)라는 말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출가든 재가이든 동일한 부처님 교법을 신봉하는 무리이므로 같이 합하여 교단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재가와 출가 그 어느 집단이 빠져도 교단은 성립될 수 없다.

  이 교단의 원어는 물론 승가이며, 그 대표적인 의미로 화합중(和合衆)을 내세운다. 화합된 대중, 교단의 화합은 승가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으로 무엇보다 중시되어 온 것이다.

  승가는 교진여등 5비구의 귀의에 의하여 비로소 성립되었다. 5비구가 귀의하기 전, 두 상인(Tapussa와 Bhallika)이 녹야원으로 가시던 부처님을 뵙고 최초로 공양을 올리며 부처님과 부처님 교법에 귀의를 하였다. 그러나 두 상인이 재가여서인지 숫자적으로 2인이기 때문인지, 아무튼 그것으로 승가가 형성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후에 5비구도 2귀의만 하였기 때문이다. 승가의 성립 후 처음으로 3귀의를 한 자는 야사(yasa)이다. 3귀의를 한 최초의 우바새는 야사의 아버지이고, 3귀의를 한 최초의 우바이는 야사의 어머니인 고이(故二:부인)이다.

  비구니의 출가는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최초의 비구니인 구담미(Mahaprajapati-gautami)의 출가에 대한 경이나 비구니 교단의 성립에 대한 문헌들에 의하면, 비구니 교단은 부처님 성도 후 약20년 만에 이루어 짐을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인도사회에서의 여성 출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짐작케한다. 

  녹야원에서 첫 안거를 마치고는 그때까지 제자가 된 60명의 아라한들에게 전도의 길을 떠날 것을 당부하시고, 부처님께서도 붇다가야 근처인 네란자라 강이 흐르는 우루벨라 병장촌으로 가셨다. 거기서 외도로 유명한 3가섭과 그 제자 1,000명을 항복받아 불교에 귀의케 하였다. 이로 인해 마갈타국 빔비사라 왕의 완전한 귀의가 이루어졌고 왕의 적극적인 정치적 외호와 죽림정사의 기진 등은 불교 교단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왕사성 죽림정사에서 부처님은 당시의 수많은 종교와 사상가를 압도하고 불교 교단은 교단으로서 자리를완전히 굳혀 갔던 것이다. 사리불 · 목건련 ·마하가섭 등의 귀의도 그 당시의 일이다.

  또 코살라국의 사위성에 사는 대상인 급고독 장자가 장사차 왕사성에 들렀다가 부처님의 명성을 듣고 귀의를 하게 된다. 급고독 장자는 기타 태자의 동산에 정사(精舍)를 지어 부처님께 바쳤으니, 그래서 정사의 이름이 기수급고독원 줄여서 기원정사라고 불린 것이다. 기원정사는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도록 주처하신 곳으로서 바라문교의 세력이 강한 서북인도지역에 불교교단이 뿌리를 내리게 되는 주요 안거지가 되었으며 급고독 장자는 불교교단을 경제적으로 지탱하는 주된 외호자로서 빔비사라왕과 함께 교단의 2대 외호자로 손꼽히고 있다.

  성도 후 2년경에 행해진 부처님의 고국 방문은 교단에 있어서 또 한번의 획기적 사건이었다. 석존과 같은 석가족 출신의 대거 출가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라훌라 · 아란 ·난타 ·아나율 등 쟁쟁한 제자들은 비롯하여 석가 왕족이 석존의 가비라국 방문으로 인해 거의 입단하였다. 그 여파로 후에는 석가족 여인들이 500명이나 한꺼번에 출가하기 까지 된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부처님을 뵙고 이름을 듣는 자마다 환희심을 내었고 바라문 외도들까지도 부처님께 귀의를 하여 불교교단은 순식간에 급팽창하였던 것이다. 부처님 재세 당시 석존께서 직접 다니시며 교화하셨던 곳은 동으로 참파에서 서로 코삼비까지 약 500km, 남으로 붇다가야에서 북으로 카필라밧투까지 약 400km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러나 불법은 이보다 훨씬 너른 지역까지 전파되었으니, 설법제일 부루나 존자, 논의제일 가전연 존자등을 위시한 제자들의 적극적인 전도로 인해 인도 서부지역에도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수로나 국으로 전도하러 떠나는 부루나 존자와 부처님의 대화는 널리 회자되고 있는 감동어린 사실이다.

  이처럼 불교의 전파와 교단의 발전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복덕과 불법의 심오함, 출가제자들의 구도열, 재가불자들의 신앙심 등이 모아진 총체적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으로서,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화합과 평등사상의 실천을 들 수 있다고 본다. 당시 인도의 모든 계급(바라문·왕족·평민·노예의 사성계급) 출신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부처님 교단에서 일불제자(一佛第子)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평등과 화합정신으로 형성 유지되었던 불교교단이 아니고는 있을수 없는 기적과 같은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승가는 원시공동체사회를 기본토대로 하여 운영되었다. 공정한 분배, 집착없는 무소유정신에 입각한 공동의 교단소유, 민주적 회의 방식들은 평등과 화합의 소산이자 원동력이었다. 교단의 회의는 갈마(褐磨)에 의하는데 결계(結界)를  하여 정해진 지역내의 모든 구성원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참석하도록 되어 있다. 병이 들었거나 특별한 사연으로 인해 불참할 때는 회의 결과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승복하겠다는 표시를 먼저 해야 하니 그것이 여욕(與欲)이다. 회의 도중에도 중요 안건에 대해서는 백사갈마(白四褐磨)를 한다. 백사갈마는 일백삼갈마(一白三褐磨)라고도 하는데 대중의 찬성을 세번씩이나 확인하는 방법이다. 오늘날도 수계나 자자의식 때는 행해지고 있다. 요즈음 만연되고 있는 날치기 통과라든지, 다수를 가장한 소수의 횡포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시던 해인 마지막 안거 때 제자들을 불러 모은후, 교단이 쇠퇴하지 않고 불법이 오래 전승되도록 당부하시는 말씀이 장아함 유행경(遊行經)에 보인다. 승가의 화합과 번영을 가져오는 법으로서의 칠불퇴법(七不退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말씀이다. 이는 그 당시 부처님께서 좋아하셨던 공화국인 밧지국 사람들에 의해 준수되어  있었던 생활의 관습법이 승가의 화합을 유지하는 불퇴법의 모델로서 도입된 것이다.

  승가의 칠불퇴법이란 첫째 자주 모여 바른 뜻을 강의하고(數相集會講議正義), 둘째 상하가 화동하여 공경히 수순하고, 셋째 법을 받들어 어긋남이 없고, 넷째 선지식을 잘 모시고, 다섯째 마음을 두호하여 효경으로 으뜸을 삼고, 여섯째 청정히 범행(梵行)을 닦아 욕망을 따르지 않고, 일곱째 다른 이를 앞세우고 자기는 뒤로 하여 명리(名利)를 탐하지 아니하면 나이 많은 사람과 적은 이가 화목하여 (長幼和順) 법이 무너지지 아니한다(法不可壞)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거듭해서 제자들에게 불퇴법을 당부하고 계신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나지 아니하여 부처님은 반열반하시게 되는데 입멸하시기 직전에 부처님께서는 시자인 아난 존자의 물음에 응하여 계를 스승으로 삼을 것이며, 스스로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할 것(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을 유훈하셨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그법을 중시함에 따라 결집이 이루어지고 법과 계율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결집이 거듭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법과 율에 있어서 부처님의 뜻을 달리 해석하게 되고 각기 정당성을 주장함에 따라 불멸 후 100년 경부터는 교단의 화합이 깨어지고 분열이 빚어지게 되었다. 그 분열은 대승불교가 흥기하기까지 약500년간 더욱 심화되어 갔다.

  마침내는 부처님의 근본뜻을 헤아려 새 불교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으니, 서로 소외시켰던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와 우바이, 출가와 재가제자들이 평등과 화합의 기치 아래 다시 모여 대승불교를 일으켰던 것이다. 대승불교는 드디어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소승까지도 모두 수용하여 일불승(一佛乘)의 일승불교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승가에 있어서 평등과 화합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우리의 과제라고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