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불교] 서양 불교의 발전

해외 불교

2009-03-31     E-밴즈, 이지수 역

  5 독일에서의 불교와 조직적 포교

  아시아 제국에서의 불교의 재흥이 또한 유럽, 특히, 독일에서 조직적인 테라와다 전교의 발달로 이끌었다. 1952년 스리랑까 불교도들은 랑까 담마두따 협회(Labja Cgannadyta Socuett) 즉, 불교 전교 협회를 결성하고, 1954년 「국제 불교 서비스」를, 그리고 그로부터 「독일 불교 전도단」이 유래했다. 제 6회 불교도 대회(1954년 5월~1956년 5월)에서, 당시 버마의 수상이었던 우 누(U_Nu)는 유럽, 특히 독일에서 불교 포교사를 위한 교육 기관을 짓기 위해 199만 루피 이상의 모금 운동을 조직했다. 그에 따라 1957년에 함부르크에 학교가 지어졌다. 그러나 이런 포교 활동을 기독교 전도의 역동적 조직과 기술에 비교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대체로, 현대화된 불교조차도 조직에 있어서 약하다. 그런데 조직적 전도활동의 성공 여부는 주로 포교 단체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두드러진 사실에 직면케 되는데 그것은 불교가 자발적 호소, 전혀 비조직적이고 우연적인 수용에 의해 전 유럽에 퍼졌다는 것이다. 불교의 성공적인 전도란 전혀 강요되지 않은, 그리고 그 접근에 있어서 무척 다양한 것이었다. 학적인 저술, 불교 원전의 번역, 붓다의 생활과 가르침에 대한 문고본 입문서, 여러가지 불교 원전에서 뽑은 텍스트북, 라디오와 텔레비젼 방송,불교국 여행,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교 명상의 갖가지 방법의 발표 등, 이 모든 것이 불교가 서양인의 학문적 그리고 종교적 의식에 침투하도록 도와 주었다. 종교사의 관점에서 볼때 이것은 극히 역설적인 현상인데, 왜나하면 불교 문헌과 사상은, 동아시아 불교국들이 기독교 전도사들에 대해 느낀 본능적인 저항도에 반비례하여 서양에서 받아 들여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저항이란 공공적 제도로서의 기독교 교회에로 향한 것이었다. 오늘도 불교의 많은 정신적 지도자들은 예수의 모습을 신약을 통해 알려진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와의 진정한 조우를 위한 출발점으로서 마이스터 엘허르트, 혹은 타울러의 기독교 신비주의를 통해서도 바라본다.

  6  불교에 영향 받은 문화 영역

  아마도 서양에 있어서 다른 어떤 문화 생활이 영역보다도, 현대 심리학, 정신요법, 그리고 정신의학이 불교의 영향을 느끼고 있다. 프로이드,아들리, 융에 의한 무의식의 위대한 발견은 인간행위 밑에 깔린 충동, 예술적 지적 이미지와 관념의 근원, 심리적 고난과 육체적 질환의 원인 등, 여지껏 탐구되지 않은 영역으로의 길을 닦았다. 이 무의식의 수평으로의 돌파는 유럽사상가들에게 갖가지 동양의 명상 형태, 무엇보다도 불교적 명상의 의미를 깨닫게 햐ㅐㅆ다. 이 오랜 훈련은 무의식에 대한 깊은 지식으로 인도할 뿐 아니라, 무의식적 마음의 이미지와 감정, 정열, 직관을 의지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으로서도 공헌한다. 무의식의 심리학은 동야의 종교, 특히 불교가 유럽 과학엔 거의 감추어져 온 영역에 대해 방법적인 심적 훈련을 발달시켰다는 것을 알고는 경탄했다. 그리하여 동양적 명상을 유럽의 정신요법에 합병시키려는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졌다.

  불교는 또한 서양 전통의 또 다른 분파, 즉, 기독교 명상을 발달시키는데 하나의 기동력으로서 봉사했다. 서양의 기독교 교단 내에서의 종교 생활은 근래에 더욱 더 지적으로 되어 왔다. 신학과 교리의 지배 아래서 한 때 그토록 인기 있었던 영적 훈련, 명상 형태, 헌신적 기도는 대체로 망각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모델 가운데서 기독교적 종교 생활은 신앙 생활과 종교적 의식을 위해 체계적으로 수행되는 명상의 중요성을 재발견했다. 사실 불교적 형태의 명상은 오랫동안 동면했던 기독교 명상의 전통을 소생시키는 직접적 자극이 되었다.

  한 예는 오랫 동안 일본에 머무르며 좌선(坐禪)을 수행한, 레주이트 신부, H. M. 에노미어 라쌀의 저서이다. 그는 수년간 유럽에서 기독교인과 서양인을 위한 선(禪)에 대해 많은 대중적 강의를 했다. 열성적인 국제적 청중들과 그의 저서의 독자들은 그의 저서 속에서 기독교적 깨달음의 길을 발견한다. 그들의 재정적 지원으로 그는 1970년 도오꼬 부근의 산에 기독교 선 센터를 세웠다.

  이런, 그리고 유사한 방식으로 기도와 경건의 기독교적 전통의 오랫동안 상실했던, 혹은 개발되지 못했던 요소가 불교로부터 새로운 고무를 받았다.

  불교와의 이 강한 조우가 오늘날 종교적 지식의 일반적 상황에 있어서 또 다른 변화의 징후를 전시해 준다. 18세기 계몽기 동안에 비기독교적 종교에 대한 지식은 소수 학자들 사이에서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계몽기에 살고 있어서, 그런 지식은 모든 교육적 배경의 가락 사이에 더욱 더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종교들 사이의 만남과 진전하는 대화는, 매스 미디어를 위한 흥미 있는 주제일 뿐 아니라, 고등 교육에 있어서 정상적인 종교 교육에서 인정된 사실이며, 그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정보의 흐름에 대한 이유의 하나는 힌두교나 불교와 같이 한 때 사멸된 것으로 선언되었던 많은 아시아의 종교들이 완전히 재흥하여 기독교적, 그리고 기독교화된 땅에서 전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또 다른 이유는 현대 기술과 경제에 의해 초래된, 문화의 세계적 교환과 통합의 과정에 근원한다. 이 세계적 과정의 일부로서, 종교 역시, 제도적 지평에서와 그리고 다른 종교관과 실천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문화적으로 혼합된 인구의 결과라는 양면에서 활발한 교류에 들어가고 있다. 이 일반적인 상황이 많은 새로운 과제와 더불어 기독교와 동방 종교 사이의 대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불교사상의 서양 문화 생활 속으로의 유입 밑엔 한층 더욱 의미심장한 역사적 과정이 있다. 즉, 바로 유럽 문화의 한계에 대한 의문이다. 기독교와 서양 문명에 대한 모종의 소박한 주장이 유럽 식민지주의와 기득적 신앙의 전도라는 제목 하에 초기의 만남을 지배하였다. 오늘의 태도는 이전의 접근법에 의문을 품으면서 새롭고 더욱 참다운 동과 서의 사상의 만남의 시작을 보여 주고 있다. 실제로 유럽 문명 자체에 향한 비판적 태도는 19세기 초에 일어났으나, 이런 의식을 정착시킨 것은 일차 세계 대전이었다. 서양 문명에 대한 비판의 가장 중요한 주창자의 한 사람은 철학자 맑스 쉘러이었다. 1929년 그는, 그때와 같이 오늘에도 정당한, 그리고 불교의 영향력을 현저히 하도록 도와 준 말을 하였다. 〈보상의 시대에 있는 인간〉이란 엣세이에서 쉘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일방적이고 밖으로 향한 확장의 과잉활동적 과정인 전 서양 문명의 발전이 만일 우리의 미개발된 무의식적 심리학적 삶에 대한 내적 통제의 보충적 기술, 명상술, 영혼의 탐색, 인내를 잃는다면 궁극적으로 부당한 수단을 사용한 시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에 오늘처럼 심각히 직면한 적이 이전엔 결코 없었다. 우리는 보편적 생명에 있어서 모든 생명의, 그리고 영원한 정신에 있어서 모든 마음의 커다란 보이지 않는 유대를 정시(正視)하도록, 그리고 동시에 세계 과정과 그 최고 원리의 현증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