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불교] 서양 불교의 발전(4)

2009-03-29     이지수 역

4 독일 문화 생활에 대한 불교의 영향

위대한 동양 종교에 대한 인식은 서서히 독일문화 생활에 침투했다. 헤르더(Herder), 칸트(Kant), 헤겔(Hegel)은 얼마간 인도 철학과 종교에 흥미를 가졌지만, 이들 사상가의 견해란 너무도 제한된 것이어서, 그들은 힌두교를 불교와 구분할 수도 없었다. 헤겔은 손과 발과 팔을 꼬고 발가락을 빨고 앉아 있는 선정에 잠긴 붓다에 대해 말했다. 분명 그는 발가락을 빨고 있는 어린 아기 끄리쉬나의 상과 명상하는 붓다의 모습과 혼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헤겔에게 힌두교보다는 더 나은 인상을 주었다. 사실 헤겔이 「민중의 아편」이라는 종교 개념을 처음 발전시킨 것도 그의 힌두교에 대한 비판에서였고, 칼 맑스는 후에 기독교를 특징짓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했다. 힌두교에 반하여, 헤겔은 불교를 부정적인 영혼으로부터 긍정의 의식으로 인도하는 종교로서 묘사했다.

19세기 독일 사상에 불교의 가장 강한 영향은 아마도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칸트와 헤겔이 여행담으로부터 인도에 관한 지식을 주워 모은 반면, 쇼펜하우어는 인도 전통에 대해 점차 자라나는 문헌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었다. 그는 와이마르의 동양학자인 프리드리히 마이에르에 의해 고대인도에 소개되었고, 그 후 인도 철학에 대한 열성적 흥미를 결코 잃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긴 했지만 인도에 간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서재의 작은 단 위에 금을 입힌 불상을 모신 첫 번째 독일 철인이었다. 그러면서도 쇼펜하우어는 그가 연구한 인도의 두 형이상학적 가르침 즉 베단따(Vedanta)와 불교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차리리 그는 둘 모두로부터 자신의 견해에 일치하는 것을 취했다.

불교와 기독교의 동일시는 쇼펜하우어의 견해를 암시하고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의 46장 <삶의 허무와 괴로움에 대해서>에서 기독교는 염세적 종료로서이고, 따라서 불교의 자매이며, 둘 모두가 인간의 죄악성에 대한 가르침으로부터 시작한다고 기술한다. 이 저서 속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유사한 경향이 계속 비교되고, 세계 부정과 생명의 거부 종교로서 동일시된다. 기독교와 불교의 이 동일화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서 속에서 상세히 반복된다. 쇼펜하우어의 영향하에서 니체는 처음으로 「부정의 종교」에 자신을 양도하고자 시도했으며, 극히 적은 수면과 육체적 혹사의 형태로 극단적 고행을 실천했다. 후에 그는 이런 태도를 버리고, 생명 부정에의 의지 대신에 힘에의 의지를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쇼펜하우어의 전 생활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며, 그러나 그것은 그가 나름의 것으로 선택한 사상에 반하는 부정적 이해였다. 「쇼펜하우어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기독교와 그 아시아적 관계에 대해 정당하게 평하지 못한다고 나는 믿는다.」 니체의 반 기독교적인 글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두 개의 위대한 「허무주의적」운동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기독교의 우수성을 이루는 것, 즉 생명에의 의지의 의식적인 포기는 니체의 눈에는 근본적 타락이며, 「의지의 커다란 질병」이었다.

니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견해에 있어서도 쇼펜하우어의 제자였다. 즉, 예수의 인간성은 철저히 붓다와의 유사성에서 판단된다.

현대 독일 문화생활에 대한 불교의 영향은 주로 독일 학자들의 중요한 성취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 그들은 불교의 원전을 밝히고, 이 가운데 많은 것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대중이 불교 세계에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이들 학자들이 그들이 연구 주제에 대하여 느꼈던 내면적 공감이 독일 불교학의 두드러진 특색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학적 활동을 통해서 불교도가 되었고, 불교적 명상을 위한 센터를 만들었고, 협회를 세웠다. 빨리 경전으로부터의 가르침을 수권으로 편찬한 비엔나 학자 칼 오이젠 노이만(Karl Eugen Neumann)의 제자인 칼 쟈이덴스튀커(Karl Sedenstücker)는 독일에서 불교도 협회를 시작했다. 베르린의 의사로서, 수따 삐따까(Sutta Pitaka, 빨리 經部)로부터 많은 번역, 혹은 설교집을 출판한 빠울 다휼께(Paul Dahlke)는 베르린 프로흐나우(Berlin-Frohnau)에 불교 명상 센터를 만들었다. 불교에 관한 많은 저서의 저자인 게오르그 그림(Georg Grim)은 테라와다협회의 창시자가 되었고, 그 본부는 암메르 호의 우팅(Uting)에 있다.

꼭같이 특기할 만한 것은, 불교에 관심을 돌린 몇몇 학자들은 실제로 극동과 세일론, 버마, 티벳, 중국으로 여행하였고, 그 곳에서 불교 사원에 입단하여 불교 승려가 되었고, 사원 공동체의 생활 가운데서도 불교의 가르침을 독일어와 영어권의 나라에 펴기 위해 학구를 계속했다.

이런 사람 가운데엔 헤쎈(Hessen)에서 카톨릭으로 태어난 안톤 왈터플로루스 궤트가 있는데, 그는 붓다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1903년 세일론의 한 절에 수자로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냐나띨까(Nyanatiloka, 三界의 智者)라는 법명을 받았다. 불교 경전의 번역가이며, 독일어와 영어로 많은 논문을 쓴 그는 또한 스리랑카의 섬, 도단두와(Dodanduva)에 있는 암자에서 유럽 승려들의 종교적 교사로서도 역할하고 있다. 붓다의 입적 2,5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954~56년에 랑군에서 열린 여섯 번째 불교 대회에서 불교 경전의 새로운 편집과 그것의 유럽, 아시아 제 언어로의 정확한 번역이 냐나띠로까를 수반으로 하는 학자단에 위탁되었다.

냐나띠로까의 제자이며 계승자인 냐나뽀니까(Nyanaponika)도 독일 불교 승려로서 스리랑카의 깐디 부근의 숲 속 암자에서 엄격한 테라와다의 사원 규율에 따라 살고 있다. 그는 영어와 독일어로 수 권의 불교 서적을 간행했다. 유명한 저술가이며 티벳 불교의 교사인 라마 아나가리까 고빈다(Anagarika Govinda)도 독일 가계의 태생이다. 베르린 은행가의 딸인 피아니스트 엘제 부흐홀츠(Else Bucholz)는 1926년 이래 우빠라와나(Uppalavanna)라는 법명을 갖고 여승으로서 스리랑카의 암자에서 살았다.

현대 매스 미디어가 불교 보급에 상당히 기여하였다. 근래까지도 아시아의 위대한 종교에 대한 연구 결과는 인도나 아시아의 언어를 아는 동양 철학과 종교에 대한 소수의 전문가들에게만 알려졌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 학자의 저서와 번역이 저렴한 가격의 문고본으로 출판되어, 예측키 어려운 숫자로 각 계층의 독자에게 이를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불교에 대한 얼마간의 지식이란 일반 교육의 일부가 되었다. 현대적 미디어가 나타나기 전엔 이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아시아의 불교 인구 가운데의 정치적 사건들, 2차 대전 후 동남아시아에서 새로운 독립 불교국의 수립, 전세계의 정치에 의해 여지껏 거의 터치되지 않았던 중앙 아시아의 불교국에로의 정치적 관심의 이동, 중공의 티벳 점령과 네팔 부탄에 대한 중공의 위협, 월남전과 월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있어서 불교의 역할, 무수한 불교 예술 전시, 이 모든 것이 오늘날 세계의 안목을 불교로 돌리는데 많이 기여했다.

처음엔 관심이 동남 아시아의 테라와다 불교에 집중되었다면, 최근에 불교와의 조우의 더욱 강력한 국면이 일본 마하야나 불교, 무엇보다 선불교에 집중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