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성사

열반종주(涅般宗主

2009-03-29     관리자

비록 백제와 고구려는 한 형제 나라이지만 서로가 적대시 하여온 지는 이미 오래였다.

  스승인 보덕 화상은 당대 최고의 고승으로서 온 국민의 숭앙을 받는 스님이었다.

 고구려의 보장왕(寶藏王)은 즉위한 뒤 얼마 동안은 불법에 귀의하여 선정을 베풀더니, 몇 해 안 가서 도교(道敎)의 일파인 오두미교(五斗米敎)에 심취하기 시작하여 결국은 국정을 전폐하고 장생불사(長生不死)니 선술(仙術)이니 하는 것에 미쳐 버리고 말았다.

 보덕 화상은 조국의 장래가 염려되어 국왕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상감마마, 국정은 어이시고 날마다 궁중에서 기도나 드리고 굿이나 하시옵니까? 어서 미몽에서 깨사이다."

 "스님은 가셔서 수도나 하시오."

 왕사로 모시던 국왕은 화상의 말을 외면하여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덕 화상은 두 번 세 번 아니 열 번도 더 충간했다.

 "상감마마, 책임이 막중하십니다. 칠백 년 사직을 생각하옵소서. 일신이 신선이 되거나 장생불사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일이옵니다.

 지존의 위에 계오신 마마께서  나라를 염려 않으시면 천추에 씻을 길 없는 한을 자초하게 될 것이옵니다. 통촉하소서."

 예로부터 충신의 말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라 하던가.

 보장왕은 여러 차례 간함을 듣자 비위에 거슬렸던지 나중에는 화상을 상대해 주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보덕 화상은 나라가 망하는 꼴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고국을 떠날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보장왕은 여러 고승들이 번갈아 가며 충간하는 것이 못마땅 해서 차츰 불교를 싫어하더니 결국은 탄압하기에 이르렀다.

 왕은 성내의 여러 절을 강제로 폐하여 오두미교의 본당으로 만들고 그 교의 도사(道士)들과 어울려 날마다 북 광쇠를 울리며 천제(天帝)에게 기도나 드리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오두미교란 원래 도교(道敎)의 일파로서 도교의 근본 사상은 아에 찾아볼 길없고 다만 광적인 기도행위로 인심을 현혹시켜 사회와 국가를 혼탁하고 삿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왕이 이렇게 삿된 수렁에서 헤어날 조짐이 없게 되자 여러 고승대덕들은 장탄식을 하며 당나라로 가거나 신라, 백제로 내려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국을 떠나기가 아쉬운 고승들은 깊은 산중으로 몸을 숨기고 세상일에 귀를 막고 눈을 감아 버렸다.

 이런 판국에 보덕 화상은 상수제자들을 불러 앞으로의 대책을 의논하였던 것이다.

 제자들의 대부분은 스승의 의견대로 같은 혈족의 나라인 백제로 가자는 데 동의하는 것이었으나 유독 계육 비구만은 신라로 가자고 우겼다.

 "너희 대다수가 내 의견과 같으니 그럼 백제로 가기로 하겠다. 그런데 백제의 어느 지방으로 가는 것이 좋을까? 누가 직접 돌아보고 오는 게 좋겠구나."

 이번에는 지수(智藪)라는 제자가 말한다.

 "제가 오 년 전에 나라의 명을 받고 백제의 군사시설을 탐지하러 갔을 적에 완산주(完山州)의 고대산(孤大山)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고대산은 일명 고달산(高達山)이라 하옵는데 그 산의 생김새가 이곳 반룡산(般龍山)과 너무도 흡사하여 자못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기왕 백제국으로 가시려면 그 곳으로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화상은 무릎을 치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저러나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니 떠나긴 떠나야겠는데 이 정든 절을 어떻게 놓고 갈까요?"

 가장 나이 어린 보명(普明)이 넋두리 겸 어리광 겸 하여 이렇게 말하자 여러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화상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불쑥 말하기를

 "너희가 그토록 아쉬워 한다면 반룡사(般龍寺) 전체를 떠메고 옮겨 가자구나."

 "스님, 이 절을 떠메어 옮길 만한 도덕이 있다면 구태여 외국으로 나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예 상감마마를 제도하여 외도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옵지요."

 이 말에 제자들은 스승의 앞인 것도 잊고 모두들 소리내어 웃는 것이었다.

 "너희는 아직 신통력과 도력을 분별하지 못하는구나. 이 가람을 백제로 옮긴다는 것은 곧 신통력이고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판단하여 불법을 깨친 힘을 도력이라 한다.

 물론 부처님께서는 도력과 신통력을 겸비하신 어른이지만, 범부 중생으로서는 두 가지를 겸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라."

 "그럼, 스님께서는 겸비하셨습니까?"

 화상은 안색을 굳히며,

 "그렇게 함부로 묻는 것이 아니다.

성인이라야 성인을 아는 법. 깨친 이가 아니면 남의 깨침을 어이 알겠는냐?"

그러니 내가 깨치고 못 깨친 것을 나한테 물을 것이 아니라 너희 스스로가 깨쳐서 살펴 보아라.

 "스님, 아무튼 이 절을 백제국으로 떠메고 가시긴 가시는 것입니까?"

 이튿날 새벽 제자들은 예불을 모시려고 밖으로 나왔다가 제각기 고개를 갸웃등거리며 이상한 상념에 잠기는 것이었다.

 어제까지 도량에 깔려 있던 흰눈이 밤사이에 모두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예불을 모시고 글방으로 돌아온 제자들은 비로소 말할 자유를 얻자,

 "간밤에도 눈이 하얗던 것이 밤사이 녹았어."

 "글쎄 말이야. 매섭게 차갑던 바람도 제법 훈훈해진 것 같구."

 "기후가 갑자기 두 달은 지레 다가온 것 같은 걸."

 "스님께서 남방으로 가자 하시더니 밤 사이 와버린 게 아냐?"

 "아무리 신통력이 장하시다 해도 집까지 옮길 수야 있나?"

제자들은 경전을 읽는 데는 마음을 쏟지 않고 잡담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때, 방문이 열리며 스승인 보덕 화상이 들어와서는,

 "너희는 이제 할 일이 많아졌다. 백제국과는 원래 한 자손이었지만 지리 풍토가 달라서 언어도 상당히 다르다. 그러니 계육(契育) 너는 백제 말을 대중에게 가르쳐 주려므나."

 "스님 언제 가게 되기에 그렇게 미리 서두십니까?"

 "언제 가다니? 너희는 꿈을 꾸느냐? 여기가 바로 백제국인 걸."

 "예?:

 그들은 차츰 환해지는 창문에 일제히 시선을 돌리더니 모두들 문을 열고 나간다.

 "아하…."

 산봉우리들이 반룡산과 비슷하긴 하였지만 조금씩 다른 것이 눈에 띈다.

 "스님께서 밤사이에 방장(方丈)을 날려서 옮겨 오셨구나."

 "오! 정말 비래방장(飛來方丈)인결."

 "아ㅡ이제는 불법을 탄압하는 보장왕을 보지 않게 되어서 시원하겠다."

 "상감마마도 마마이시지만 연개소문(淵蓋蘇文)장군이 더 나빠요. 일국의 승상(丞相)으로 병권까지 한 손아귀에 쥐고 왕에게 강압적으로 오두미교를 믿게 하지 않았느냐 말이야."

 "아무튼 스님께 감사를 들자."

 그들이 다시 큰방 쪽으로 다가오니 스승은 툇마루에 서서 머언 북쪽 하늘에 눈을 준 채 백팔염주를 굴리고 있었다.

 제자들은 일제히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 보덕 화상은 제자들의 절을 받으며 구슬 같은 눈물을 떨구었다.

 "아 ㅡ 내 조국은 미구에 망하리로다…."

 화상은 기어이 소리내어 통곡했다. 이를 지켜보는 제자들도 땅에 엎드린 채 도량이 흔들리도록 방성통곡하는 것이었다.

 "아! 내 조국아, 칠백 년 사직이여…,"

 스승과 제자들의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황룡사에 당도한 원효는 먼저 각 법당을 두루 참배하고 대중들의 인사를 받았다.

 분황사를 떠난 지 오 년만에 다시 절로 돌아온 셈이다. 그러나 원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사문(沙門)의 그 마음뿐이었다.

 새로 한지(韓紙)를 가지고 도배한 조실방에 들어서자, 그를 찾아왔다는 백제의 승려를 불렀다.

 백제의 승려는 얼마 안 있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삼배의 절을 공손히 하고 꿇어 앉으니 원효가 먼저 입을 연다.

 "소승이 원효라는 중이요. 멀리서 찾아 주시어 감사합니다."

 "예, 도예(道譽) 익히 듣사옵고 이렇게 뵈옵게 되니 무한히 영광이옵니다. 소승은 백제국 완산주 고대산 보덕 화상의 제자 계육(契育)이라 합니다."

 "예, 계육 스님이군요. 멀리 오시느라 노고 많으셨겠소이다."

 "큰스님께서는 말씀을 낮추십시오. 소승은 아직범부이옵니다."

다행히 어려서 당나라에 유학할 인연이 있어서 몇 해 살다가 왔습니다. 그 당시 명랑 화상(明郞和尙)을 뵈옵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소승이 귀국하기 전에 귀국의 젊은 학승을 만나서 큰스님의 말씀을 익히들었습니다."

 "그 스님이 누구던가요?"

 "의상 스님이라구요."

 "의상이요? 아! 우리 사제를 만나셨었군요."

 "아주 훌륭한 구도자이더군요."

 "우리 의상은 앞으로 대성할 겁니다."

 "의상 스님은 큰스님을 당대 제일이라고 말하더이다. 그래서 늘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던 차 소승의 스승께서 다녀오라 하시기에 이렇게 뵈올 수 있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보덕 화상은 고구려에서도 으뜸가는 큰스님이신 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나 고국을 등지셨으니 불편하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실 텐데 요즘 법체 무양(無恙) 하십니까?"

 "네, 그런데로 수도에 별 지장이 없이 지내십니다만 요즘 백제국의 국왕도 덕을 스스로 손상하고 있으니 이 점을 심히 염려하고 계십니다."

 "예, 그러십니까."

 원효는 이 말을 듣고 내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