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경북 문경 윤필암

고사의 향기/천년을 우뚝 솟은 구도심 사불산 윤필암

2009-03-26     관리자

  한바탕 소나기라도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무더운 구월을 가로질러 잠시 쉬어가는 문경 이화령 마루의 나뭇그늘.

  더위를 식히고, 다시금 산허리를 구불구불 따라 뜨거운 바람을 등지면서 윤필암(閏筆庵)으로 달려간다.

  경북 문경(聞慶) 산북면 사불산(四佛山) 중턱에 자리한 윤필암. 이곳은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창건된 유서 깊은 가람이다.

  윤필암이 자리하는 문경 역시 부족국가 시대에는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이라고 불렀던 지방으로 신라시대엔 관문현(冠文縣)과 관산현(冠山縣)으로, 고려 초기에는 문희군(聞喜郡)으로 현종 9년에는 상주(尙州)에 소속시켰다가 지금 이름인 문경으로 고쳐 부르고 조선 고종 32년에는 군으로 승격된 고도(古都)이다.

  이곳 사불산은 '고려(高麗)스님 진정(眞靜)의 유산기(遊山記)에 산양현(山陽縣) 북쪽에 산이 있는데 동쪽으로 죽령(竹領)에 연하고 남쪽으로 화장(華藏)을 끌어 당기었으니 이 산의 이름은 사불(四佛)이며 혹은 공덕(功德)이라고도 한다'라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있어 사불산이란 이름 말고도 공덕산이라는 이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윤필암이 고려 우왕 때 창건되었다고는 하나 가람의 모습이 갖취지고 대중이 함께 살게된 것은 각관(覺寬)선사때의 일이다. 그러나 구전으로 전해지기에는 원래 각관 선사 창건 이전 윤필암은 의상 스님의 이복 동생이었던 윤필 거사가 수행하던 토굴이었으며 윤필암 가까이에 있던 원적사와 심원사에서는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이 서로 도반이 되어 정진하였다 한다. 토굴을 짓고 수행정진 했던 윤필 거사는 그 수행의 경지도높고 많은 수행인의 모범이 되었기에 거사의 이름을 빌어 토굴의 이름을 윤필암이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처음부터 선원(禪院)으로 알려진 이곳은 원래는 비구스님께서 주석하였으나 일제 시대 이후부터는 비구니스님께서 정진하시는 선원으로 바뀌고 남한일대의 비구니스님 선원으로는 수덕사 견성암 다음으로 꼽을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고 한다.

  지금은 가까이에 있는 대승사(大乘寺)의 산내 암자이긴 하지만 40여명의 눈푸른 비구니스님들께서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용맹정진하시고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가람이다.

  돌담으로 빙 둘려 하나의 성(城)과 같은 이 곳에 맨 먼저 큰 바위 밑 연못이 산사의 정취를 더하며 반기고 돌층계를 올라 경내 왼편에는 사불전(四佛殿)이 웅건히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일반인 통제를 삼가하는 스님들의 정진 마당인 원주실, 선원, 요사채와, 그 위 오른편으로는 삼성각, 관음전이 한층 가람의모습을 빛내고 있었다.

  사불전은 진평왕의 100일 기도처였고, 진평왕의 어머님께서 사불 부처님을 향해 100일간 기도한 까닭에 대비터라고 이름했던 곳에 불사한 것으로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한 사불 부처님이 법당에서 바로 보일 수 있도록 법당 한쪽 벽면을 유리로 하였다.

  윤필암 정동쪽에 15분여 거리에 우뚝 솟아 있고 신라 진평왕 9년(서기 587년)에 네 분의 부처님이 땅에 내려 오셨다는 사불 부처님에대한 기록이 <삼국유사>에는

  "죽령(竹領)의 서쪽 백리 쯤에 우뚝 높이 솟은 산이 있다. 진평왕 9년 갑신에 홀연히 큰 돌 하나가 사면이 모두 한길이나 되고 사방에 여래상이 새겨지고 붉은 비단으로 싸여 하늘에서 이 산의 정상에 떨어졌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수레를 타고 가 우러러 예배하고 곧 절을 그 바위 밑에 창건하고 대승사(大乘寺)라 하였다. 연화경(蓮花經)을 강론하는 비구승 망명(亡名)을 청하여 그 절을 맡게 하고 그 돌을 청소하고 공양하여 향화가 끊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그 산을 사불산(四佛山)이라 한다. 비구승이 죽은 뒤에 장사하였더니 무덤 위에서 연꽃이 피었다"라고 적혀 있다.

  스님들께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 잘 사는 도량으로 모범이 돼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도량이 대승사라 한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대로라면 대승사가 사불 부처님과의 인연이 더깊겠지만 지금은 사불상이 대승사의 암자인 이 곳 윤필암에서 더욱 가깝고, 인적마저 끊어진 깊은 산중에 많은 불사를 이루고 스님들의 정진터가 될 수 있었던것은 모두가 다 이 사불 부처님의 위신력이라고 윤필암의 스님들은 믿고 계신다.

  윤필암이 지금의 가람규모를 갖추고 많은 스님들의 선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까지에는 몇몇 분 스님들의 원력과 각고의 노력이 컸음을 스님들의 얘기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10년전만 해도 선원인 까닭에 해제 때만 되면 사람이 살지 않아 살림이 엉망이었다. 그런 까닭에 9년전 25명의 스님들께서 6·25이후처럼 이 곳 선원이 몇몇 스님네들이 사는 곳이 되어서는 안되겠고, 옛날처럼 대중이 많이 모여 열심히 수행정진하는 수행터가 되어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고는 스님들이 3년동안 함께 살면서 감원(監院)스님이 나타날 때까지 절을 지키자고 결사를 맺었다.

  그러던 중 1983년 이곳 산에 벌목작업이 있어 얼마간의 목재가 윤필암 불사용으로 나왔다. 당시 윤필암의 본사였던 직지사 주지 스님께서는 병든 목재가 더욱 못쓰기 전에 윤필암을 불사하고 불사비용은 자체내에서 해결하라고 하셨단다.

  만약 불사를 하지 않으면 불사할 능력이 없음으로 알고 외부에서 감원 스님을 데려와 불사를 하겠다는 본사 주지 스님의 말씀을 따를 수는 없어 스님들께서는 첫 살림을 살았던 은우(恩雨)스님(지금의 감원스님)을 적임자로 뽑아 불사를 시작하였다.

  선객 스님들께서 기와불사 모연문(募緣文)을 만들어 비구니 선원과 암자를 찾아다니며 어렵게 기금을 모았고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부를 불러 불사 하나 하나의 일들을 모두 시킬 형편이 안돼 비구니스님들께서 어깨너머로 배운 도배, 요사채 창문과 문 니스 칠하기, 선방 장판 깔기, 욕실타이루 깔기 등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두 스님의 손길로 불사를 이루어 갔다.

  불사를 하던 중에는 여러번의 사고가 있었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임에도 인부들이 올리던 기와에 덮개를 씌우지 않고 내려와 한밤중 폭우 속에 다시 지붕 덮개를 씌우다가 그만 인부가 추락하였다. 크게 다치는 위험한 곳이었음에도 찰과상 정도로 그쳤고, 진입로 길 불사 때에도 사람이 공중에서 몇 바퀴돌고 경운기 밑에 깔리는 큰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찰과상에 그치니 스님들이 놀라고···, 모든 대중이 부처님의 커다란 위신력에 다시금 감사함을 다지게 되었다 한다.

  이외에도 동지 때를 기해서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덜고 불연을 맺는 선연(善緣)을 베풀기 위해 스님 전부가 탁발을 나간다. 교통이 불편해 한 번 찾아오기가 무척이나 힘이 든 이 곳 주민들은 동지 때만 되면 스님들을 반겨 맞이해줌이 너나할 것없이 한 가족처럼 따사로와 정겹기가 그지 없다 한다.

  "산중에 살면서 장애가 없이 공부하고 있으니 어서 빨리 이곳 모든 스님들께서 득도할 수 있도록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산중에 있는 스님네가 산중인답게 질서를 지켜 각자 자기 자리에서 수행해 나간다면 이것이 바르게 수행하는 길이요. 또한 바로 포교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윤필암은 불사가 잘 되었다는 곳이라기 보다는 열심히 공부하는 수행처로 남고 싶습니다. " 감원 스님의 말씀이다.

  인적이 끊긴 깊은 산중의 윤필암.

  오직 화두일념으로 정진하고 계시는 선방 스님들의 의연한 모습은 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구도심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그 구도열은 뜨거운 여름날의 더위를 오히려 시원하게 식혀주고 있었다.

  윤필거사의 구도열은 이생으로 이어져 윤필암 스님들의 깨침의 그 날은 더욱 빨리 올 것이고, 그 깨침의 소리는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 되어 울려 퍼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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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암은 경북 문경군 산북면 전두리 17번지로 전화번호는 (0581) 52-7110이다.

  서울에서는 구이동 버스터미널에서 점촌행 버스를 타고(3시간 30분 소요) 점촌에서 하차하여 그곳에서 창구행 버스를 이용 대승사 입구에서 하차해 1시간 정도 도보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