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신앙은 진리의 삶

불광법단

2009-03-25     관리자

불법과 진리와 나는 하나
부처님 법을 믿고 배운다고 하는 자세를 살펴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개인위주의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개인위주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반야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나 개인과 집안은 나라와 함께 잘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나라와 사회를 함께 생각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나라와 이웃은 도외시하고 자기본위의 믿음의 생활만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와 부합되지 아니하는 생각을 가지고 지내는 것이 됩니다.
불교뿐만 아니고 어떠한 종교이든 신앙을 통해서 사람들을 정화시키고 사회 전체를 밝게 해서 개인과 세계가 하나의 진리를 구현해가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자기 개인이나, 자기 고난만을 생각하고 국가와 민족을 도외시하는 경우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바탕이 지혜롭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반야에 비추어진 참 진리를 근거해서 내 생명을 그 진리 바탕에다 설정해 놓고 생명을 진리로서 키우고 가꾸며 진리로 살아가는 이런 생활을 하면 개인과 사회와 국가가 하나로 이어지고 개인의 믿음이 진리의 믿음이고 개인의 성장이 전체의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마하반야바라밀 신앙을 기초로 합니다. 반야의 지혜로서 본 부처님과 자기와 진리와 세계를 믿는 것입니다. 이 바라밀이 본 생명과 개아(個我)는 단순한 개아가 아닙니다. 진리와 더불어 하나인 개아이고 조국과 겨레가 하나인 개아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반야바라밀 신앙이 개인의 완성과 사회의 발전과 민족의 번영과 국토의 완성을 한꺼번에 이루는 진리인 것을 알아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이 믿음을 힘써 행하고 널리 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믿음의 생활이 진리의 생활인 까닭에 이 믿음과 행에서 개인이 잘되고 민족이 번영하고 국토의 완성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바라밀 신앙의 행으로서 이뤄진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바라밀신앙 즉 불법신앙은 진리의 생활입니다. 해가 솟아오름으로 해서 모든 천지가 밝아지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리의 믿음을 갖고 생활할 때 그 사람 자신과 그 사람이 속한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나라가 동시에 밝아지는 것입니다.
개개인이 하는 것이 무슨 그런 힘이 있겠느냐 하겠지만 우리가 마음속에 확신을 갖고 믿고 기도하며 행하면 그런 위신력이 나오는 것이며 우주를 바꿀만한 큰 힘도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진리에 뒷받침되어 그 힘을 쓰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믿음 하나 하나가 진리세계를 열고 진리의 꽃을 이 시대 위에 피우게 하는 그러한 위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는 개인의 소망뿐만 아니라 나라의 번영, 사회의 발전, 세계의 평화, 불국토의 구현을 함께 발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큰 움직임이 태동하고 성취의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부처님과 더불어 하나이고 그러한 마음에는 부처님의 위신력과 진리의 위신력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믿음의 생활이 내가 잘됨은 물론 나라와 겨레와 세계가 동시에 잘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이렇게 다짐합니다. 태양이 허공에서 세계를 밝히듯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조그마한 가슴에만 두지 말고 우주의 중심에다 두고 진리를 굴려서 온 세계를 밝힌다는 긍지와 높은 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 긍정이 바른 자세
제일 중요한 것은 대 긍정입니다. 대 긍정은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내 생명이 부처님 생명이며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절대원만하고 구족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못 보고 관계없이 우리 존재의 실상은 진리다. 우리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서 우리의 생애는 밝게 열린다’ 이렇게 믿고 긍정하는 자세가 진리생활을 하는 첫째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되면 저절로 진지한 감사가 나옵니다.
이러한 믿음의 자세가 되어있지 않을 때 불평불만이 많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구해서 얻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 세계는 고의 바다요, 고통주머니이고 악이 충만한 업보중생이 사는 곳이 됩니다. 어두운 생각이 꽉 차서 절망적인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반야의 눈으로 보면 그 반대입니다. 우리들은 부처님에 의해서 진리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부처님의 눈, 부처님의 지혜, 즉 반야로 본 이 세계는 진리의 세계이며 실재의 세계이지만 범부의 눈으로 보는 이 세계는 변하고 흘러가는 세계며 고의 세계며 불행한 세계입니다. 이것을 실이 아니고 망견입니다. 참으로 있는 것은 반야바라밀이고 부처님께서 친히 보시고 일러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 ‘하나’로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인 무상의 진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서 믿고 감사하고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엔 불평불만의 여지가 없고 절망적인 생각이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불평불만, 절망, 고난, 온갖 장애 등 세간의 어두운 그림자는 태양보다 더 밝은 이 믿음 앞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이러한 큰 긍정을 통해서 우리들의 하루하루 생활이 불자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내 생명에 넘치는 부처님의 지혜와 위신력을 생각하며 ‘마하반야바라밀’하고 일심으로 염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이렇게 하는 사람, 이렇게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이 자기운명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사람입니다. 속된 말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수많은 고난이 덮쳐 오더라도 마하반야바라밀의 위력을 쓰는 사람에게는 걱정이 없습니다.
지난 번 성도재 법문 때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하에서 수행하실 때 마왕 파순의 수많은 군사가 와서 돌을 던지고 불덩어리를 던지고 활을 쏘면서 방해를 하였는데 그 모두가 부처님 앞에 와서는 아무 구실을 못하고 거꾸로 꽃이 되어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바라밀로 방패를 삼아서 대자비 선정에 드시니 밖에서 오는 온갖 재화가 재화 구실을 못하고 꽃이 되어 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마하반야바라밀을 굳게 믿고 그것을 받아들여 기쁨으로 생활하며 대자비심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 세간의 고난이 구실을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큰 긍정을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심 염송하며 환희가 충만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많은 부처님 설법 가운데서 부처님이 제일 많이 설하신 것은 반야법문입니다. 부처님의 설법 생애 중에서 반야경은 21년을 설하셨습니다. 반야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며 부처님을 탄생시키는 불모(佛母)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이 반야지혜를 통해서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반야를 배우고 이 지혜에 의존했을 때 비로소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반야를 이해하지 못하면 부처님의 법문도 이해하지 못합니다.「대반야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어찌해서 부처님이라고 하는가. 삼십이상, 팔십종호가 구족하신 그 뛰어난 상호 때문에 부처님이라고 그러시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부처님이시지 인물이 잘났거나 신통력이 있어서 부처님이 되신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반야바라밀을 배워 큰 믿음, 위 없는 법의 큰 승정을 굳건하게 하여야겠습니다.

마음을 정화하고 염불한다
다음은 안으로 살펴서 반성하는 것, 스스로 자기를 돌이켜 보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어두운 것, 미워하는 것, 남을 나쁘게 말하거나 생각하고 있는 것, 슬픈 것, 노여움, 대립관계에 있는 것 등 그 모두를 살펴보고 참회하고 그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반야바라밀의 대 지혜 대 진리와 어긋나는 것을 반조하고 반성해서 제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러한 수행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염송을 하는 우리 불자들은 진리의 은혜를 입습니다. 마음을 정화하지 아니하고는 진리의 은혜를 입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그 공덕을 입기가 어렵습니다. 반야바라밀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항상 자기를 반조해보고 참회하고 밝고 맑은 마음으로 일심 염불하여 성취하는 것이 우리의 수행이며 지혜라 할 것입니다.
근일 20여 년 동안 항상 몸이 아팠다는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사생활이니까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그 분은 그렇게 몸이 아파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분 보고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감사하고 찬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은 그것이 안된다고 하더군요. 아니 된다고 그것을 그대로 자기 마음에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인가? 일심 염불하며 미움을 버리고자 하면 반드시 비워집니다. 이 세상에 미워할 대상은 없는 것입니다.
상대는 다 부처님이신데 그 부처님이 어떻게 하였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 마음속에 미움으로 정하고 그 미움을 놓지 못하고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의 가슴 속에선 진리의 꽃이 필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병이 생기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마음에 있는 어두움의 씨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다행히 그런 공부를 하여 잘 알기 때문에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고 항상 자기를 돌이켜보고 반성하여 자기의 운명을 바꾸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은 의사가 포기한 병도 낫게 하는 기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미움, 슬픔, 대립감정 등 어두움을 갖고 있는 한 밖의 햇살이 아무리 밝다 하여도 그 가슴에는 밝음이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크신 은혜와 진리광명에 대한 전면적인 신뢰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크신 은혜와 광명을 가슴속에 깊이 받아들여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바뀌고 온전한 자기로 회복되는 까닭에 병 같은 어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전법은 부처님에 대한 효도
우리는 진실한 믿음과 그에 상응한 생활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참으로 행복해지는 것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이만하면 불자라고 자위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좋은 일이나 이는 부처님의 은혜 가운데서 혼자 행복하게 사는 데 불과하며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데 미흡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처님이 뜻하시는 바 소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부처님의 원은 모든 중생의 어둠을 제거하고 반야의 밝은 등불을 달아 주는 것입니다. 모두가 성불할 사람으로서 완성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소망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당신이 직접 몸을 이 세간에 나투시고 45년간이나 설법을 하신 것입니다. 열반을 눈앞에 보시고도 설법교화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불법을 전해서 일체중생을 다 성취시켜주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참된 소망이십니다. 경에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래가 세간에 나투신 본의는 중생들로 하여금 불성을 깨달아서 불성에 들게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부처님의 사업을 이어받아 부처님의 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진짜 효자입니다. 내가 잘 살면서 부모님의 뜻을 이어받아 번창하게 하는 것이 효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큰 믿음과 큰 긍정을 통해서 감사한 마음을 내고, 일념으로 바라밀을 염송하는 구도정진의 생활을 하고 안으로 돌이켜 보아 자기 마음을 항상 청정하게 할 것이며, 큰 원을 세워서 행복해지고 그리고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부처님에 대한 효도다 이렇게 정리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부모님에 의지해서 성장합니다.
그러나 성장하면 부모님의 뜻을 받아서 자기가 커 나갑니다. 끝까지 부모님에게 기대고 매달려서는 자기 성숙이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는 진리로서 자기회복을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진리를 끊임없이 활용해서 이웃과 국토를 함께 밝히는 것이 불법인 까닭에 우리들은 그러한 방향으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생활, 진리의 생활을 해나가는 필수요건으로서 전법을 꼭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법을 믿든지 아니 믿든지 누구나 자기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자석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이 자석이 무엇을 끌어 당기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상태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두운 상태의 마음을 갖고 있으면 어두운 것을 끌어당겨서 불행해질 것이고, 반대로 밝은 마음 기쁜 마음 평화한 마음 번영되고 성공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갖고 있으면 성공하고 번영하고 행복하게 되는 일들을 끌어당길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인 까닭에 우리는 근본적으로 자기의 환경은 자기가 만들어 내는 자석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데 착안하여야 합니다.
이 힘을 올바로 써서 이 시대와 역사에 기여하는 사람으로서 크자면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깨달음의 지혜에 근거해서 마음을 닦아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환경을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불국토를 만든다고 하는 것도 결국은 불국토를 이룰 수 있는 요건들을 끌어 당겨서 만드는 것입니다.「유마경」불도품에 보면 보살이 성불할 때 어떤 사람들이 거기 모이느냐 하면 보살이 인행 시에 닦은 바 수행내용을 따라 그에 상응한 수행을 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즉 보살이 보시공덕을 닦았으면 보살이 성불할 때에 보시공덕을 닦은 중생이 그 국토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살펴볼 때 우리가 한 가족으로 만나 같이 사는 것도 같은 인연의 소치이며, 한 법회에서 만나 같이 불법을 배우는 것도 한 국토에 같이 사는 것도 다 그러한 깊은 인연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자기환경을 끌어당기는 자석적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불법을 올바로 배워서 인류와 겨레와 사회와 가정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되 그것이 진리에 근거한 참으로 평화롭고 번영되고 착한 마음으로 충만되고 있어야 환경도 그렇게 바뀌어 갈 것입니다.
불교를 믿건 안 믿건 이 사실을 깨달아서 자기주변의 행복을 끌어당기는 자석 구실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불자는 이 법을 알아서 널리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최소한 자기라도 그렇게 실천해서 자기와 이웃을 행복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재주있는 화공이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아서 자기 생각대로 자기환경을 만들어 갑니다. 이 세상의 어느 한 물건도 마음이 만들지 않은 것이 없다 하는 것이「화엄경」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누구라도 우리는 우리 마음의 자석적인 위력을 올바로 깨달아야 하겠고 마하반야바라밀로 자기 생명의 중심을 참되게 잡아가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우리 환경에 나타나는 원형입니다. 우리 마음이 자석과 같이 우리 주변을 끌어들여서 우리의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가운데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가 자기환경의 내용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든 자기가 소망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분명하게 마음에 그려야 합니다. 소망의 내용은 물론 스스로 이롭고 남도 이로운 진실한 것이어야 합니다.
신념을 가지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상상으로 추구하고 확신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할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우리 환경에 나타납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의 신념으로 바라밀의 무한공덕과 위신력이 자기에게 충만한 것을 생각으로 추구하면서 확신을 갖고 행동해 나갈 때 우리 환경에는 바라밀공덕이 구현됩니다.
우리는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이 반야바라밀 마음을 가짐으로써 바라밀공덕이 우리 주변에 꽉 차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불자들 가운데는 기적적인 경험을 하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낫기 어려운 병 중의 하나가 암입니다. 수술을 하고도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그런 병입니다.
그런데 고치지 못할 병에 걸렸던 봉천 법등의 본화(本和)보살은 나았습니다. 이 분은 ‘장암’선언을 받고 일주일을 울다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불자에게 실로 그런 병은 없다고 했습니다.
“부처님 세계에는 그런 것이 없다. 본화는 불자다. 부처님을 일심으로 믿는 사람에게 그런 병이 있을 리가 없다. 이것을 확실히 믿고 일심으로 반야바라밀을 염하라”고 했습니다.
본화보살은 앞서도 한 번 기도해서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모든 생각을 털어버리고 일심으로 반야바라밀을 염했습니다. 얼마를 지나서 가족들의 성화로 다시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병의 흔적이 없어진 것입니다. 의사도 ‘이상하다’고 하면서 반가와 했습니다.
본화보살은 ‘내 생명은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이다’를 굳게 믿고 떠오르는 병 생각을 떨쳐 버리면서 반야바라밀을 염했습니다. 주변 사람이 무어라고 하든 확신을 가지고 염불했습니다. 의사에게 장암이라는 선고를 받았지만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부처님에 대한 깊은 신앙 하나로 병을 고쳤던 것입니다.
‘우리는 나 혼자가 아니라 부처님 위신력으로 뒷받침되고 있는 나다. 나에게 불행은 없다’하는 확신을 가져야겠습니다.
우리는 반야바라밀의 무한공덕과 위덕이 지금 현재 내게 있다는 것을, 생명이 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듯이 의심하지 않고 믿어서 그것을 신념으로 행동하는 불자가 됩시다.
이렇게 해서 우리 생활과 환경을 바꾸어 가는 사람이 됩시다.
항상 기쁘고 밝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바라밀행자의 기본입니다.

이 글은 불광법회에서 행하신 광덕스님 법문을 편집부에서 녹음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