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불교문화

인도불교의 어제와 오늘

2009-03-25     관리자

  이 글에서 인도 불교문화라고 할 때 인도에서 발생하여 발전했다가 쇠퇴한 문화권만을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불교문화 중에서도 원시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같은 사상계통은 다른 필자들이 맡아 쓰고 있으므로 나는 불교미술에 국한할까한다. 그런데 나는 불교미술에 대하여는 잘 모르는 문외한이다. 다만 오래 동안 인도에 머물면서 불교유적지를 많이 돌아다녔고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경험뿐이다. 그래서 이 경험을 살리면서 상식적인 인도불교 미술론을 써 볼까 한다.

  인도불교 미술사는 대개 네가지로 시대구분(時代區分)을 한다. 고대기(古代期), 쿠샨왕조기, 굽타왕조기, 밀교기(密敎期)등 네 구분이다.  B·C 5세기부터 A·D 1세기에 이르는 고대기는 불상(佛像)이 없는 무불상기(無佛像期)로 특정지어지며 그 대신 불탑(佛塔)조성은 많았었다. 불탑중에서도 B·C 3세기 아쇼카왕의 석주(石柱)들은 천하의 일품이다. 아쇼카왕 이전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에도 기원정사, 죽림정사등 사원건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폐허가 되고 집터만 남아 있다. 반면에 아쇼카왕의 석주는 원형(原型)을 쉽게 알아 차릴 수 있을 만큼 잘 보존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미술품으로 아쇼카왕의 석주가 손꼽히는 것이다. 아쇼카왕의 석주에서 머리부분이나 기단부의 조각은 다분히 서방 퍼샤의 영향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30여개 석주중에서 가장 걸작품으로 알려진 사르낫, 즉 녹야원 석주의 머리부분에 조각된 위엄있는 네마리의 사자상이 퍼샤풍의 영향을 단적으로보여 준다. 이 네 마리의 사자상은 오늘 인도의 국장(國章)으로 모든 공문서와 화폐에 새겨져 있다. 왕권(王權)의 권위를 유감없이 상징하는 펴샤왕의 신성(神聖)을 읽는 느낌을 준다.

  이밖에도 다른 석주 머리부분에는 코끼리, 소, 말등의 조각도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불상이 조각되어 나타나지 않는 까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원만하고 위대한 인물인 부처님의 상은 불완전한 인간의 손으로서는 그대로 조각할 수 없으므로 불상조각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금기(禁忌)사항이었다. 불교 초기교단은 인간의 손으로 불상을 조각하므로 부처님의 완전무결한 인격에 손상이 갈까봐 두려워했다.

  수투파 즉 탑은 원래 죽은 시체를 매장했던 무덤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흙을 높이 쌓아올린 흙무덤이었으나 점차 기단부가 설치된 위에 원형이나 네모형 탑신을 앉히고 머리에 산개(傘蓋)같은 것을 얹어 놓은 형태의 탑으로 발전했다. 불탑 중 현존해 있는 발훈 탑도 탑신 자체는 완전히 무너졌으나 베디카(난순)와 탑문이 일부 캘커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베디카에는 부처님의 전기나 쟈타카(本生譚)등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물론 부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보리수, 법륜등이 부처님을 대신하여 상징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같은 무불상현상은 발훗 뿐아니라, 산치 아마라바티의 탑에서도 볼 수 있다.

  전형적 불탑으로는 산치 대탑을 들 수 밖에 없다. 산치 탑을 중심으로 B·C 2세기부터 1세기까지 많은 불교유적들이 그 주변에 모여 있었다. 대개 안드라국 샤타바하나 왕조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거대한 네 탑문과 베디카가 깍은 돌과 벽돌로 축성되었고 이 같은 불탑을 본존(本尊)으로 하고 주변에는 수도승과 참배자들을 위한 승방과 부속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부속건물은 대부분 목조였으므로 현존되어 있는 것은 집터 뿐이다. 그러나 탑을 중심으로 여러 승방이 배치되어 있는 사원가람형식은 석굴사원(石窟寺院)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산치탑의 탑문이나 베디카에 새겨진 조각은 아쇼카왕시대의 서방 퍼샤적 수법(手法)은 완전히 흡수 소화되고, 인도적 토착적 발생에서 이루어졌다는 특징이 있다. 고대 인도불교미술은 산치탑에서 절정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산치탑이 조각에 나타난 소재도 발훗과 마찬가지로 부처님 전기나 쟈타카에서 나왔다. 조각된 불상은 A·D 1세기 이후 쿠샨왕조때 서북지방인 간다라와 뉴델리 근처에 위치한 마투라에서 거의 동시에 출현됐다. 간다라는 오늘의 아프카니스탄의 남부와 파키스탄의북부지방을 가리킨다. 이 지방에는 알렉산더왕이후 그리스풍의 조각미술이 발전하고 있었다. 석조(전기)와 수투코(후기)로 이루어진 불상조각은 조각가의 기법이 그리스 양식을 본받은 것이므로 소재는 불교지만 보살상이 조형된 불상이나 보살상은 그리스와 로마풍을 그대로 조형하고 있다. 머리카락, 눈매, 코, 입, 입술과 옷모양이 완전히 그리스풍으로 조각된 그리스신을 방불케하는 불상과 보살상들이다. 특히 스투코 불상에는 여성적인 우아함이 가미되어 간다라 불상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하여 마투라 불상은 다소 서북방의 영향도 받고 있지만 인도적 토착적 냄새가 물씨난다. 반나체(伴裸體)에다 머리카락, 눈, 코, 입등이 인도고유의 발상임을 현저하게 나타내준다. 간다라풍의 미술의 불탑조성도 있었으나 완전하게 현존하는 것은 없고 다만 무너진 유물에서 산개부와 기단부가 발달한 반면 탑신부가 약간 퇴화된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기단주변에 불상조각이 발달하면서 탑문이나 베디카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같은 경향은 예배의 대상이 불탑에서 불상으로 옮겨 갔음을 암시한다.

  한편 인도 중남부에 위치한 아마라바티에서는 간다라, 마투라와는 다르게 무불상을 계승하는 보수파(保守派)와 불상예배를 주장하는 불상파의 두 흐름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유명한 용수보살과 같은 관련이 있는 나갈류나 존자의 조각은 아마라바티의 흐름을 계승하고 있다.

  다음으로 굽타왕조의 불교미술은 석굴사원과 마투라 풍을 이어받은 불상조각이 대표적이다. 석굴사원으로는 아쟌타석굴을 으뜸으로 손꼽을 수 밖에 없는데 불탑을 안치한 <챠이트야>와 승방으로 사통되는 <비하라>로 구분된다. 챠이트야는 마제형(馬蹄型)의 공간을 두 줄의 석주가 나란히 서서 내진(內陳)과 외진(外陳)을 나눈다. 네모난 비하파석굴의 공간 3면벽에 수도승들을 위한 작은 방들이 여러개 있다. 특히 아쟌타 석굴에 보존된 벽화는 서기 7세기부터 기원전 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그림이라는 점과 부처님의 전기와 쟈타카를 주제로 한 회화에서 당시의 의상 장식품 화장품등 생활풍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불교미술뿐 아니라 인도미술 전체의 귀중한 국보급 문화유산이다. 다소 어두운 느낌을 주기는 하나 현란한 색체와 사실적(寫實的)기법이 주목을 끈다 . 굽타왕조의 불상으로는 마투라, 사르낫, 부다가야등에 조각된 명상적 불상등이 일품이다. 또 의상이나 장식의 처리에 있어서 굽타왕조의 불상은 인도적 조각으로는 완성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약간 아래쪽으로 향한 눈과 엷은 의상, 어깨의 곡선등이 굽타불상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팔라왕조에서 성행한 밀교 불상조각에는 재래의 불상과 함께 타라마리치 비쉬누신등의 힌두 신상들이 등장한다.

  특히 타라상이나 비쉬누상에서는 불교 고유의 기풍은 후퇴하고 힌두교적 짙은냄새가 난다. 조각기술도 간다라, 마쿠라보다도 뒤떨어진 느낌을 준다. 비불교적 요소가 불교고유의 요소를 압도한 것이다. 이같은 밀교미술을 끝으로 불교는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