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심 가득한 스님의 땅 찾기

오늘을 밝히는 등불들/오봉산 석굴암 도일 스님

2009-03-24     관리자

절 아래 사람 사는 마을이 까마득하다.

 군사보호지역과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여 있어서인지 출입 또한 자유롭지 않은 오봉산 석굴암(주지 초안스님, 70세)은 산 아래 검문소로부터 소로길 10리 정도를 가파른 산길로 걸어 올라가야 한다.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교현리 1번지, 다섯 개의 바위들이 키 순서로 줄지어 앉아 있는 오봉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암은 위로는 도봉이 치닫고 아래로는 삼각산이 모여서 산세가 크고 뛰어나며 물 또한 맑고 골이 깊어 수행하는 사람이 살기에 더없이 좋은 사찰인 듯 싶다.

 "150여 년 전 석굴암에는 열살박이 동자승과 노스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불씨를 잘 지켜야만 하던 시절이었지요. 어느해 큰눈이 내린 동짓날 아침, 동자승이 차운 바람에 독성(獨聖)님께 동지 팥죽 공양을 하기 위해 아궁이의 불섶을 헤쳐보니 불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석굴암 독성님께 공양을 올려야 하는데…. 이를 어쩐담.'

 불씨를 꺼뜨렸으니 겁이 난 동자승은 석굴에 가 엎드려 울며 기도를 드리다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절 아래 마을에서도 집집마다 팥죽을 끓이고 있었지요. 절로 가는 길가 한켠에 차씨 성을 가진 노부부가 살고 있었답니다. 마침 할머니가 팥죽을 끓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벌거숭이 어린 동자가 나타났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할머니가 이것 저것  그 이유를 물으니 어린 동자는 오봉산 석굴암에서 불씨를 구하러 왔다고 하더랍니다.

 할머니는 추위에 떨고 있는 어린 동자에게 방금 쑤어낸 동지 팥죽과 불씨를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어린 동자는 뜨거운 팥죽을 단숨에 훌훌 마시고는 촘촘히 눈속을 가더랍니다.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말입니다.

 눈이 그치고 얼마후 노스님이 차씨 집을 지나던 길에 할머니와 마주치자 할머니는 동짓날의 기이함을 두런두런 이야기 했습니다.

 묵묵히 듣고는 절에 올라온 노스님이 석굴암에서 기도를 하시는데 독성님의 입가에서 슬몃 따뜻한 김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자승을 불러 동짓날 일을 물어 보았습니다. 동자승은 그날 불을 꺼뜨린일이며 석굴암에서 울다 잠든 일, 잠이 깨어 일어나 아궁이를 다시 보니 불이 살아있던 일을 소상히 말씀드리니 노스님은 모든 일을 다 아시겠다는 듯 석굴암 독성님을 보시고는 미소를 지으셨다고 합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주섬주섬 이야기하는 도일 스님(度一, 현 석굴암 총무 32세)의 맑은 웃음과 표정은 어느새 150년 전의 동자승을 닮아 있었다.

 "대웅전을 지을 때의 일입니다. 이 지역이 그린벨트 지역이었지요. 건축허가가 나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는데 한번은 등짐을 져올려 쌓아놓은 목재가 큰 비에 썩어갈 지경입니다. 그래, 대웅전을 짓고 나니 군청에서는 무허가라 헐어야 한다는 겁니다. 증거차 사진촬영을 위해 군(郡)에서 온 기사가 몇 번 오르락 내리락 했는데 이유를 알고 보니 대웅전이 인화해서 보면 사진에 나타나지 않고 그자리가 거뭇하게 나타나더랍니다. 신기한 일이었죠.

 대웅전이야기에 도일 스님은 사뭇 진지 해진다.

 "이곳 독성도량은 600여 년의 역사가 말해주듯 5대  독성도량에 드는, 그 영험이 뛰어난 곳입니다. 아직 출입이 여의치 않고 올라오기가 쉽지 않아 그만큼 세속화되어 있지도 않고요. 신도분들도 이곳에 올라오시면 샘물 한 통으로도 기뻐하시는 너그러운 분들입니다.

 이곳 석굴 한쪽에서 나오는 샘물은 떠놓은 지 한달이 넘어도 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석굴암은 1395년(고려 공민왕 6년)에 당시 국사이시던 나옹 대화상께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1443년 (조선 세종25년) 무학 대사의 제자인 설암(雪庵) 관익 대사가 중수(重修)하고 석굴에 지장과 나한 두 존상을 조성하였으며 1495년(조선 단종 3년)에 단종왕후가 소원을 빌던 절로서 단종의 원당이었다.

 오랜 역사를 안고 있는 오봉산 석굴암은 1950년 6 ·25사변으로 인해 이 일대가 격전장이 되어 석굴암의 도량은 폭격으로 모두 소실되기에 이른다.

 폐허의 석굴암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데에 초안(超安) 스님과 부처님의 현몽으로 신병치료차 올라온 윤봉순(尹鳳淳) 보살의 발원과 헌신이 있었다.

 "주지 스님과 윤보살님이 참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 도량을 6 ·25때 총상을 입은 상처로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마을에서부터 손수 등짐을 져가며 불사를 해오셨으니까요.

 언젠가는 우리 스님께서 절을 짓기 위해 밤낮으로 석굴에서 기도를 하시다 몸에 좋지 않은 돌김에 몸이 축나 걷지 못하실 정도가 됐지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다니셨으니까요. 제가 열 살 때부터 함께 생활해왔으니 주지 스님이 고생하신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 그 당시의 어려움을 상기하듯 도일 스님의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진다.

 주지 초안 스님과 모친 조삼매심(趙三昧心) 보살, 화주 윤봉순 보살은 낮에는 십여 리 떨어진 인근마을에서 시주를 하고 밤에는 움막을 지으며 석굴암의 중수에 매진했다. 쌀 한 말, 나무 한 사이, 기와 한 장도 일일이 십리길을 걸어서 날라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세 분의 원력과 신도들의 동참으로 불사는 하나씩 이루어져 대웅전, 나한전, 삼성각과 범종각, 요사채, 봉향각, 축대 쌍사자석등이 차례로 세워졌으며 현재와 같이 가람으로서의 위용을 갖추었다.

 현재 도일 스님은 초안 스님의 은사이신 박동암(朴東庵) 대선사(1904ㅡ1969)의 사리탑을 준비하고 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비롯 평생 불일증휘(佛日增輝)와 조국통일을 염원 정진하셨던 동암 스님은 일찍이 기도 명찰로 이름난 오봉산 석굴암을 생전에 자주 찾아 기도 정진하셨으니 이는 선사의 애제자인 초안 스님이 석굴암에 주석하여 중창불사에 전력하게 된 인연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제자된 도리로서 조그맣게라도 동암 스님의 사리탑을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지 스님이 열반에 드시고 나면 주지 스님의 사리탑도 모셔야 하는데 그때가서 주지 스님 사리탑만을 크게 만들면 안 되겠기에 지금 어느 정도 그 모습을 갖추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도일 스님은 우선 석굴암 주변의 땅을 찾고자 한다. 단종 원찰이었던 석굴암의 사지는 현재 152평에 불과하다. 지금의 500여 평 도량은 물론 땅 주인의 양해를 얻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도 건축이 어려운 그린벨트 지역에서 얻어낸 초안 스님의 원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1990년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뒤늦게 해인사 강원 대교과에 들어간 도일 스님은 도반 스님의 권유로 '93년 해인사 구광루에서 성철 스님 사리친견법회와 같은 시기에 '산사와 스님'을 주제로 군법당 건립기금 마련을 위한 사진전을 연 바 있다. 애초 30여 평의 군법당이 목표였으나 그 두배나 되는 60여 평의 건립기금을 마련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힘입어 스님은 사리탑 건립과 땅찾기에 필요한 기금을 위해 지난해 5월 '산중일기'라는 테마로 사진전을 열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제가 할 일은 스님의 뜻을 받들어 땅을 만여 평 정도만이라도 찾고자 합니다. 물론 원래 절 땅이었을 이 근방 땅 모두를 찾아야 이 주변이 앞으로 개발이 되어도 이곳을 본래대로 지켜낼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아직 어려움이 많습니다. 7만여 평의 땅 소유권을 갖고 있는 쪽에서 산사로밖에 쓰일 수 없을 이 땅을 평당 3만 원까지 셈해달라고 하고 있으니까요. 신도들의 도움도 있지만 보다 큰 시주가 있기를 발원해 봅니다.

 지난번 오봉산 아래 장흥에서 우이동을 잇는 우이령 고개가 개통되려 했던 일과 관련해 시민단체와 환경단체의 걱정으로 그 일이 중지된 지금 당시 석굴암의 세속화를 걱정했던 도일 스님은 다행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 그에 대한 대비를 위해서라도 이곳 석굴암의 절 땅을 꼭 찾아야 한다고 원을 세웠다.

 더욱이 12월 초, 초안 스님과 사형제 지간으로서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조카상좌 도일 스님을 기특하게 여겨 기도중 찾아주신 미국 LA 관음사의 도안(道安) 스님은 어렵게 모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분과해와 사리 3과를 석굴암에 모실 수있는 기쁨 더해주었다. 부처님의 전신사리탑과 동암 대선사의 사리탑을 모시는 기쁨에 앞서 도일 스님의 어깨는 그만큼 무거워졌다.

 얼마전 모 유명 월간지의 취재조차 세속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아 허락하지 않았던 초안 스님은 절을 찾는 누구에게나 평생을 수좌로 살아왔던 기개를 굽히지 않는다.

 그렇게 어렵고 꼿꼿한 은사인 초안 스님과 20여 년을 정성스레, 그리고 어느새 14년 동안 산중의 일상을 렌즈를 통해 더 없이 맑은 눈으로 솔직하고 깨끗하게 담아 내었던 도일 스님.

 선승으로서 호랑이처럼 무섭고 엄격한 은사 스님이 계셨기에 해인사의 4년을 빼놓고는 이곳 산문 밖 생활을 해본 일이 없다고 말하는 스님은 자신의 은사 스님과 또 그 은사 스님의 은사 스님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동분서주 하고 있다.

 동자승처럼 순수한 마음과 효심을 가진 도일 스님의 꿈이, 발원이 이루어지길 어느새 한적한 소로길 끝 석굴암 독성님께 두손을 모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