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선산 도리사

고사의 향기 아도(阿度)와 모례(毛禮)의 전설이

2009-03-24     관리자

 한창 색조의 향연을 벌이고 있는 가을 산빛에 정신을 팔고 있자니, 가을날의 취재걸음은 천리길도 한걸음인듯, 어느새 '경상북도'라는 경계를 넘어 선산군내에 접어들고 있었다.

 선산에서 구미로 통하는 길을 따라 해평면에 이르니 왼편으로 '해동 최초의 가람 도리사'라는 커다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도리사는 신라불교의 초전자인 아도화상이 선산군 모례의 집에 숨어 전법하다가 태조산(太祖山)으로 자리를 옮겨 창건한 사찰로서 신라불교의 초전지이며 최초의 사찰이다.

 금교(金橋)에 눈이 덮혀 풀리지 않아 계림땅에 봄빛이 돌지 않을제

 깜찍할 손 봄의 신(神)은 재사(才思)도 많아 앞질러 모랑(毛郞)의 집 매화나무에 달라붙었네.

일연(一然)스님은 <삼국유사>에서 모례의 집이 신라불법의 시원지임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도리사의 창건설화에 보면 아도 화상은 모례가 마련해준 은신처에서 불법을 전하다 홀연 길을 떠난다.

 아도화상이 모례의 집을 떠나려하자 모례는 울먹이면서 아도의 가는 길을 묻자, 아도는 '나를 만나려면 얼마후 당신 집으로 칡순이 내려올 것이니 그 칡넝쿨을 따라오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오'라고 말하며 떠나버렸다. 그후 아도의 예언처럼 정월 엄동설한인데도 칡순이 모례의 집 문턱에 들어오므로 모례는 곧 그 줄기를 따라가니 지금의 냉산(冷山) 높은곳 도리사자리에서 수행정진하고 있었다.

 이때 아도는 모례장자를 보고 '이곳에 신라 최초의 가람을 세울 터이니 시주를 좀 하시오'라고 하며 망태기 하나를 내놓으면서 망태기에 쌀을 채워달라고 하였다. 모례는 흔연히 아도의 청에 승낙하고 그 망태기 속을 채우려고 쌀을 부어으나 백섬을 부어도 차지않고 천섬을 부어도 차지않더니 3천섬을 부으니 망태기가 가득 찼다. 그 쌀로 절을 지으니 지금의 도리사가 바로 그것이라 한다.

 도리사(挑李寺)라 이름함은 아도가 진기승지(眞奇勝地)를 찾아 결암봉불(結庵奉佛)하며 냉산을 돌던 중 눈덮인 산중에 오색도화가 만개한 자리있어 그곳에 절을 지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그 원형은 남아있지 않다. 정사년(丁巳年)의 화재로 아미타불 일존상과 금당암만이 남아  금당암을 도리사로 개칭하여 아미타불상을 극락전에 모신 것이 현재의 도리사이다.

 '신라불교의 전래지'라는 화려한 전설과는 달리 도리사는 실상불자들의 시선을 받지 못하였다. 극락전과 삼성각, 반야정사(조사전)와 담장밖으로 밀려나 있는 세존사리탑, 고려 때의 것인 도리사 석탑(국보 470호 지정)이 있을 뿐이었으며, 선ㅂㅇ에 수행하는 스님들이 거쳐가는 곳으로서 오히려 태조선원으로 이름나 있었다. 삼성각에는 아도화상 영정이 모셔져 있고 경내를 잠시 벗어나 수풀사이의 꽤 널찍한 공간에 아도화상좌선대가 있으나 신빙성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리사가 불자들의 참배지로서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세존의 진신사리가 발견되고 부터이다.

 아도화상이 가져온 이 콩알만한 크기의 뱃색사리는 지금까지 발견된 여느 사리와는 모양과 빛깔에서부터 그 찬란한 신비가 친견하는 사람의 눈을 압도한다고 한다.

 그 발견경위를 보면 참으로 묘한 것이, 사리가 나온 석종(石鍾)모양의 부도는 분명 '세존사리탑'이라 음각되어 잇음에도 사리탑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몇차례 산아래로 굴러내려간 것을 마을사람들에 의해 안치시키면서도 사리탑에 대한 신뢰가 희박했다. 그러다 경내에 있던 것이 어느새 담장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런것을 '77년 당시 주지이신 법성스님이 시주를 하여 탑의 밑받침을 조성하려 사리탑을 옮기던 중 탑신에서 찬란한 금동사리함과 진신사리 1과가 나온 것이다. 조사결과 사리함은 통일신라 시대의 것임을 밝혀졌으며, 발견된 세존사리의 신비한 빛깔과 함께 전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참으로 부처님의 가호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때부터 불교계의 사리에 대한 인식은 바뀌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나라 유명한 사찰에 부처님사리가 봉안되어 이었지만 오히려 사리신앙에 관심보다는 불상에 예배하는 경향이 많았고 사리가 지닌 신앙적 의의나 공덕을 모르고 있어다.

 현재 전국적으로 사리친견법회가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지만 그것은 도리사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진신사리가 발견된 이후 도리사는 연일 참배객들을 태운 관광버스 2~3백대가 도로를 메웠다. 지금은 도로에서 입구까지 깨끗이 포장되어 편리하지만 그때만 해도 도로에서 절까지 논길이었고 불편하기 이를데 없었음에도 발길은 끊일새가 없었다고 한다.

 사리는 석종형의 세존사리탑에서 새로이 탑을 조성하여 적멸보궁에 붕안하였다. 현재 도리사는 요사채와 선방의 불사가 한창 진행중에 있다. 초전지로서의 성역화사업의 일환인 것이다.

 해동 최초의 사찰은 물론 평양의 성문사와 이불란사라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만 아직은 밟아볼 수 없는 땅. 그래서 남쪽에 불법의 첫발을 내닫게 한 도리사는 불교에 있어 의미있는 사찰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마음의 고향처럼 정겨움과 푸근함이 감도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