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중흥의 길은 어디 있는가?

불교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17)

2009-03-20     관리자

  

     ♣살인자와 석가모니

  앙굴리마라(Qngulimala)는 사밧티(城)의 젊은 구도자로서 일찍 바라문 마니발타라 문하에서 열심히 수행하다가, 바라문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스승의 오해와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스승은 앙굴리마라를 파멸시키기로 결심하고, 그에게 일렀습니다.

  "그대의 공부가 성숙하여, 이제 한 가지 고비만 넘기면 곧 도를 이루어 성인의 경지에 이르리라."

  "스승님 그 한가지 고비가 무슨 일입니까?"

  "지금 곧 거리도 나가서 백 사람을 죽이고, 손가락 백 개를 모아 다발<지만(指髮)>을 만드는 일이니라. 그대가 능히 이 일을 해 내겠느냐?"

  사밧티는 삽시간에 공포의 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미친 살인자가 사람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손가락을 잘라갔읍습니다. 파세나디왕이 군대를 풀었으나 잡지 못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곧 현장에 이르셨읍습니다. 그때 마침 백번째 제 어머니를 해치려던 앙굴리마라는 석가모니를 보자 칼을 치켜들고 달려갔읍습니다.

  "사문아 거기 섯거라."

  "앙굴리마라여, 나는 머무는데(安住), 그대가 머물지 못하는구나."

  칼을 들고 허둥대고 있는 앙굴리마라를 향하여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노래하셨습니다.

  "세존은 언제나 스스로 머물러서, 일체 모든 생명이 은혜를 입건마는 그대 지금 죽일 마음내어, 악행도 가리지 않는구나."

  그제사 앙굴리마라는 제 정신을 찾고 ,부처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살인자를 거두어 주옵소서."

  "어서오너라, 앙굴리마라여, 나와 함께 가자."

  이렇게 하여 부처님은 피로 얼룩진 그의 손길을 잡아 머리를 깍게하고, 구족계(具足戒-사문이되는 의식)를 주셨습니다.

  한편 파세나디왕은 이 소식을 듣고군대를 끌고 달려왔습니다.

  "부처님, 앙굴리마라는 어디 있습니까? 체로하러 왔습니다."

  "왕이여, 앙굴리마라는 이미 출가하여 나의 제자가 되었오. 그대는 어찌할 터이요."

  "세존이시여, 그가 이미 비구가 되었다면, 어찌 하오리까. 다른 스님네와 같이 공양을 바쳐 받들겠습니다."

*참조—불교성전<P.51~54>                                                                                                                 

             샘터사:부처님의 일생(F)<P.160~164>

    

     ♣불교의 화석화(化石化)현상

  요즘 KBS-TV에서 특별 기획으로 <불교문화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해외취재물을 방영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발자취와 더불어 이룩된 위대한 불교문화의 유산을 생생하게 볼 수 있어서 얼마나 고마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 감격속에서 더 큰 상처의 통증을 느끼며 괴로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불교가 이미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 때문입니다. 불교의 모국이자 아시아 최대국가 가운데 하나인 그 인도 천지에 불교는 이미 살아있지 않다는 역사적 현실 때문입니다.

  지금 인도에는 힌두교(Hinduism)가 국교로서 국민의 절대다수가 그 영향 속에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찬란한 불교 유적지는 텅 비어 있습니다. 최고의 성지 룸비니  동산마저도 큰 상처를 입은채 거의 텅 비어 있습니다. 한 두개의 사찰이 폐허를 파수병처럼 지키고 섰다고 해서, 몇몇 망국의 네팔인들이 깨어진 불상  앞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인도에 불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바꿔놓을 반증(反證)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슬람교가 인도를 침략하면서 불교 문화를 무자비하게 파괴하였고, 인도의 불교를 축출하였다고 역사가는 해설합니다만, 그러나 인도의 불교는 이슬람이 침략해 오기 훨씬 이전부터 힌두교에게 그 지도적 자리를 넘겨주고 급속히 위축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또 이슬람의 침략을 받아서도 힌두교는 강인하게 살아남아, 여전히 인도의 종교로서 번영하고 있지만, 불교는 그 존재마저 상실되어 버리고 말지 않았습니까?

  나는 두고 두고 이 불행한 역사적 비극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관찰해 왔습니다만, 이러한 생각과 관찰을 통해서 도달한 하나의 작은 결론은, 인도의 불교가 너무 빨리 화석화(化石化)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이 경우 화석화의 개념은 곧 <민중의 상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민중을 잃어버린 종교가 어디에다 생존과 발전의 뿌리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불교가 민중을 잃고 화석화해 가는 원인은(비단 인도의 경우뿐만 아니지만), 첫째, 지나친 출가(出家) 중심 주의로 굳어버린 교단의 구조적 결함, 둘째, 신앙의 정열을 상실한채 번잡한 교리 체계에만 집착한 교학 발전상의 모순, 셋째, 그 당연한 귀결로서 민중의 고통과 시대와 사회의 난제(難題)들을 외면하고만 불교 의식(意識)의 비역사화(非歷史化)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가만이 해탈할 수 있는 수승(殊勝)한 길이라는 출가 제일의 사고 방식은 부처님 당시에서부터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유마거사(維摩居士-VIMALAKIRT)가 일단의 비구들을 논파(論破)한 저 장쾌한 거사는, 유마의 실존(實存)여부가 문제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 불교가 출가 중심의 비민중화(非民衆化)에서 탈피하려는 일대 종교 개혁운동의 선구로서 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출가와 재가(在家-신도)의 장벽이 높아갈수록 출가는 자기들 고유의 청정(淸淨)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계율과 번잡한 교리 체계의 전문화에 몰두하게 되고, 마침내 부처님의 지극히 간명 소박하고 생동하는 구원의 법음(法音)은 팔만사천의 장경속에 퇴장(退藏)당하여, 민중은 산 말씀을 잃고, 불교는 난해한 용어와 개념 속에서 끝 없는 미로를 헤매게 된 것이 아닙니까?

  대승불교의 사상가들이 훌륭한 사상적 업적을 성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보살상(像)이 한 사상의 차원에서 내려와, 민중의 일상적이고 역사적인 문제 해결의 친근한 벗으로서 흙탕물에 몸을 던지지 못하고 있을 때, 인도의 전통 종교와 민속신앙은 힌두의 매력적인 새 얼굴로서 광범한 민중의 마음과 행동을 사로잡아 갔던 것입니다. 아니, <고기를 먹는 것이 파계냐, 아니냐?> <공(空)도 아니고, 공 아닌 것도 아니다>식의  비현실적인 공리공담에 지치고 실망한 민중들이 제 삶의 길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대답할 때    

  민중이 원하는 것은 그들의 일상(日常) 속에 살아 움직이는 <신앙의 힘>인 것입니다. 그들의 자연스런 삶을 긍정해 주고, 그들의 지친 가슴에 신바람 나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고, 고독하고 허무할 때 절대 무한한 귀의(歸衣)의 대상을 제공해 주기를 그들은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절대 다수의 민중들이 불교를 찾는 것은, 그것이 불교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훌륭한 신앙의 힘을 가진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절대자냐? 불교가 종교냐? 사상이냐 하는 등의 문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되지만, 수많은 민중들이 동참하여 창조해 온 역사의 산물이란 진실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 관세음보살>이, <극락왕생>이 초기 경전에 없다고 해서 그것이 비불교(非佛敎)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정녕 불교를 한갖 화석화한 사상의 박제품(剝製品—생물표본)으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음이 되고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앙굴리마라의 칼날 앞에 목숨을 거시고 한 죄인을  지키기 위하여 다스리는 자의 권위와 대결하는 것은, 곧 부처님의 참 뜻이 중생을, 고통하는 민중을 살려내는 데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중생이 곧 부처>요, <중생으로 말미암아 부처가 있다>하심은, 불교의 민중성(民衆性), 불교의 민중화(民衆化)가 불법 융성의 근본임을 깨우쳐 보이시는 간곡한 경고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인도에서 사라져버린 불교, 지금 이땅에서 눈에 보이게 화석화되어가는 불교를 향해서, 명백한 대답을 제시해야 할 중대한 시간 앞에 우리는 와 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실로 생사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싸우는 자들은 싸우게 버려두고, 이짐을 질 자는 나서야 합니다.

  앙굴리마라의 칼날 앞에 서시는 부처님의 큰 자비를 따라서, 왕의 법 앞에 마주 서는 부처님의 큰 자비를 따라서, 우리는 비상한 결의로 나서야 합니다. 나서되 민중화의 길로 나서야하고, 나서되 진리의 생명을 키우는 신앙의힘으로 나서야 합니다.

  이 길과 이 힘으로 나간다면 우리는 분명 화석 가운데 꽃을 피우는 진리의 신비를 오늘의 현실위에 능히 성취할 수 있다고, 나는 조용히 생각하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