孟子가 이끈 佛門

노사의 운수 시절

2009-03-19     관리자

     1 부끄러운 회고

  편집자는 오죽잖은나의 젊은 운수(雲水) 시절을 회고하라고 한다. 이말을 듣고 생각하니 출가인으로서의 나의 생애가 눈 앞에 나타나며 부끄러움이 우선 앞선다. 그래도 뜻을 세워서 불법문중에 뛰어들었는데 산중생활 六十년에 수행인으로서의 나의 모습을 돌이켜 보니 스스로 측은함과 민망스러움을 억제할 수 없으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세월도 흘렀지만 세상도 그동안 많이도 바뀌었다. 내가 이곳 문수암에 들어온 것이 통일종단 발족으로 불교정화 문제가 일단락되던 一九六二년의 가을이니 여기 온 것만 해도 그럭저럭 十七년이 되었다.

  이 산, 이 봉우리, 앞 산, 그리고 저 앞의 망망대해 그 사이를 이어 들과 개울뚝을 따라 산골 바위 틈을 거쳐 이곳에 이르는 산과 물, 바위와 흰 구름은 예이나 다름 없지만 그 사이에 나는 얼마난 변했던가. 내가 있는 문수암 뜰에서 내려다 보이는 울산 천지가 바뀐 만큼 정말 세상도 많이 바뀌었고 나도 많이 변했다.

  편집자의 청을 듣고 몇번이고 망설이다가 이에 응하게 되는 것은 그동안 너무도 변하고 변한 오늘의 시점에서 五 · 六十년전을 회고하는 것이 어쩌면 몇가지 의의가 있는 상 싶어서다.

  첫째는 내 나이 七四세에 아직도 부처님의 은혜속에 하루하루가 편안하다. 그리고 이 높은 산봉우리를 큰 힘 안들이고 걸어 오를 만큼 기력이 남아 있다. 이런 때에 나의 초발심 시절을 돌이켜 봄으로서 나의 여생을 다듬어간다는 것도 어떤 의미가 있어 보이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나의 운수시절인 반세기 전 저때의 이야기는 이것이 비록 실패한 발자취 뿐이라 하더라도 어쩌면 오늘의 젊은 납자들에게 참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화두로 발심하여 선방으로만 돌아다니는 중 그사이에 어지러웠던 발자취를 볼때에, 젊은 후배들은 필시 다 나를 지탄하겠지만 지탄하는 만큼 우리의 존경하는 후배들은 나의 잘못된 것을 거울삼아 앞날의 수행에 생기를 주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래저래해서 부끄러운 나의 운수시절을 사양하지 않고 더듬어 보는 것이다.

    2 나를 살린 구방심장(求防心章)

  내가 불법 만나게 된 경위를 말하자니 불가불 나의 악동시절 이야기를 숨길 수가 없다.

  나의 태생지는 전라남도이다. 五남매의 막동이로 자랐는데 부모님이 나에게는 막동이답지 않게 엄하게 대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막동이답게 사정없이 마구 굴었으니 생각해보면 누구에 못지 않은 일급 악동이었다. 八, 九세 때부터 서당에가서 놀고 글을 배운다고 다녔지만 글공부는 재미가 없었다.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것은 들으면 외웠기 때문에 힘들여 책장을 넘기며 꾸벅꾸벅 공부하지 않아도 외워 바치는 것은 잘 해냈다. 그러나 실로는 글자를 모르는 형편이었고 서당에는 가야하니까 갔고 서당에서 살자니 배운 글은 좍좍 외우게 되었다. 글 안읽어도 잘 외운다고 칭찬도 받았지만 워낙 심한 장난으로 벌은 내가 맡아놓고 섰다. 얌전한 독자들이야 이런일 없었겠지만 나는 서당에서 힘써 한 것은 오직 장난 뿐이었다. 친구 골탕먹이기, 남의 짚가리에 불놓기, 매논 소고삐를 자르고 등을 쳐서 쫓아버리기, 하여튼 별 장난을 다했다. 동냥하러 다니는 탁발승을 만나면 악동 몇이 떼를 지어가서 동냥자루를 뺏기도 했으며 동냥쌀은 가져다 남의집 닭을 훔쳐서 죽쑤어먹기가 일쑤였다. 동네처녀가 물동이를 이고 가면 꼬챙이로 궁덩이를 찔러서 놀라게 하여 ㅐ훽돌아서다가 물동이를 깨게도 했고, 샘가에 갖다놓은 콩나물동이도 곧잘 깼다. 그밖에 무엇인가 구실을 붙여서는 친구를 골탕멱였다.

  그래도 내가 서당에 붙어 있을 수 있던 것은 배운 글을 막히지 않고 외우는 데는 한 몫 봐줄수 밖에 없었기 때문인것 같다. 나는 서당에서 글을 배우면서 마음에 차지 않아 그것이 장난으로 발동하였는가 지금도 생각한다.

  그런데 그나마도 끝장의 날이 왔다. 그때는 기미년이니까 내 나이 十四세다. 맹자(孟子)를 읽은 분이면 아시겠지만 맹자에는 구방심장(求防心章)이란 게 있다. 여기에서 의심이 나기를 방심하는 것을 구하라 하니 <어떻게 방심을 구하는가?>해서 선생님에게 물었다. "방심은 어떻게 구합니까?" 선생님은 대답하기를 "방심을 구하라 하였으니 그렇게 알아라"한다. 내가 그대답에 만족할리가 없다.

  "어떻게 방심을 구합니까?" 반복 물어봤지만 선생님의 대답은 "구방심하라니까"할 뿐이었다. 나는 그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아 격렬하게 반복 논란하는 사이에 잘못되어 책상위 연적을 던져 선생님 이마에 맞았다. 이렇게되니 아무리 나라도 어찌 견딜 수 있을소냐.

  나는 서당에서 쫓겨 났고 나도 그까짓 글 안배운다고 큰소리치고 뛰어 나왔다.

  사실 <구방심>(求防心)의 문제에서 내가 선생님에게 한 행위는 천번 잘못하였지만 내마음 속에서는 구방심의 문제가 절실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서당에서 쫓겨난 일이 잘못된 일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구방심> 논쟁이야말로 내가 개천에서 큰 바다로 뛰어나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니 어디 이 사건을 불행 하다고만 말하겠는가.

  서당에서 나와서 약 三년간을 여기저기 다니다가 十七세가 되는 임술년에 송광사에 구경을갔다. 이것이 굴레벗은 망아지가 임자를 만난 계기가 되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하였으랴.

     3 단숨에 바닷물을 들이켜라

  지금의 송광사(松廣寺)도 도량이 엄숙하고 가람이 웅장하지만 저때의 송광사는 보다 엄숙하고 신비스러울만치 안정감이 들어 보였다.  나는 여러 법당을 돌아보고그 수많은 가람들을 여기 저기 기웃거리는 사이에 이유업이 마음이 평화해지고 친밀감을 느꼈다. 만나는 스님들과 하고 있는 일을 보아도 조금도 이질감이 들지 않고 마치 자기집에 돌아온 거와 같은 안정감이 들었던 것을 지금껏 이상하게 생각한다.

  큰 절을 두루 돌아보다가 삼일암(三日庵)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조예운(趙禮雲)스님도 만났고 다른 스님과도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었다. 그때 한스님을 만나서  불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스님이 묻기를 "네가 바다를 본적이 있느냐?" 한다.

  "예, 본적이 있습니다."

  "네가 눈을 감고 저 바다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저 바닷물을 한 숨에 다 들이마셔야 불교의 뜻을 안다."

  그러니 그렇게 해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말 아래 단번에 가슴 한 구석에 얹혔던 것이 내려앉는듯한 시원함을 느꼈다. 이거야말로 <구방심>에  의심이 난 이래 마음 한 구석에 그 문제가 걸려 있어서 좀체 다른 일에 마음이 붙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끝없는 바다가 눈 앞에 드러나면서 그 물을 한 숨에 마실 것만 생각했다.

  "저 물을 어떻게 단숨에 다 먹을꼬?"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차 있었다. 온 몸이 이 문제에 빠져 들어갔다. 그때까지 세상 눈에 띄는 것 모두가 마음에 차지 않고 아무것도 손에 붙지 않다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구하려고 하던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쁜 마음 이루말할 수 없었다.

  그때의 심경은 차심투처(此心投處)  차신한(此身閑)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 법문을 일러주신 분이 누구였던가. 그는 오호연(吳浩然)스님이시다. 맹자에서 <구방심>도리를 참으로 일러준 분은 오호연스님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삼일암에 있게 되었고 오호연스님의 보호밑에 十八세가 되는 계해년에 삭발하고 다음 갑자년에 사미계를 받았다.

  나는 삼일암에서 대중시봉을 하면서 오직 <저 물을 어떻게 단숨에 다 먹을꼬> 하는 일념으로 살았다. 자나깨나 이것을 알려고만 돌진하는 생활을 하였다. 선방에 앉아 참선하는데 자주 졸음이 왔다.이것은 대개가 경험하는 것이겠지만 나도 졸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화두도 간절하게 들었지만 별짓을 다해보았다. 한 겨울을 물이라고는 냉수만 마시고 밥의 분량은 극도로 줄이며 냉수에 말아 김치국 몇 번 찍어먹는 것으로 졸음을 대적하였다. 그런 만큼 정진도 용맹스럽게 하였고 마침내 졸음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해 여름도 겨울도 불난듯이 설치듯 공부하였고 용뱅정진은 빼놓지 않고 참여하여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는 가위 불덩어리가 되어 굴러 다녔었다.

     4 내가 뵈온 진진응 스님

  갑자년까지 송광사 삼일암에서 지냈는데, 삼일암에 있는 동안 절도 처음이고 선도 처음이었고, 그밖에 선방생활과 당대 선지식에 관하여도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런 만큼 삼일암에 계시던 스님들은 공부에 순일하였고 후생에게 친절하였다.

  나는 二년간을 삼일암에서 지내고 二十세가 되는 을축년 봄에 칠불선원을 거쳐 선지식을 찾아갈 작정으로 길을 나섰다. 쌍계사 칠불에 이르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는 화엄사가 있다. 그때 화엄사는 선방은 없었고, 오직 대화엄 강백인 진진응(陳震應)스님이 가위 판을 치고 있었다. 나는 진응스님을 뵙고 가고자 화엄사에들렸다. 그당시 이르기를 <사지화엄(寺之華嚴)이요, 승지진응(僧之震應)이라고> 하였는데 하여튼 진응스님이 화엄사 왕노릇을 했었다. 강사와 주지를 겸했고 문하에 많은 학자들이 모였고 일세의 추앙을 받고 있었다. 진응스님을 뵈오니 먼저 경을 배우고 선을 나중에 하라고 나에게 권하신다. 진응스님은 당신의 화엄경계에 대하여 자신만만한 것을 풍겼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네가 글을 모르니 어떻게 이 현담을 알까보냐"하였다. 나는 대답하였다. "일체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인데 견성성불을 해야지 견성하지 못하고서 어찌 문자만 가지고 불법을 알겠습니까. 스님 말씀은 꺼꾸로 하시는 말씀입니다."하고 선방에서 배운대로 대꾸하였다.

  "그것은 네가 모르고 하는 소리다. 견성은 상근기나 하는 것이지 말세의 너같은 어린 것이 무슨 견성을 하고 그 다음에 경을 본다고 하느냐? 그것은 안되는 말이니 선은 치워버리고 어쨌던 글을 읽어라. 현담 이치를 알고나면 그것이 견성이지 별 게 아니다."

  진응스님은 그때 六十세는 넘어 보였다. 풍채가 당당하고 왜모가 거창했다. 나는 선방에서 들은 그 알량한 지식으로 몇번이고 진응스님에게 질문, 했으나 결론은 매한가지. 어째든 글을 읽어야 한다고 하신다. 진응스님은 고마운 분이었다. 나를 좋게 보고서 간곡히도 일러 주셨는데 아무리 그래도 내 마음은 수긍이 가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선이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