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태국 3 치앙마이의 불교사원

태국 북부 치앙마이의 불교사원

2009-03-16     관리자

  해가 중천으로 지나 서서히 대지의 지평으로 머리를 숙인다. 달리는 버스의 창 너머로 오랜만에 산등성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해발 300미터의 분지에 자리잡은 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 치앙마이에 발을 내닫는다. 수도 방콕에서 버스로 약 9시간 걸리는 750km정도 떨어진 태국 제2의 도시이다. 이 곳 북부지역에는 산마다 특색있는 문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어쩐지 우리 나라의 풍토와 비슷한 차분한 모습의 산들이 둘러싸여 있다. 고요한 전원풍경으로 남쪽과는 다른 친숙한 느낌이 앞선다.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가장 먼저 마음에 이끌리는 것은 불교의 생활과 그 문화이다.

나라와 민족마다 그 모습이 다르고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 불교인데 그곳에는 빼어 놓을 수 없는 공통된 분모를 갖추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넓은 그늘을 드리우는 거대한 나무의 뿌리를 연상케 하는 경건함이 배어있고, 드넓은 평야를 유유히 가로지르는 대하의 흐름 같은 지고한 역사성 등 형언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의 유혹에 이끌려 간다. 남방의 불교는 뜨거운 태양 아래 끈떡지는 더위를 해결시켜주며 생활 속의 지혜를 일러주는 청량수와 같이 시원하고, 한편의 교훈적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 감동이 솟아나는 삶의 모습으로 느껴진다. 나는 이제 소승과 대승을 비교하지 않기로 했다. 그 가르침이 어떠하든 사회 문화적 체험을 스스로 익히며 터득할 일이다. 오늘도 남방의 햇살 아래에서 쉴 그늘을 찾아 길을 나선다.

치앙마이의 역사는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국 최초의 수코타이 왕조가 중부에서 터전을 마련한 이후 북부에서 란나타이 왕조의 멩라이 왕이 북부를 평정, 1298년 현 도시에 도성을 건설하였다.  그후 1558년 미얀마에 의해 260년만에 멸망하면서 미얀마와 남부 이유타야 왕조의 틈새에서 쟁탈과 복속의 역사를 겪던 중, 1775년에 탁신 왕이 미얀마로부터 해방시키자 태국의 영토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역사의 체취를 풍기는 붕괴된 성벽, 성문 등이 남아 있으며 태국의 모든 왕조가 불교를 신봉했듯이, 불교의 문화 유산인 고색창연한 사원들이 도처에 산재하여 있다.  삼로라는 자전거 인력거에 몸을 싣고 달리다 보면 고적하게 서있는 사원이 눈에 뜨인다. 왓 체디루앙은 1391년에 세워져 지진으로 무너지기 전에 높이 90미터에 달했다는 불탑이 이곳에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왓 치앙만 사원은 1297년 멩라이 왕이 건립한 최고의 사찰로서 옛날에는 왕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구도성의 시가지를 끼고 발달한 그의 사원들은 말로 다 표현하기는 힘든 특색들을 지니고 있다. 현재 치앙마이를 대표하는 사원은 시내에서 16km 정도 떨어져 있는 '왓 프라탓 도이수텝`이 유명하다. 쿠에나 왕에 의하여 1383년에 건축된 이 사원은 해발 1,080미터의 산정에 있다. 사원 입구 아래에는 간이식 등산열차가 있어 재미를 더해준다. 주변이 산악지대이므로 민족의상을 입은 산악의 소수종족들이 토산툼을 팔려고 손짓하는 모습도 보인다. 등산열차와 달리 정상까지 약 300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난간에는 화려한 색채로 조성된 거대한 두마리 뱀(나가=용) 상이 조각되어 있다. 신발을 벗고서 들어서면, 태국의 전형신탑인 체디가 황금 빛을 반짝이며 눈부시게 서있다. 

회랑에는 참배객들이 더위를 피하며 시간을 갖는다. 태국의 사원은 편안함 그 자체이다. 참배예례를 마치면 각자 편한 자세로 시간을 보낸다. 엄숙히 기도하는 사람들로부터 누워서 잠을 자는 듯한 사람도 보인다. 심지어 담배를 피워도 무어라 신경쓰는 사람도 없고, 주위는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이다.  사원을 마치 생활의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아끼고 보살피는 불자들의 경건한 신앙생활에 더욱 호감이 간다. 

치앙마이를 찿게 된 것은 위빠사나 수행을 가르치고 있는 람프엉 사원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람프엉 명상센터는 수행자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구도에 목말라 샘을 찿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항상 열려 있는 이 사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해갈의 깨달음을 얻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초발심의 문턱을 기웃거리는 내가 과연 무슨 욕심을 낼까 싶어 두리번거렸다.  위빠사나 수행에는 여러 방법이 있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것은 걷는 방법이다. 사원의 뜰에서 조용히 걷는 수행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을 반쯤 감고 숨을 죽이듯 한 발을 천천히 든다. 그리고 무거운 공간을 이동하듯 앞으로 서서히 밀고, 땅에 닿고, 들고 떼고 밀고 닿고, 10여 미터를 걷는 데 들이는 시간은 수분에 달한다. 시간적 셈을 세는 것이 아니라 호흡과 감각 그리고 명상을 위한다. 햇살, 바람 그리고 짤막한 그림자만이 함께한다.  한 걸음에도 수많은 동작이 있다. 행위의 모든 부분과 그에서 발생되는 느낌을 관찰하라. 네 발걸음에 네 마음을 실어라. 그러면 매 순간 변하는 너의 행위와 너의 느낌을 관찰할 수 있다.

2500여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위빠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의 단계를 성취하셨다고 한다.  걷는 수행자의 뒤를 따라서 어느 사원안에서 아이들의 경읽는 소리가 들린다. 숲 속의 새소리, 닭울음 소리----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 집중이 아니라 제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기에 이런 잡다한 주위 소리조차 수행의 한 대상일 뿐이다.  앉아 있는 모습 또한 수행이다. 들어가고 나가는 호흡을 관찰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라. 그리하여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를 보아라. 자기 몸에 대한 관찰은 어느 때나 어디서나 시공을 초월한 관찰인 것이다. 

수행자들은 각자 자유롭게 장소를 잡고 앉거나 걸으며 명상을 한다. 한 가지 자세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에 집착하는 것은 금물이다. 다만 관찰함으로써 삼법인을 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리라. 어디선가 개가 다가와 으르렁거린다. 그러나 이 수행자의 마음을 흔들지는 못한다. 개의 울음소리조차 관찰의 대상이며 마음의 흔들림조차 관찰의 대상인 것이다.  사원에서 부처님께 절하는 것도 수행이다. 절을 하는 행위와 그 행위를 통해 일어나는 느낌, 생각 등을 면밀히 관찰한다.

한편으로 근기가 약한 사람들은 연꽃을 공양하고 향을 들고 탑을 돌면서 마음 속으로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수행을 한다.  이곳의 스님들도 역시 하루 한 끼로 식사를 한다. 대개 마을에 나가 탁발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공양할 음식을 들고 와 사원 안에서 탁발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신도들은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게송을 읊는다. 스님들도 시주자들에게 건강, 장수하기를 기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향계를 한다. 물을 따르면 부처님께 귀의하고 모든 공덕을 중생에게 회향하기를 발원하며 깨달음을 성취하고 열발에 이르기를 기원한다. 한 끼의 공양을 하기 전 이렇게 긴 과정이 필요하다. 음식을 먹으며 맛과 느낌을 관찰하라. 먹는 행위 그 자체도 수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람프엉 사원에 땅거미가 밀려오자 탑돌이가 시작되었다.

거의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불재일 전 날에는 승려와 신도들이 모두 참가하는 탑돌이가 있다. 재가 신도들은 평상시에 5계를 지키지만, 불재일 날은 정오 이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 오후불식, 춤추거나 노래하지 않을것, 높고 넓은 침상 위에서 잠자지 않을 것 등의 계를 더 지킨다고 한다. 촛불과 연꽃을 들고 노스님이 먼저 앞장섰다. 탑을 돌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신심을 닦는 기도를 한다.  신심(信心)이란 팔리어로 '삿다`라고 한다. 내가 부처님의 법을 따라 스스로 수행하고 관찰한다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집착과 욕망을 끊어버려 능히 진실한 깨달음에 이르며, 모든 악업들과 일체의 장애와 의혹이 제거되어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다지며 부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기도하는 마음. 용맹정진이 없으면 모든 법과 좋은 행위도 관념과 습관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다. 해탈이나 열반도 관념화될 위험이 있다. 람프엉의 스님들은 이를 알고 있기에 밤이고 낮이고 수행을 권하고, 용맹정진을 하는 것이다.  어둠은 보이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육체의 굴레에 얽매인 번뇌의 불길을 꺼버릴 수 있을까?  "집을 짓는 자여, 너는 이제 보았노라.  너의 집을 지을 수 있는 서까래는 모두 흩어져 버렸고, 기둥과 대들보는 부러져 없어졌다. 이제는 더이상 집을 짓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신 후 이렇게 오도송을 읊으셨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