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구도문답] 신통력은 있는 것인가

2009-03-15     불광구도부

  신통이 사실 있는가

(김운거사가) 축지법이나 천안통 같은 신통이 사실 있는 것입니까?

범부로서는 헤아릴 수 없고 걸림없는 신력의 마음을 닦은 사람은 가질 수 있읍니다. 우리의 상식이나 물리학의 법칙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것을 능히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있읍니다. 원래 우리의 상식이나 과학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평상적인 의식차원에 건립되는 것이므로 그러한 범상적 인간의 의식차원을 깨뜨려 깊은 삼매와 같은 높은 의식차원에 이르면 우리의 상식이나 과학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자유스러운 경지를 얻을 수 있읍니다. 김거사에게 부탁할 것은 신통력은 도를 닦아 가는데서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그것이 도이거나 법은 아니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신통에 관심을 아주 버리고 바른 깨달음에 노력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話頭는 차례로 깨치는가?

(道寬거사) 참선을 하다보면 앞이 환하게 오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이 좋은 경계인지요? 또 화두는 하나씩 깨쳐가는 것입니까?

참선하는 사람은 공부중 일체경계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경계에 떨어진다고 하는데, 공부인이 경계에 떨어지면 곧 공부가 잘못된 것입니다. 본참공안이나 짓는 공부를 잃었을때 또는 마음에 구하는 것이 따로 있으면 경계가 벌어집니다. 일체 치구심을 버리고 오직 공부를 지어갈 줄만 알아야 합니다. 경계가 나타나거든 곧 다시 본참공안을 잡두리 하십시요.

  또 화두는, 하나 하나가 대각의 문입니다. 하나 깨치면 일체가 밝은 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체료(一了一切了)라 하지요.

  그렇지 못한 것은 공부하는 당자의 공부자세와 방법의 차이에서 옵니다.

  미모로 보아내는 눈

   (혜덕거사) 아름다운 마음이 미모가 되는 근본이라 하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도 상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굴은 마음의 포장이니까 마음을 따라 용모가 바뀌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 헤덕거사 말대로 마음을 밝게 하여 모든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마음이 밝으면 일체중생에게서 구족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가 만들었는가?

(안락성보살) 인간은 신이 만들었다고 하는 종교가 있는데 그 말이 옳읍니까?

경에 의하면 지상의 인간은 처음 광음천 천상 사람이 타락하여 지상의 인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본성이 원래로 구족한 것이어서 누가 만들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원래로 청정합니다. 다만 미혹하여 그릇 사용할 때 천상이나 인간이나 중생의 차별현상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지상의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불보살의 화현이나원력을 빼고는 자신의 미혹이 원인이므로 사바세계 인간이 된 책임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하겠읍니다.

  미모를 생각에 두어야 하나

(道空거사) 미모 이전의 인간본래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요? 구태여 미모를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인간의 본면목은 원래로 형상에 있지 않읍니다. 형상이 아닌 것을 쓰임에 따라 형상을 나투지요. 이 세간에 쓰면서 자기본분에 어긋나지 않는 마음을 쓰면 용모는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미모의 무관심도 좋지만 어떻게든 자성의 아름다움을 내어쓰는 훈련은 더 중요 하겠지요.

  엄마 같은 부처님

(本玄보살) 부처님이 어머니같은 친근감이 언제부터인지 있읍니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왜 그런지 알고 싶읍니다.

나쁜 생각을 지니거나 불법을 비방한 사람은 부처님에게 친근감이 가지 않고 두려운 생각이 들거나 무시하는 태도가 됩니다. 염불을 많이 하고 예경 많이하는 사람일수록 부처님께 친근감이 갑니다. 이것은 전생이나 금생이나 꼭 같읍니다. 아마도 본현보살은 전생부터 염불을 많이 한 것으로 봅니다. 더욱 많이 염불하시고 부처님께 감사하여 부처님이라는 생각의 흔적도 없는데 까지 이르기를 바랍니다.

  두뇌의 생각과 법성

 ( 圓滿心보살) 우리의 두뇌로 생각하는 것이 법성에 속한 것인지 육체의 연장인지 알고 싶읍니다.

육체와 마음을 보는 범부의 경게는 모두가 색수상행식의 五온의 전개입니다. 두뇌는 색이고 생각은 식입니다. 그러므로 범부가 보고 느낀 것 五온으로서 법성 자체를 보았다 할 수 없읍니다. 우리는 五온 속에 살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의식할 뿐이고 사실은 법성으로 존재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원래로 말하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법성의 실현입니다. 범부는 그것을 五온으로 삼고 달인(達人)은 五온에서 법성을 보는 것입니다.

  무당집의 법당

(道本거사) 무당집에 법당 같은 것을 꾸며 놓았는데 무당이 불교와 관게가 있는지요?

깨달은 눈에는 원래로 有.無의 차별이 없지만 다시 자비심으로 중생세계를 살필 때 거기에는 많은 중생이 있읍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볼 수 없는 것도 있는 천차만별입니다. 그 중에는 천상사람도 있고 미욱한 잡신도 있읍니다. 무당들은 대개 잡신과 교통을 갖고 있으며 잡신세계는 또한 상위신도 있으며 저들은 모두가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보다 높은 위력자를 인정하고 두려워 합니다. 그래서 잡신과 교통을 갖는 무당들이 부처님이나 그밖에 다른 위력자를 자신의 수호자로 모시게 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읍니다.

  또 염불 기도한 사람 중에 형상과 욕망을 가지고 일심으로 생각하면 그에 상응하는 삼매와 경계를 보게 되고 그런 차원의 잡신들과도 통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아는 소리를 하고 무당이 되어 법당을 꾸미고 불법의 권위와 부처님의 위덕을 등에 지고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밖에 무당 같은 미신행위를 건전한 사회 지탄에서 보호받고자 불교를 보호막으로 사용하는것도 족히 생각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결론으로 말하면 불법에 무당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물질문명과 정신문명

(道空거사)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은 상치하는 것이겠읍니까?

문명은 인간이 행복하고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데서 참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을 토대로 한 오늘날의 물질문명이 인간을 억압하고 기계에 종속화시킨다고 하는 것은 일면적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문명의 발달이 충분히 정신문명의 발달에 기여합니다. 다만 참된 인간의 진실한 가치를 밝혀내는 정신문명이 허약할 때 문제가 있읍니다. 그 하나는 물질문명의 성과를 인간의 행복에 결실시키지를 못하게 합니다. 둘째는 참된 정신문명의 확립에 의해서 비로서 건전하고 왕성한 물질문명이 더욱 활기를 얻는 것입니다. 참으로 정신문명을 드높여 물질문명에 질서를 주고 참된 인간성숙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 정신문명의 방향이라 하겠읍니다. 물질이 인간과 정신을 지배하면 반문명이고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면 평화의 문명이요 인간이 물질과 정신을 지배하면 최상의 문명이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