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체류기] 녹야원鹿野苑

2009-03-14     서경수

< 현장(玄裝)은 사르낫(鹿野苑)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바르나 강에서 약 四十km의 거리에 녹야원 가람(鹿野苑伽籃)이 있다. 八개부분으로 구회(區劃)된 대가람은 아름답고 장엄하다. 약 千五白명의 승려가 소승정량부(小乘正量部)를 공부하고 있었다. 담장안에는 높이 六十m의 정사(精舍)가 있고 지붕위는 황금(黃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정사의 내부에는 청동제(靑銅製)의 등신불(等신佛)이 있었다. 정사의 서쪽에는 석제(石製) 스투파가 있다. 그앞에 있는 二十m의 석주(石柱)는 아쇼카왕이 조성한 것이다>.

현장(玄裝)이 찾아 왔을 때 사르낫은 융성기(隆盛期)에 있었다. 千五白명의 승려가 있었다는 가람(伽籃)이라면 그 규모의 크기는 짐작이 간다. 그러나 모슬렘교도의 박해를 만나 철저히 파괴되어 오늘의 폐허로 변했다. 인도 정부의 특별한 배려로 녹야원은 잘 정리되고 불교유지(佛敎遺趾)도 훌륭하게 관리되어 있다. 녹야원 가운데에 초전법륜탑(初轉法輪塔), 즉 다메크탑이 우뚝 서 있다. 적갈색(赤褐色)의 돌과 벽돌로 소박하게 쌓아 올린 원형탑(圓形塔)은 三三m의 높이와 二八m의 기단부직경(基壇部直經)을 가지고 있다. 돌로 된 기단부(基壇部)와 벽돌로 된 상부(上部)의 직경에 차이가 있다.

주위 벽에는 불함이 있고 기하문양(幾何紋樣)의 조각도 있다. 기단부의 석조(石造)는 아쇼카왕 때이고 상층(上層) 벽돌은 四. 五세기 굽타왕조때 조성되어졌다. 복발형(福鉢型) 다메크탑은 아주 중후한 양감(量感)을 안겨다 준다. 부처님이 중생을 향하여 처음으로 법문(法門)을 열었던 자리라고 한다. 이 자리에서 부처님과 중생사이에는 말씀을 통한 해후(邂逅)가 이루어진 것이다. 부처님은 최초의 말씀을 통하여 중생과 부처님의 종교적대화(宗敎的對話)가 성취었다는 점에서 녹야원 성지는 어느 성지보다도 중요하다. 성도(成道)하므로 ‘부처님’이 된 사건도 중요하지만 그 부처님이 중생을 위하여 말씀하시므로 부처님과 중생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건은 더욱 중요하다.

다메크탑 주변에는 깊이 三배, 너비 二三m의 거대한 가람터가 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기록된 대가람의 터가 바로 여기다. 기초(基礎)는 역시 아쇼카왕조때 건립되었고 그후 수차 중축(重築)되어 높이 六十m의 대탑이 이룩되었을 것이다. 유지(遺趾)가운데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석주가 세토막으로 절단되어 누워있다. 이 일품(逸品)의 두부(頭部)의 사사자조각(四獅子彫刻)은 천하의 일품으로 오늘날 인도의 국장(國章)이 되고 있다. 네마리 사자의 표정은 약동감(躍動感)을 주며 좌대(座坮)의 법륜이나 동물상조각(動物像彫刻)은 페르샤의 영향을 보여 주고 있다.

사르낫박물관의 제 一실 입구 정면에 전시된 네마리 석사자상(石獅子像)은 왕자(王者)의 위엄을 지니고 들어 오는 사람들을 위압한다. 고대 오리엔트 왕권의 권위가 들어나있다. 신라의 순례승(巡禮僧) 혜초(慧超)도 바나라시와 녹야원에 대하여 적은 기록이 있다. <하루는 바라나시국에 도착했다. 이 나라도 황폐되고 왕도 없다. 다섯명이 함께 부처님의 설교를 들었으므로 그들의 상(像)이 탑안에 있다. 위에 사자상이 있고 당(幢:石柱)은 다섯 아름이나 되며 거기에 조각된 무늬가 매우 아름답다. 탑을 쌓을때 이 당도 만들었다. 이름을 달마차크라라 부른다.> 혜초의 글은 여기서도 다소 틀린 곳이 발견된다. 밀교계(密敎界)의 승려였던 혜초와 법상종(法相宗)의 학승 현장(玄裝)의 순례시기가 약 百년 틀린다는 사실 때문에 같은 지역을 여행했던 두 사람의 기록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사실의 정확성에 있어서는 법상종의 현장이 앞선다. 여하튼 현장은 불교가 제법 융성했던 시기에 녹야원을 찾았고 반면 혜초는 황폐했던 시기에 여기를 찾았다. 아마 혜초가 녹야원을 찾았을 때는 '옷을 입지 않고 온 몸에 재칠을한’힌두교의 일파를 만났던것 같다. 오늘도 바나라시의 거리에는 반나(半裸)의 알몸에 재칠한 수행자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 혜초 당시에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그 나체도인의 모습이 중국에 오래 살면서 중국풍습에 젖었던 혜초의 눈에는 기이하게 비쳤음이 틀림없다. 아쇼카왕은 자신의 정치이념(政治理念)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여러 곳에 석주를 세웠다.

마애(摩崖)에 새긴 칙서(勅書)도 있다. 녹야원에 새겨진 그의 칙서내용은 당시의 불교승단에 대한 경고이다. 아쇼카왕 때 교단은 근본분열(根本分裂)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교단분열을 우려했던 왕은 상당히 강렬한 경고를 승단에 주었다. 비구승단은 분열을 하지말고 화합(和合)하여 부처님의 법을 펴 달라는 것이다. 같은 시대에 세웠던 산치의 석주에는 분열을 조장하는 비구승을 교단에서 축출하라고 까지 경고했다. 승단(僧團)을 말하는 ‘상가’의 원어는 화합중(和合衆)을 의미한다. 평화를 지향하는 보편교단(普遍敎團)이다. 그런데 상가 자체가 망견의 대립으로 분열된다면 평화를 지향하는 보편교단이란 거룩한 뜻이 무너지고 만다. 상가의 분열은 도리어 사회의 분열을 조장할 우려까지 있다. 여하튼 교단의 분열이 교단의 교시를 바라고 있던 세속에 훌륭하고 깨끗한 영향을 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쇼카왕도 불교교단의 분열에 대하여 강경한 경고를 준 것 같다. 그러나 불교교단은 아쇼카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분열하고야 말았다. 불교사의 목차(目次)에는 ‘부파불교(部派佛敎)’라는 한 항목이 들었을 정도다. 따라서 불교교단의 분열은 지금 二천二백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후 교단은 근본분열부터 시작하여 二十분파(分派)로 갈라지고 나중에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다시 세포분열(細胞分裂)을 일으켜 왔다.

오늘 불교가 전파된 나라에는 어디서나 교단의 분열을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므로 오늘 비구승단(比丘僧團)이 다시 분열할 징조를 보인다고 하여 새삼스럽게 놀랄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불교사가 분열사(分裂史)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승단의 분열을 긍정적으로 받아 드린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실(史實)이 그렇다는 것 뿐이다.